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이해타산(4)
“어머, 쟤 봐. 정말 듣던대로 성깔이 보통이 아니네? 내가 뭘 어쨌다고 저렇게 째린담?”
에쎄 순 0.1은 별스러운 게 까분다는 투로 톡 쏘아 말했다. 그 모습을 보던 다른 이들은 역시 그가 예사롭지 않은 상대임을 알아챘다.
“큼! 인사할게요. 난 이제상이란 남자가 죽기 몇 시간 전, 편의점 앞에서 겨우 한 대 태우고 몽땅 남기고 간, 담배 피 중 한 개예요. 만나서 반가워요.”
새초롬한 그의 소개에 모두들 웅성거리기만 했다. 바로 그때, 윤조 에센스가 불편한 기색을 보이며 입을 열었다.
“참으로 반갑구나. 헌데 어째서 아바마마의 존함을 그리 함부로 부르는 것이야.”
준엄한 꾸지람이었다.
“아아, 전 그런 기품 있는 건 못해요. 워낙 자유분방한 스타일이라.”
그러자 윤조 에센스는 본윤 에센스를 지그시 쳐다보며 도움을 청했다.
“으흠, 그래. 너의 삶이 그렇다고 하니 내 이해 하도록 힘 써 보마. 허나, 너의 몸에서 풍기는 그 쩐내는 아주 적응하기가 어렵구나.”
“아아—, 근데 이게 제 매력인데 어쩌죠?”
기세가 전혀 꺾이지 않는 에쎄 담배를 보자, 윤조 에센스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만일 자신이 버려지게 된다면 분명히 저 종량제 봉투에 에쎄 담배와 함께 담길 텐데 그땐 도무지 싫은 티를 안 낼 자신이 없었다.
“뭔가 불안하고 초조하신가 봐요? 거기 예쁜 언니.”
“예쁜 언니? 나를 말하는 것이냐?”
“네. 여기서 제일 예쁜 언니는 그 쪽 밖에 없는데요?”
윤조 에센스는 은근히 넉살 좋게 구는 그를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뭐… 고맙구나. 헌데, 어찌하여 내가 불안해 보인다는 것이냐?”
“그야. 그 안에 있는 진액인지 윤액인지 하는 에센스가 자꾸만 찰랑거리잖아요.”
윤조 에센스는 꽤나 예리한 에쎄 담배의 답변에 애써 침착했다.
“언니 저 마음에 안 들죠?”
“그, 그건 또 무슨 근거에서 그리 묻는 것이냐?”
“언니 몸에선 좋은 향내가 나는데, 내 몸에선 쩌든내가 나잖아요. 원래 고운 신분에 있는 이들은 저 같은 싸구려 같은 것들한테 꺼리는 마음이 들거든요. 굳이 내색은 안 하더라도.”
“뭐, 무엄하구나! 어찌 나의 심중을 두고 그런 가벼운 짐작을 해대는 것이야!”
“세상은 우릴 무서워하고 혐오해대면서, 또 사랑하니까요.”
“뭐라?”
“난 쉽잖아. 다들 쉬워서 사랑해요. 그런데 또 쉬워서 미워하고. 그러다 보면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혼란스러울 때가 많아요. 그렇게 보기 싫으면 그냥 다 없애버리지 싶다가도, 애타게 한 개피 위안 삼아 찾는 걸 보면 또 짠해지기도 하고. 근데 욕은 우리가 다 먹죠. 보기에도 안 좋고, 심신 건강에도 안 좋고, 거리도 더러워지고, 냄새도 고약하고……, 난 그냥 1분 정도면 공기 중으로 녹아 없어지는데. 근데 그걸 서러워 할 필요도 없더라고요. 난 그냥 악하게 태어났어요. 내가 아무리 억울하다고 한들, 나도 다 사정이 있다고 그런들, 이 세상이 날 싫어할 만한 이유는 너무나 많은 걸? 근데 또 그러면서도 날 자꾸 찾아. 그게 진짜 미칠 지경이라니까요? 쯧, 아무튼 그래서 전 항상 피해의식에 열등감을 감당하며 살아요. 언니 같은 예쁜 물건은 절대 모를 그런 것들.”
