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대청소(2)
“아들아. 너 괜찮냐?”
돌아가신 할머니가 주로 신던 까만색 기능성 단화가 제상의 낡은 구두를 향해 물었다.
“아이, 이 정도야 다 예감했지예. 걱정마시소, 살다 죽는 것이 뭐 그리 큰 대수라꼬예. 다 이렇게 가지 않겠습니꺼? 어무이들 그동안 참 많이 고마웠으예. 저는 여서 기양 시어언하게 떠날낍니더.”
“우야노. 나는 참말로 모르겠다. 니를 하루 아침에 보내는 이기가 맞는 기가? 다 늙어 빠진 우리도 아직 사는데, 와 니가 먼저 가뿟노? 세상이 얄궂다 진짜로.”
“알고. 우리 부산 어무이 와 자꾸 우십니꺼. 별 일또 아인데.”
“얄야, 내는 니 꼭두새벽에 일찍, 아즉 해도 다 안 뜨는데, 우리 아부지랑 같이 나갔다가 밤 여덞 시 다 넘어서, 느들느들해가지고 들어와서리, 어무이들 오늘또 잘 계셨냐꼬, 별 일은 없었냐꼬, 그래 곰살맞게 물어주면, 내 사실은 주책이다 싶그러 맨날 그릏케 눈물이 다 났다. 참 미안타. 니 고생한 거에 비해서리 이래 팔자 좋게 있었던기라 우리는. 근데 우째 니가 먼저 가뿌노? 이게 대체 말이 되는 소리가?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기 무신 일인가 싶다.”
“아이, 대쓰요. 원래가 나올 때는 다 때가 있꼬, 순서도 정해져서 나오는 긴데, 갈 때는 그런 거 없다 아입니꺼. 어무이들 더 사시니 을매나 다행이에요? 그간에 여서 제가 의지도 마이 하고 정도 마이 붙였던 분들인데……. 특히나 부산 어무이! 저는 경북이고, 어무이는 경남인데도 같은 경상도라꼬 저를 을매나 이뻐했어예. 만약에 어무이들 먼저 가신다 캤으면 제가 너무 스릅꼬, 허전했을 낍니더. 아부지가 할무이 돌아가셨을 때 기억하시지예? 그때 참…… 아부지 마이 우셨습니더. 발인 하는 날에는 아부지가 인제 자기는 천애고아라꼬 그라케 말씀하시기도 하시고……, 그 서러븐 마음을 저 혼챠 들었을 때는, 참 참담했어예. 내가 뭘 어떡해 해줄 수는 읎나. 생각해보고 또 생각해보고 그랬지예. 근데 이래 되이 저는 훨씬 좋다아입니꺼. 거기다가 꼭 아부지 모시고 따라가는 거 같기도 하고. 어찌됐든지 간에 지금이 좋습니더.”
“사실은 내 니 몬 보낸다. 이러케 암 것도 몬해주고는 몬 보내게따.”
“부산 어무이, 우리는 신발인기라요. 신발은 쓰다가 해지고, 어무이 말마따나 느들느들해져뿌면 기냥 버리고 새로 사는 기가 신발이라는 거예요. 그이까네. 울지마시소. 예? 와 그리 우십니꺼. 가는 아들 마음 다 찢어지그러.”
부산 여행지에서 사온 미색이 은은하게 비치는 흰 샌들이 신발장 안이 떠나가라 엉엉 울기 시작했다. 함께 있던 다른 이들은, 비록 각자의 칸에 들어 앉아 있어, 서로를 볼 수 없었지만 그의 울음소리에 울적함을 느꼈다.
“마음 잘 잡았으면 됐다. 네 말처럼 우리들 수명이라는 게 다 인간들 하기 나름이지 않겠니?”
“예, 그렇지요.”
“그나저나, 네가 먼저 가게 생긴 건, 그건 참…… 유감이다.”
“그러게나 말입니더. 서울 어무이, 저는 가끔 서울 어무이랑 같이 산책 나가면 그기 참 좋았으예. 아시는지는 몰라도.”
“알지. 왜 몰라. 나도 너무 좋았는데.”
“그랗습니꺼? 하하. 첨에요. 우리 아부지랑 어무니랑 할매 신장 투석 다니시는 거 힘드라가, 신발 한 켤레 사준다 캐서 뭐 얼매나 좋은 거 해줄라 카나 봤드니만, 우리 어무이가 오신깁니다. 우리 그때 다들 그랬습니더. 뭐 저래 좋은 게 왔노.”
그러면서 제상의 낡은 구두가 킬킬거렸다.
“우리 서울 어무이……, 참 속사랑이 대단하시지요. 제가 그 사랑을 참 마이 받았고예. 드린 거는 별로 없어도……. 어무이, 그동안 참 많이 감사했습니데이. 참말로요. 그리고 말이지예. 저 절대로 잊으시면 안 됩니데이. 아시지예? 흐흐.”
