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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수인 Sep 14. 2024

버림 받을지도 모른다고!

1장 유품 정리(2)






“근디 말여…….”


파란 원앙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거는 좀 짚고 넘어가고 싶으네. 사아실 가만 보믄,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리모콘 너가 여그서 쩨일 쫄리는 것이 아니것어?”


리모컨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바로 알아챘지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잘 생각혀 봐. 너도 분명히 너의 처지를 알거 아니여? 여그서 지금 너가 제일 몬난 것을. 고 휑한 자리가 하필이믄 전원 버튼 자리라제?”


대응하지 못하는 리모컨을 보니 파란 원앙은 신이 나기 시작했다.


“고것이 어느날 톡 허고 빠져부럿으야. 너 엄니께서 테레비 켜실 쩍마다 고기 고 부분, 자아꾸 신경쓰고 계시는 거 너도 자알 알고 있제? 우덜 중에서도 그걸 모르는 이가 없으니께 똑띠한 너는 더 잘 알 것이여. 아니 그란가? 암튼지간에 으쯔냐? 내 볼 적에는 버리게 되믄 너들 둘부터 버려질 거 같은디.”


“아니, 난 또 왜 엮어? 난 거기서 빼 줘. 쟤만 버리고 새로 사도 되잖아.”


“뭐어? 야!! 너 이러기야?”


예상치 못한 TV의 배신에 리모컨이 빼액 하고 소리질렀다. 옥신각신 하는 이들 주위로 다른 물건들도 끼여 열띤 토론을 시작했다. 그 틈에 성진은 손을 들어 뻑뻑한 눈을 비비고, 하품을 했다. 그가 느끼기에 거실은 아주 적막했고, 그 때문인지 피로가 점차 짙어졌다. 안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 입는 희주의 기척이 조금씩 문 밖으로 새어나오기 시작한, 바로 그때였다.


“그렇게 너무들 걱정할 필요 없어.”


일순 모두의 시선이 성진에게로 꽂혔다.


“뭐죠? 지금 언니가 말하신 건가요?”


놀라 잠잠해진 주변 공기를 깨고 지연이 가져다 놓은 스투키 화분이 물었다. 다른 물건들은 이제 그와 성진을 번갈아 쳐다보며 굳기 시작했다.


“저런, 그럴리가, 나야.”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은 건, 성진의 바로 뒤에 있던 커다란 액자였다. 가족사진을 담고 있던 그는 성진의 목소리를 다시 흉내내며 모두에게 말했다.


“뭐야. 너! 누나가 우리 얘길 듣는 줄 알고 깜짝 놀랐잖아!”


“아니, 다들 괜한 걸로 흥분하는 거 같길래. 내가 장난을 좀 쳐 봤지.”


“괜한 거라구?”


리모컨이 납득할 수 없어서 되물었다.


“음…… 내가 보기엔 지금 상황은 그때와는 좀 많이 달라서.”


“대체 그게 무슨 소린지 알아 듣게 설명해주지 않겠어?”  


“뭐, 대충 이런 거야. 언니가 나갈 때는 언니 방에 있던 것들만, 오빠 나갈 때는 오빠 방에 있던 것들만. 생각해보면 그때 다른 곳에 있던 물건들은 대체로 여기 다 남아있거든? 그리고 다들 한 번씩 TV에서 봤을 거야. 그런 일을 두고서 독립이나 이사라고 하는 거. 그러니까,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사라진 애들은 어딘가에 처박혀 비참하게 죽은 게 아니라 새로운 곳에 정착해서 잘 살고 있을 거거든.”


“아니, 그럼, 이번엔 왜 들어온 건데?”


“그야, 아부지 유품이…… 이제 안 계시잖아.”


“그렇지. 그거겠네요.”


“뭐야. 그럼? 다행이네!”


TV가 대놓고 반가운 기색을 보였다. 리모컨은 그런 그가 아주 얄밉고 괘씸했다.


“흥. 글긴 혀도. 여엉 몬 쓰는 거면 여그서 좀 나가도 되긋제. 안 그릉가 부인?”


“잉. 그람요. 서바앙. 나가야 쓰죠잉.”


