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이해타산(1)
성진이 신발장으로 사라진 후 희주는 조금 더 양파를 깠다. 그의 손에서 양파 알이 맨들하게 빠져 나와 소쿠리에 담길 때면, 보고 있던 모든 이들의 마음은 흐뭇하고 단정해졌다.
“와아— 요 생미역에서 나는 완도 바다의 푸른 냄새, 너무 좋다.”
스텐리스 뜰채가 뽀득하게 씻겨서 자신의 품에 담긴 진연두빛 미역의 신선한 짠내를 맡고 행복해했다.
“산모한테 그거이 좋타하지 않나?”
그와 같이 가스레인지 바로 옆 싱크대 위에 올려져 있던 스텐리스 들통이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그런 말을 나도 들은 적 있는 거 같아. 근데 강원도 너, 되게 오랜만에 밖으로 나온 거 같다. 그치?”
뜰채가 애살스럽게 물었다. 그때 마침 희주가 싱크대 선반 위에 떨어져 붙은 양파 껍질 한 조각을 줍기 위해 뜰채를 들통 가까이로 더 밀어 놓았다.
“어어, 그, 그렇지. 그런데 그, 그렇게 드, 들이대면 내, 내가 좀…….”
“어? 들이대? 뭐야, 너 지금 혹시 나 때문에 부끄러워 하는 거야?”
“아니다.”
“아니야?”
“그래. 아니다. 내가 원래가 숫기가 없다 하지 않나.”
그러나 뜰채는 아주 상기된 목소리로 스텐리스 들통을 계속 놀렸다. 그 사이 희주는 떨어진 양파 껍질 조각을 다 모아서 빨간 양파망에 담고, 한쪽 구석에 있는 쓰레기통 뚜껑을 발로 열어 구겨넣었다. 다시 돌아와 물을 틀고 손을 닦은 그는 싱크대 통에 미리 넣어두었던 양지고기를 손으로 주물거려 핏물을 빼기 시작했다. 깨끗한 물에 몇 차례 더 고기를 헹군 그는, 그것을 각종 양념통이 자리한 조리대 위에 올려두었다.
“그 다음은 난가?”
“에이, 참. 넌 성질도 급하다. 아무래도 너보단 참기름이 먼저겠지. 고새 순서도 잊어 먹었냐?”
국간장이 옆에 붙은 꽃소금 통에게 핀잔했다. 그러나 희주는 고기를 볶기 위해 꺼낸 스텐리스 팬을 들다 말고 얼른 자리를 옮겼다. 다른 무언가가 먼저 생각난 것이다.
“그렇지. 밥을 먼저 하셔야지.”
부엌 물건 중 가장 오래된 원목 도마가 베테랑답게 순서를 뀄다.
“오늘은 무슨 밥을 하실까요? 완두콩? 아니면 좁쌀밥? 현미밥?”
“며느리 취향에 맞게 하시겠지. 아부지 안 계시니까.”
도마의 말처럼 희주는 흰쌀만 듬뿍 담아 싱크대 앞으로 돌아왔다.
“아, 역시! 젊은 애들은 맨밥을 제일 좋아하죠.”
“그래도 당뇨 안 걸리게 조심해야지. 우리 아부지 갑자기 그렇게 가신 것도 다 그런 이유인지도 몰라.”
“맞아요. 건강은 미리미리 주의해서 챙겨야죠. 요즘은 백이십 세까지 산다잖아요. 하휴…… 오래 사는 건 좋은데, 아프면 건 또 그거대로 더 문제라니깐.”
양파 까는 임무를 마치고 칼집에 들어간 과도가 종알거렸다.
“근데 저거 오대쌀이나?”
뜰채와 도란거리던 스텐리스 들통이 소쿠리에 담겨 여러 차례 치대지고 있는 뽀얀 쌀알들을 향해 물었다.
“뭐, 쟤들이랑은 대화를 나눌 수가 없어서 난 잘 모르겠는데?”
“아, 그러나?”
“근데 왜? 너 원래 되게 과묵하지 않냐? 오늘은 좀 다른 거 같다?”