“웃기는. 네가 지금 웃을 처지냐? 천치에 바보같이, 그래. 그렇게 속이 없으니, 우리 아버지가 널 데리고서 그동안 그렇게 아무 탈 없이 출근도 하시고 퇴근도 하시면서 귀한 처자식에 본인 어머니까지 다 먹여 살리셨겠지. 여기 있는 신발들, 다 너처럼 하라 그러면 어디 하겠니? 네가 산 세월 반 만이라도 따라해보라 그러면 할 수 있는 이 하나 없을거야. 그만큼 수고가 컸다. 그 단단하던 굽이 다 닳아 없어지도록. 후……. 그런데 이제는 네가 재밌다고 들려주던 아버지의 또 다른 일상 얘기를 더는 같이 듣지 못하겠구나.”
기능성 단화가 내놓은 애석함에 모두들 침묵했다.
“아들아, 비록 네가 너무 살가워서, 할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효심이 매우 큰 걸 보고 들어와서, 너보다 한참 나중에 들어온 우리들한테까지 예를 다 하고, 챙겨주며, 늘상 어머니, 어머니 하고 따라줬지만, 네가 이 신발장에서 우릴 먼저 환영해주고, 함께 어울리게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그저 뒷방 늙은이 취급 받으면서 아주 좌충우돌 했을 거야. 그러니까, 그동안, 살뜰히 돌봐줘서 너무 고맙고. 그리고…….”
잠깐 하려던 말을 멈춘 단화를 두고 많은 신발들이, 마치 오래 걷고 난 후에 생긴 마찰열에 밑창이 뜨거워지는 것처럼, 안으로 깊이 스며드는 열기에 가슴이 뜨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다가 단화가,
“그동안 고생하고 사신 생, 가는 길은 편안하게 가세요.”
하고 마저 말을 마치자, 몇몇이 결국 울음을 참지 못하고 터트려버렸다. 그러던 중 신발장 안으로 미세한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성진의 손에 의해 열린 문 틈으로 파란 상자 네 개가 보였다. 성진은 신발장 안 층층이 쌓인 신발들과 여러 잡동사니들을 훑어보다가 또 한 번 인상을 찌푸렸다. 별의 별 게 다 들어가 있네. 그가 내뱉은 첫마디에 신발장 안 물건들은 왠지 처참한 심정이 들었다.
“빨리 끝났으믄 좋겠네예.”
제상의 출근용 낡은 구두의 바람과는 다르게 성진의 눈이 가장 먼저 가 닿은 곳은 제일 높은 층에 있는 배구공이었다. 근 20년 전, 체육교육학과에 진학 할 계획으로 실기에 필요한 배구공 하나를 샀었다. 흐물하게 바람이 빠진 그 공은 곧 밑으로 굴러 떨어질 것처럼 보였다. 성진은 큰 키와 긴 팔을 활용해 테니스 채를 배구공 밑에 대고 공이 움직이지 않게 잘 고정시켰다. 그 옆에는 농구공과 축구공이 까끌까끌한 가죽 주머니에 싸여 아주 잘 놓여 있었다. 이제 성진은 팔짱을 끼고서 신발장 전체를 쭉 훑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시선에 붙잡히지 않으려고 많은 이들이 숨을 죽였다.
“저 근데, 전, 사실 새 것이나 다름 없는데, 저도 그냥 버려질까요?”
몇 해 전, 성준이 사온 고급 수제 가죽 구두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두운 갈색의 수제화는 꽤나 비싼 고급 가죽을 사용했는지 예사롭지 않은 광택을 뽐내고 있었다. 그는 거의 닳지도 않은 자신의 뒷굽과 다 낡아빠진 제상의 출근용 검은 인조 가죽 구두의 굽을 번갈아보며 눈치를 살폈다.
“저 되게 비싼 돈 주고 산 건데……, 좀 아깝지 않나 싶기도 해서, 으악!”
그 순간 모두가 그와 함께 비명을 내질렀다. 흡사 쥬라기 공원의 한 장면과 같이 성진의 손이 그대로 그 구두에게 가 닿아 낚아챘기 때문이다. 성진은 그를 눈 앞에 두고 요리조리 살피기 시작했다. 그의 눈빛은 마치 마음에 드는 사냥감을 고른 티렉스와 같았다. 특히 구두가 어떤 로고를 가지고 있나 상당한 관심을 보이던 그는 처치스? 처치스가 어디 거야? 영국? 하며 구두 안쪽, 뒷꿈치가 닿는 그 자리에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브랜드 명을 반복해서 외웠다.
“으으……. 살려주세요. 제발, 저…… 저는 아직 어리고, 깨, 깨끗해요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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