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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수인 Sep 23. 2024

휘뚜루마뚜루 참기름

3장 이해타산(2)






“야, 너 왜 그래? 안 나가?”


“아이…… 나……. 새벽에 너무 많이 써서 아무래도 지금은 좀 모자라단 말이야.”


“아니. 그래도 나가야지. 어떡하려고 그래?”


“나 사실 죽는 건 처음이잖아. 그래서 지금 좀 무서워.”


“얼씨구. 야. 이 부엌에서 안 죽는 애들이 도대체 몇이나 된다고 그러니? 넌? 잔말 말고 얼른 나가!”


국간장 통이 별스럽게 군다며 등을 떠밀자, 희주가 드디어 참기름 병을 집어들었다. 그는 아주 부드럽고 능숙하게 병뚜껑을 열어 고소한 향내를 맡았다. 미소 띈 그의 모든 행동이 일련의 어떤 연속성을 가지며 왠지 모를 기대감을 잔뜩 불러일으켰다. 때 맞춰, 가스불이 은은하게 올라와 미역에서 나온 수분이 치지직하고 증발하는 소리가 났다. 희주는 더 지체하지 않고 병을 거꾸로 뒤집어 참기름을 미역 위에 몽땅 쏟아부었다. 그러나 그 순간, 눈 앞에서 조금 이른 감 있게 마지막 기름 한방울이 똑 하고 떨어지자, 희주는 눈을 가늘게 뜨고 얼른 병 안쪽을 살피며 입맛을 다셨다. 아이구 조금 모자라네? 약간의 당혹감이 서린 그의 목소리에 다음 타자로 나서려던 각종 양념들과 주방 도구들이 함께 당황하기 시작했다.     


“됐어. 다음은 나야. 가끔 부족한 게 있을 때도 있지 뭐. 어쨌든 간만 잘 맞으면 돼. 꽃소금, 너 정신 똑바로 차리고 얼른 나설 준비해.”


국간장이 아주 다부지게 말했다. 그와 함께 양념통에 있던 다른 이들도 다시 기세를 갖추고 기합을 넣었다.


“쟈들 참 대단하다 않나?”


스텐리스 들통이 빈 뜰채에게 속삭이자, 원목 도마가 다시 감상에 젖어 덧붙였다.


“저들은 정말로 최고의 전사지. 단 한 번도 죽음 앞에서 주저한 적 없이, 온몸을 그대로 불살라서, 이씨 집안 식구들을 다 먹여 살렸으니까.”


“그렇죠. 우리야 쓰임 상태에 따라 이 자리를 오래 지키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지만, 저들은 금방 죽을 운명임을 알면서도 매번 최선의 다해 임무를 완성해 나가요. 보고 있으면 절로 경탄하게 된다니까요.”


작은 과도가 맞장구를 치며 흥분했다. 그러자 그 주변 어딘가에 놓여 있던 참기름 병은 자신의 빈 공간이 곧 또 하나의 완성이기도 하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뭉근한 기쁨이 올라오며 어쩐지 여한이랄 것도, 두려움이랄 것도 없이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이제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가는 중이었다. 겨우 간을 맞추고 돌아온 국간장과 꽃소금이 모두의 환영과 찬사를 받으며 양념통으로 다시 자리잡았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쉽게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언제든 다시 희주의 손 안으로 들어가서 온몸이 전부 불타 사라질 준비를 하느라 말이다. 바로 그때, 고소한 향이 확 하고 부엌 전체에 크게 끼쳤다. 진득한 국물이 베어나오며 미역 볶음 위로 황금빛 기름띠가 슬며시 비쳐 끓었다.


“너무 좋다.”


뜰채가 아주 황홀하단 목소리로 말했다. 희주는 질 좋은 양지고기를 미역과 함께 볶고, 미리 받아 둔 생수 한 컵을 그 위에 더 부었다. 옅게 보글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희주는 스텐리스 들통에 그것들을 모두 옮겨 담았다. 그런 후 비워진 팬에 생수를 다시 받아 들통에 가득히 들이부었다. 불 위에 올라 앉은 들통은 별 말 않고 조용했다. 마주 보이는 곳에서 밥이 끓기 시작했다. 희주는 이제 잘 벼려진 식칼을 꺼내 원목 도마를 집어들었다.


“이번엔 또 뭘 준비하실까?”


“애들 잘 먹는 거 하시겠지.”