에쎄 수 0.1의 이야길 듣던 윤조 에센스와 본윤 에센스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원래 천것들이 사연이 많잖아요. 시름도 깊고. 그러니까, 걱정하실 거 없어요. 저 해롭게 태어난 건 맞는데, 그거야 뭐 인간들한테나 그러는 거고. 냄새가 좀 거북할 뿐이지 물건들끼리 서로 기분 구리게 만들 일도 별로 없을 거고……. 사실 저 지난 49일 간, 장롱 속에 처박혀 있으면서 두 분 이야기 많이 전해 들었어요.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내적 친밀감 같은 게 좀 생겼나봐요. 보자마자 너무 반갑더라고요? 흫, 근데 그건 내 사정이구. 언니 오빠는 제가 아는 체 하는 거 불편해 하시는 거 같으니까, 원하시면 지금부터 제 말 다 씹고 무시하셔도 돼요. 저 혼자서도 되게 잘 살아요. 고독한 인간들의 뮤즈 답게.”
끝마디에 애살을 가득 담은 에쎄 담배를 지켜보고 있던 윤조 에센스의 속이 괜스레 촉촉해졌다. 그러면서 아주 근원적인 호기심을 잔뜩 일었다.
“너에게 누가 우리 얘길 했다는 것이냐?”
본윤 에센스가 물었다.
“제 선배요. 저 파란 상자 옆에 세워 놓은, 낡아빠진 서류 가방 하나 보이죠? 저 속에 딱 한 가치 남아 있는 메종 담배가 있어요. 저 보다 한 5, 6년 먼저 왔다나?”
“그래. 그 담배가 우릴 두고 무슨 이야길 했느냐?”
“뭐, 그 선배는 말이 많아요. 원래 담배들은 말이 많죠. 고독한 담배들도 누군가를 만나면 반드시 그렇게 돼요. 그냥 별 거 없어요. 이 집은 어떤 집안인지, 가족들과 물건들 사이에 어떠한 관계가 있었는지, 되게 여러가지 이야기를 시도때도 없이 해줬어요. 그러다가 특별한 일화를 말해줬죠. 어느 날 염희주 씨, 그러니까 이제상 씨의 아내 분 화장대에 자기가 올라가게 됐다는 거예요? 거기에서 아주 아리따운 물건 하나를 만났는데, 한 눈에 반해서 말이라도 걸어보려고 했대요. 근데 그 옆에는 또 너무 잘난 짝이 있었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때 김이 팍 샜다나 뭐라나. 어쨌건 나와 보니 알았죠. 그 부부가 바로 언니와 오빠라는 걸.”
설화수 화장품 내외는 자신들에게는 언니, 오빠라 부르면서, 이 집안 물건들 모두의 부모이자 주인인 제상과 희주를 이름으로 부르는 건방진 에쎄 담배의 가벼운 언행이 여전히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 만이 가진 삶의 모양이라 생각하고 나무랄 생각을 넣어두었다. 대신에 흥미로운 기색을 내놓고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해서? 어서 더 말해보거라.”
“두 분이 아주 금슬 좋은 부부라는 사실을 안, 그래서 좀 뻘쭘해진 레종 담배 선배는, 그때부터 며칠 동안 두 분을 계속 관찰했대요.”
“그래?”
“네. 어째서 저렇게 둘은 곱고 사이가 좋을까? 근데, 그게, 결국, 이제상, 염희주 부부와 아주 관련이 깊더라는 거죠.”
“아바마마와 어마마마가 우리와?”
“네. 매일 밤, 중년을 넘겨 노년으로 들어선 부부답지 않게 서로의 얼굴에 대고 언니 오빠를 콕콕 찍어 발라주면서 투닥거리셨다면서요? 그것도 아끼고 아낀다는 핑계로 조금씩 조금씩 오래 오래.”
“저런! 그런 이야기를 어찌 그리 서슴없이 내놓느냐!”
윤조 에센스가 당황해 소리쳤다.
“그게 그렇게 부끄러울 일이에요? 난 듣는 동안 너무 부러워서 닭살이 다 돋았는데?”
“에헴, 부인, 그만 침전하시오. 내, 저 아이의 당돌한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매우 흥미가 돌고, 또 지난 날이 너무나 꿈만 같아 애석하오.”
“폐하……. 어찌 또 그러십니까?”
“아바마마와 어마마마를 갈라 놓은 무정한 하늘이 원망스럽소이다.”
“그것이 천륜인 것을요. 생과 사를 누가 어찌 거스른답니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소첩에게 걱정할 것 없다 하시더니…… 이리 심상하시면 소첩은 어찌해야 합니까.”
“그래요. 오빠. 언니 말이 맞네. 그러지 마시고, 그간 있었던 두 분의 러브 스토리나 들려주세요. 달달하게.”
“이이, 그른 게 듣고 잡은 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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