여기저기서 느닷없는 애정표현에 질색하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성진이 마침 리모컨을 집어 드는 바람에 그 누구도 그들에게 뾰족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 성진은 전원 버튼을 누르려다가 엄지손가락에 닿는 딱딱한 부품을 느끼고 리모컨을 가까이로 가져왔다. 쿠션처럼 부품을 감싸고 있던 빨간 고무 패킹이 쏙 빠진 모양이 볼품 없었다. 그 모습을 유심히 쳐다보던 그는 곧 별 반응 없이 손을 뻗어 TV를 켰다. 그의 얼굴을 까맣게 반사시켜 흐리게 비추던 LED 화면이 번쩍하고 빛나더니, 뉴질랜드산 양털을 써서 만든 어그 부츠 3종 세트가 나왔다. 홈쇼핑 채널에서 다른 채널로 이리저리 돌려보던 성진은 희주가 최대한으로 줄여 놓아 거의 속삭이다시피 하는 음향을 4, 5, 6, 7, 8로 조금씩 올리다가 적정한 정도를 찾아 뉴스를 틀었다. 단단한 발성의 앵커 목소리가 거실을 적당히 채우기 시작하자 성진은 조금 흥미가 떨어진다는 표정을 하고 다시 리모컨을 들었다. 그는 몇 번을 누를 지 잠시 고민하며 전원 버튼이 있는 자리를 자꾸 문질러댔다. 리모컨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어 불안했지만, 결코 밖으로 속을 내보일 수는 없었다. 그때 안방 화장실에서 물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성진은 희주가 나올 기미를 느끼고, 그 전에 볼 만한 채널을 정하려는 듯 더욱 바쁘게 리모컨 버튼을 눌러댔다. 그때마다 TV는 누가 꼭 들으라는 듯이 한숨을 푹푹 쉬며 앓는 소리를 냈다.


“도대체 난 언제까지 이러고 살아야 하는 걸까?”


리모컨이 볼멘소리를 하는 그를 한심하게 쳐다봤다. 다른 물건들도 하루 이틀이 아니라며 TV를 무시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래. 여기 있는 모두가 알거야. 이 집에서 이렇게 유익한 존재가 또 어딨어? 정보를 넘어 무려 재미까지 선사하는 만능의 가전이 도대체 어딨냐고. 그런데 언제까지 이렇게 누군가의 지시만 받아서 움직여야 하냐고.”


“진짜 못 들어주겠네. 야. 분수를 좀 알아라. 아무리 그렇게 억울하다고 징징대봐야, 넌 그저 수신 기계로 만들어졌을 뿐이야. 통신사 케이블에서 전파 받고, 나 같은 제어 장치 신호를 받아 움직이는! 그걸 지금 무슨 수로 바꾸겠다고 몇날 며칠 이러는 건데? 그렇게 억울해 못 살겠거든, 애초에 그렇게 생겨 먹질 말던가!”


리모컨의 꾸지람에 TV는 삐쳐서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성진은 드디어 마음에 드는 채널을 찾은 것인지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소파에 몸을 완전하게 기댔다. 진녹색 잔디 구장 위로 레버쿠젠 유니폼과 호펜하임 유니폼이 뒤엉켰다. 패스, 킬 패스, 바로 윙으로 넘겨서 줘. 성진의 눈동자가 축구공을 따라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 희주가 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성진을 흘끗 쳐다보더니 몇 시냐고 물었다. 성진은 그제서야 자신의 스마트폰을 찾기 시작했다.


“아니, 언니! 그거 말고! 날 좀 봐! 나 여기에 있잖아! 바로 앞에 이렇게 예쁘고 멀쩡한 날 두고서 그걸 왜 찾아?”


얼룩덜룩한 상아빛 몸통에 커다란 핑크 리본이 붙은 플라스틱 돼지토끼 알람 시계가 얼른 소리쳤다. 마치 그 시계의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희주가 성진에게 똑같은 말을 전했다. 시계를 발견한 성진은 이게 아직도 여기 있었냐며 손을 뻗었다. 구석구석 시계를 살피는 그의 눈에 반가움과 아련함이 함께 깃들었다. 알람 시계는 그의 눈길이 닿을 때마다 호들갑을 떨어대면서 종알거렸다.


“얼마 만에 보는 건지 모르겠어. 나 안 잊었지? 그렇지?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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