“아, 그럼, 성진이 누나, 잡채네!”


“아무래도.”


식칼은 요 며칠 희주가 자신을 찾지 않아 서운하려던 참이었다. 그의 예상과 같이 희주는 냉장고로 몸을 옮겨 껍질이 손질 된 당근 하나와 목이버섯, 애호박 두어 개, 가지가 든 통통한 봉지를 들고 돌아왔다.


“근데 당면 먼저 불려야 할 거 같은데?”


잠시 쉬고 있던 양푼이가 재빨리 말했다. 마침 희주도 같은 생각을 한 것인지 손을 뻗어 윗 찬장을 열었다. 노오란 당면 봉지가 밖으로 나오자, 양푼이가 싱크대에 묻은 물기를 이용하여 희주 앞으로 미끄러져 나왔다. 그러자 희주는 양푼이에 물을 담아 당면을 한움쿰 잡아 넣고 불리기 시작했다. 희주는 식칼을 들고 당근을 적당한 간격으로 어슷썰었다. 본격적인 칼질이 시작 되자 식칼이 흥나게 노랠 불렀다.


얼마 후 희주는 성진을 불러 오래 두고 쓴 소분용 김치통 하나를 꺼내주며, 김장 김치 두 포기만 담아오라 시켰다. 성진은 꽤나 낡은 그 김치통에 불만이 가득해 다용도실로 들어갔다.


“아휴, 저게 또 어무이 속을 긁네. 긁어. 지도 살림살이 다 해보면서.”


“스타일이 다른 거죠. 뭐. 요즘은 워낙에 좋은 제품들이 계속 업그레이드 되서 나오니까, 젊은 사람들은 그런 걸 또 쉽게 들여서 쓰다 버리고 하더라고요.”


종종 과일을 깎으러 거실로 나갔던 과도가 TV에서 본 일을 도마에게 말해 주었다.


“사람이 말이야. 너무 그렇게 유행을 따라가도 못 써. 뭐든 서로 정이 들어 없으면 제법 아쉽다는 것도 알아야 아끼고 소중하게 대하지. 어째 그렇게 쉽게 쉽게 모든 걸 금방 금방 다 바꾸남? 섭섭하게 시리.”


“그래서 그런가? 자꾸 없어지니까?”


부엌 한쪽에서 제법 존재감을 드러내며 서 있던 냉장고가 문득 그런 말을 던졌다.


“엄마 말이야. 아무래도 좀…… 이상하시거든? 어제도 그렇잖아. 한 세 시쯤인가? 갑자기 새벽에 일어나셔서 나한테 있던 묵은 반찬들 몽땅 털어 밥이랑 같이 비벼 드시고……, 언젠가부터는 눈에 뭐가 보이기만 하면 일단 입에 다 넣어버리시고…….”


“맞아. 이상해. 나 엄마가 이 솥에 있는 밥 한통 다 드시는 거 보고 놀라 자빠질 뻔 했잖아.”


압력 밥솥이 호들갑을 떨며 거들었다. 새벽녘 낯선 모습을 한 희주에게 충격을 받은 이들은 밥솥과 함께 맞장구를 치며 떠들기 시작했다. 원목 도마는 그런 그들의 얕은 헤아림에 더럭 성이 솟을 뻔 했다.


“원래 마음이 헛헛해지면 허기도 더 진다 하지 않나?”


마침 도마가 하고 싶었던 말을 스텐리스 들통이 해왔다.


“그래. 심정이 허 하면 사람은 쉽게 배가 곯아. 5년 전에 성진이 결혼 해서 나가고, 재작년에 병수발 들면서 살뜰히 모신 할머니 돌아가시고, 작년에 성준이 결혼시키고, 이제 좀 한숨 돌려 본인 인생 즐겁게 사시나 했더니, 무슨 날벼락인지 아부지가 돌연 떠나버리셨어. 그동안 이씨 집안 식구들 밥 해 먹이면서, 하나하나 손 안 닿는 곳 없이 보살펴 가면서, 미운 거 고운 거 전부 끌어안고 사시던 분인데, 지금은 그 빈자리가 얼마나 크겠냐?”


“가여운 우리 엄마 언제 쯤 괜찮아지시려나.“


냉장고의 말에 부엌에 있던 모두가 희주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에이! 그거라면 앞으로 우리가 엄마 속을 든든히 채워드리면 되지. 때마다 맛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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