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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수인 Sep 24. 2024

그리 아끼다 똥 됐다.

3장 이해타산(3)






“에이! 그거라면 앞으로 우리가 엄마 속을 든든히 채워드리면 되지. 때마다 맛있게!”


압력 밭솥의 외침과 동시에 그에게서 취사가 완료 되었다는 소리가 났다. 희주는 이보다 더 충만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정하게 그를 돌아봤다. 한쪽에서 들리는 성진의 짜증 섞인 목소리도 전혀 거슬리지 않았다. 그저 한 그릇 씩 완성되어 가는 한 상 차림이 기대될 뿐이었다.  


“그래, 우리가 그렇게 해드리자. 엄마, 저런 얼굴 너무 오랜만이다.”


느슨하게 풀린 입매와 살짝 올라간 희주의 윗광대를 보며 모두가 한마디씩 덧붙였다. 밝아진 희주가 앞치마에 손을 문질러 닦았다. 그러고 나서 지연에게 얼른 카톡을 넣었다. 얘, 아가. 몸은 좀 어떠니? 너 좋아하는 애호박 볶음이랑 소고기 미역국 해놓을 테니. 피곤하더라도 와서 한 술 들고 국이랑 반찬 꼭 챙겨서 가거라. 성준이 운전 하나 싶어서 너한테 바로 전한다. 보면 답해주거라.


신발장 청소를 성공적으로 마친 성진은 부엌 안을 슬쩍 들여다보며 희주가 무얼하고 있는 중인지를 살폈다. 희주는 뜨겁게 달군 스텐리스 팬 위에 채 썬 당근을 달달 볶아내고 있었다. 성진은 그 모습을 조금 더 지켜보다가 싱긋 웃고는, 양 손에 든 종량제 봉투 한 묶음과 유품 정리용 상자를 다시 고쳐 들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제일 먼저 정리 당할 거 같지? 각오들 단단히 하고 있자.”


방 한 쪽 벽면을 전부 차지한 12자 오크 나무 원목장이 굳은 목소리로 무겁게 말했다. 그러자 그 안에서 희미하게 알았다는 응답들이 들려왔다. 성진은 그런 것들은 알지 못한 채 가장 안쪽 칸 앞으로 다가가서 장롱 문을 열었다. 오, 여기도 장난 아니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의 눈동자에는 은근한 흥분감이 스며들어 있었다. 성진은 냉큼 팔을 뻗어 고등학생 때부터 질리게 봐 온 제상의 낡은 코트 한 벌을 집어들었다. 그는 다시금 이 곤색 코트가 얼마나 세월을 먹고 살아 왔나 살폈다. 유물이다. 유물. 어떤 애를 써도 절대로 가라앉지 않을 만큼 보풀이 많이 난 소매를 보며 성진이 혀 끝을 찼다. 거의 10년 간 교복처럼 이 코트를 입고 다녔을 제상의 추운 겨울을 가만히 떠올려 보니 더 아득하게 느껴지는 존재였다. 그러나 성진은 옷걸이를 붙들고 있는 손을 타고 코트 무게가 점차 팔로 전해지자, 곧 흥미를 잃고 그 곤색 역사를 유품 상자에 처박아버렸다. 다음은 검은색 칼라가 넓게 붙은, 엉덩이를 살짝 덮는 퀄팅 패딩이 들려나왔다. 그 다음에는 형광 연두와 주황색이 엇갈려 염색된 과히 화려한 등산복 세트가, 또 이어서 제상의 친형이자 성진에겐 큰아버지가 되는 이에게서 물려 받은 제상의 삶의 모양과는 결코 맞닿을 수 없는 고가의 골프 웨어가 뻘쭉하게 빠져나와 상자 안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상견례나 결혼식장에서 몇 번 봤던 고가의 양복 두 벌까지 걷어 들인 성진은 깨끗하게 텅 빈 장롱 안을 보며 흡족한 표정을 했다.


“큰일입니다. 다들 이리 무력하게 가다니요.”


삽시간에 농을 다 비운 성진과 그의 손아귀에 조용하게 끌려나와 처분된 옷가지들을 보며 누군가 아주 비통하고 우아한 목소리를 냈다.


“지금으로선 달리 방도가 없으니 그저 체념한 것일 게요.”


그를 달래는 또 다른 누군가 또한 아주 기품이 흘러 넘쳤다.


“폐하, 정녕 이대로 끝이옵니까?”