“아, 그러나?”
스텐리스 들통은 도마의 물음에 멋쩍은 건지 뜰채와 대화할 때와는 전혀 다른, 원래의 그의 태도로 다시 돌아왔다. 원목 도마는 그런 들통의 모습에 자꾸 웃음이 비져나왔다. 그는 순간적으로 장난기가 도져 놀림거리를 찾아냈지만, 압력 밥솥이 끼어드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얘들아! 그거 강원도 철원에서 온 오대쌀 맞아!”
“야, 강원도 너 그거 어떻게 알았냐?”
“기양…… 쌀 치대는 냄새가 그래 났다.”
“오와— 너 진짜 대단하다. 어떻게 냄새만 맡고도 그걸 알아? 같은 강원도라서 그런가?”
“그렇타기 보다는……, 햅쌀이라 그런지 흙내가 그래 났지. 근데 나는 양양 바닷가 출신이고, 저 쌀은 DMZ가 있는 철원 평야 출신이라 사실은 같은 곳에서 왔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래? 그럼 난 어디 출신인 거 같아?”
“그기야…… 내가 잘은 모르겠지만서도, 너는 나 같이 바다에서 온 아이 같다.”
뜰채는 맞았다며 신이 나서 맞장구를 쳤다. 들통은 쑥스러워 다시 벙어리가 되기 시작했다.
“아휴, 좋을 때다.”
“뭐가요?”
“아니야. 내가 이 세월을 살고 보니, 다 때라는 게 있어서 그래.”
작은 과도는 도마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었지만, 가끔 웬 늙은이와 같은 소리를 하기도 해서 그냥 두기로 했다. 원목 도마는 이번엔 희주가 뜰채와 들통을 함께 수납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희주는 쌀을 다 씻고 밥물을 맞췄다. 압력 밥솥으로 가서 밥통에 쌀을 들이붓고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평소에 잘하던 쾌속 취사가 아닌, 일반 취사를 선택해 눌렀다.
“며느리가 진밥을 좋아하던가?”
“그럴수도 있겠네요.”
“오대쌀은, 원래도 많이 찰져서 너무 질게 하면 숟가락에서 안 떨어질 텐데.”
스텐리스 들통이 조금 아쉽다는 듯이 혼자 중얼거렸다.
“그게 아니라, 임신하면 치아랑 잇몸이 많이 약해지고 상처도 잘 나니까, 밥 먹을 때 편하게 씹으라고 저러시는 거야.”
가만히 다른 이들의 말을 듣고 있던 주걱이 희주가 무얼하는지 알려주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어무이 성진이 갓난쟁이일 때, 이래저래 고생이 참 많으셨지. 한 여름 찌는 더위에 애는 나오고, 아부지는 하필 그때 장기로 출장을 가 계시고, 거기다가 우리 어무이, 어머니께서 일찍 돌아가셔 가지고 친정이라 할 곳도 마땅치 않으셨잖아. 그러니 그때 얼마나 생짜로 고생을 했겠냐? 서툴고 부족한 일을 하나하나 극복해내셔서 지금은 저렇게 며느리 위해 밥을 지으시네. 이제 보니 저 밥은 서러움의 산물이다.”
“아이, 서러움의 산물이라 그러니까 너무 숙연해지잖아요. 그간에 있었던 노하우라고 해요. 우리.”
“그런가? 그래. 오늘 어무이 평소처럼 자식들 맞아주시고 싶으실 텐데 내가 너무 주책 맞게 굴었네. 자! 그럼, 모두들 오늘 저녁 밥상에 올라갈 인생 최고 미역국 끓이기에 힘을 모아 보자고!”
도마가 웃으며 분위기를 바꾸려고 하자, 마침 희주가 생미역에 붙은 물기를 대충 털어 스텐리스 팬에 담고 눈을 돌려 참기름 병을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참기름 병은 자신을 찾는 일에 기뻐하지 않고, 자꾸만 희주의 눈과 손을 피하려고만 들었다.
“야, 너 왜 그래? 안 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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