“그렇소. 이 길 말고 다른 길은 없을 것이오. 부인. 우린 이미 사용 기한을 한참 전에 넘겼을 뿐만 아니라, 유통기한 또한 다 할 날이 머지 않았소.”


“허나, 폐하. 저와 폐하께선 귀하디 귀한 재료를 엄선해 엑기스 진액으로만 농축해 만든 고 기능성 에센스이옵니다. 헌데 어찌하여 이런 우릴 쉬이 내칠 수 있단 말입니까? 어마마마께서 아끼고 아끼시다 이리 된 것을요.”   


“그런 판국을 보고 아끼다 똥 됐다 하는 것이라오. 우린 여기까지인 게요. 그러니 부인, 너무 심상해 마시오. 그나마 그대와 내가 죽음의 순간까지도 함께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오? 내 끝까지 부인 곁에 있어주리다.”


“폐하아—.”


롯데 홈쇼핑 기획팀에 입사한 성준이 고가의 한방 화장품 특가 구성 상품이라며 들고 온, 대강 보기에도 꽤나 고풍스러운 미색의 매끈한 윤조 에센스가 그에 비해 다부지고 중후한 흑색의 본윤 에센스를 향해 가볍게 아양을 떨었다.


“그럼에도 소첩은 성진 공주의 저 무자비한 손길이 매우 무섭습니다. 폐하께서 혹 옥체를 상하실까 염려도 되고요.”


“그도 그리 염려마시오. 그 고통의 한 순간, 짐과 함께라면 영영 두렵지 않을 것이니. 자, 우리보다 먼저 가는 이들의 명복이나 빌어 줍시다.”


화장품들이 하는 대화 따위를 들을 리 없는 성진은 장롱 구석에 있는 오랜 먼지까지 완벽하게 닦아내고서 다음 칸으로 이동했다. 이번에는 제상의 계절 별 와이셔츠와 업무용 양복 세트, 즐겨 입던 평상복에 희주의 몇몇 옷가지들이 함께 걸린 자리였다. 빽빽하다 못해 뻑뻑하게 들어찬 가운데 칸을 연 성진은 제상의 것으로 보이는 낡은 옷들만 빠르게 꺼내 망설임 없이 두 발 앞으로 툭툭 떨어뜨렸다. 그러던 중 방바닥에 무언가 딱딱한 것이 떨어져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성진은 허리를 숙여 방금 자신이 떨어뜨린 양복 자켓을 주워 들고 양쪽 주머니를 몇차례 쥐었다 놓았다 반복했다. 그러다 무언가 짚이는 게 있다는 표정으로 가슴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아싸아! 나도 이제 죽는다아!”


성진의 손에 의해 밖으로 빠져나온 이가 이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독특한 추임새를 내며, 투둑! 바스락! 종량제 봉투 안으로 떨어졌다. 안방에 있던 모두가 그의 정체가 무엇인지 주목했다. 고민도 없이 대차게 처박힌 그는 제상이 즐겨 피우던 담배 에쎄 수 0.1이였다. 비록 그의 조상이 막 출시 되던 시절에는 세련된 젊은 여성들을 위한 센스 있는 담배라는 마케팅 문구와 함께 산뜻하게 폭망할 위기에 처한 적도 있었지만, 현재는 고령화 시대로 진입하면서, 각종 성인병 진단을 필히 앞두고 연초의 새 다짐인 14일 금연 시도라도 하다 실패를 거듭하는 우리네 아버지들에게 그나마 순한 이게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냐는, 그깟 몇 미리 덜 든 타르 함량으로 효녀 심청과도 다름 없어진 스테디셀러 제품이였다. 제상도 수 0.1을 택해 회사 사무실 들어가기 전 하나, 퇴근 후 집으로 들어오기 전에 하나, 그렇게 남은 애연가로의 여생을 타협한 상태였다. 그러나 성진은 그 마저도 늘 불만이었다. 이미 혈당, 혈압, 간수치가 눈에 띄게 올라가 있었고, 매년 갱신 됐다. 더구나 살아오는 내내 그 매콤 텁텁한 냄새가 참을 수 없게 싫었다. 제상이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돌연사한 것도 담배가 상당 부분 일조했을 거란 생각을 성진은 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있는 원한을 힘껏 다 풀어내려는 사람처럼, 더욱 악을 써서 에쎄를 내던져버렸다. 망할 것! 저 지긋지긋한 것이 이제서야 이 집에서 완전히 사라지겠네! 하면서 말이다.    


“어머, 쟤 봐. 정말 듣던대로 성깔이 보통이 아니네? 내가 뭘 어쨌다고 저렇게 째린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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