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대청소(3)
“으으……. 살려주세요. 제발, 저…… 저는 아직 어리고, 깨, 깨끗해요오오.”
수제 구두가 간절히 애원했다. 그러자 아주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단단히 붙잡혀 있던 그가 성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다시 신발장 위로 올라온 것이다. 그 광경에 모두들 어안이 벙벙해졌다.
“뭐고? 얄야, 니 개안나? 우째 여 다시 와 앉았노?”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골똘하게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는 성진을 힐끔거리면서 흰 샌들이 물었다. 한 칸, 혹은 두어 칸 아래에 있던 다른 신발들도 이어서 그의 안녕을 물어왔다.
“저……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제가 어디에서 온 건지 보더니, 갑자기…… 저렇게…….”
성진의 변덕에 다들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혹시 당근마켓에 팔려는 걸까요?”
홈쇼핑에서 산 또 다른 할머니 단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성님, 뭐 아는 거 없심니까? 와 갑자기 저러고 있노. 더 불안크러.”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할머니 신발들이 의문을 가지고 여러가지 의견을 종합해 나누는 동안, 다른 이들도 저마다의 추측을 가지고 성진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현관 전등이 완전히 꺼져버렸고, 골똘한 얼굴을 한 성진은 스마트폰에서 흘러나오는 빛을 받아 얼굴만 유독 동동 뜬 상태가 됐다. 그 모습은 아주 공포스러우면서도, 도대체 무얼 하려고 저러나 궁금증을 유발시켰다.
“흠……. 근데 저거 분명히 내가 아는 표정인데…….”
간혹 아버지가 야유회나 여행을 가실 때 꺼내 신던 등산화가 혼잣말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무리 봐도, 저건 뭘 찾을 때 짓는 표정이거든.”
“뭐를 찾는데?”
“아이! 깜짝이야!”
“깜짝 놀랄게 뭐 있노. 여 니 혼챠 있는 것도 아인데.”
“되게 작게 말했는데, 제 말이 들렸어요?”
“아이고, 마, 다 들릿따! 거나 여나 뭐 거기서 거기지. 캐서 뭐, 뭐시를 찾는다는 긴데?”
“아니 뭐, 그냥, 일단. 이건 그냥 제 의견일 뿐이지만…….”
“오냐. 빨리 말해본나.”
“저 표정은, 저건 산을 타거나 어디 좋은 데 놀러 갔을 때, 어쩌다가 길을 잃거나, 식당이나 카페를 찾을 때, 그게 다 아니라면 경치가 너무 좋아서 반드시 사진을 찍어 남겨야 할 때, 그때 나오는 표정이거든요. 저게……. 근데…….”
“어, 긍데?”
“지금 우릴 보고 저런 표정을 지을 이유가 전혀 없거든요.”
“그야, 글치마는…….”
“이유야 어떻든 일단은 뭘 찾고 있다는 건 맞는거지?”
기능성 단화가 등산화와 흰 샌들 사이의 대화가 답답했는지 얼른 끼어들었다.
“아마도요?”
“흠…… 그럼, 뭘 찾고 있길래, 하던 정리도 그만두고 저러는 걸까?”
기능성 단화가 추리를 시작하려던 바로 그때, 성진의 폰에서 카톡! 카톡! 하는 알람이 울렸다. 그러자 성진은 바로 폰을 귀에다 가져다대고 누군가와 통화를 시작했다. 얼마 안 가 폰에서 남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 어디야? 엉. 로희 밥은? 어. 아니. 당신 신발 사이즈가 몇인가 해서. 265 맞아? 아…… 270이야? 엉. 아니야. 어. 나 늦어. 응. 끊어—. 전화를 끊은 성진의 얼굴 위로 어쩐지 아쉬움이 묻어났다.
“뭐꼬, 저거.”
성진이 다시 손을 뻗어 수제화를 요리조리 만져보았다. 그가 입맛을 다시자, 다들 의문이 풀린 채로 어이 없어 하는 눈치였다.
“쟈 인제 보이 순 얌새이네. 얌새이! 엉? 이기 앵가히 비싸고 좋은 갑네!”
흰 샌들이 흥분해 큰 소리를 냈다.
“그야 전……, 칠 십 만원도 넘는 신발이니까요.”
“옴마야, 뭐라꼬? 야 니 참말이가?”
“네. 성준이 형이 아부지한테 드리는 첫 선물이라고 고르고 골랐어요.”
“뭐야, 너 그럼 나보다 비쌌네?”
족히 삼 십 만원은 더 넘는, 얼추 보면 평범한 것 같지만 사실은 최대한 캐주얼하게 연출 돼 평상 시 언제라도 착용이 가능한, 고어텍스에 착화감까지 유난히 신경 써 6, 70대들에게 열렬한 사랑을 받는 스테디셀러 등산화가 매우 놀라워했다. 그는 그동안 자신을 아주 비싼 몸이라 착각하는 바람에 다른 신발들과 쉽게 어울리지 않고 있었다.
“야, 니 진짜 비싸네. 근데 성님도 좀 비싼 편이지 않어요?”
“나야, 뭐, 한 삼 십 정도 하지.”
등산화는 더더욱 입을 꾹 다물 수 밖에 없었다.
“아니, 아무튼지간에 성진이 쟈 진짜 웃기네? 지금 지 걸 챙길 상황이 되나?!”
“아이, 어무이 뭘 그라세요. 여서 누구라도 안 죽고 살면 더 좋지.”
“그래. 아우 너 좀 진정해라. 지금 그렇게 방방거릴 때가 아니야.”
“알고마, 다들 쏙이 아인 말 쫌 그만하이소. 어데 쓸 떼 한 군데라도 있으믄, 쟈가 아무리 아부지 유품이라 칸다 캐도 지는 다 쓰겠다 안 캅니까. 지금. 그라믄 살 길이 없는 것도 아이란 소린데, 와 다들 가만 있으라 캐요?”
“얘, 지금 성진이가 저러는 건, 그래. 네 말대로 수제화가 쓸만 해서 그런 거잖아. 보기에 아주 새 것 같고, 비싸고, 예쁘기까지 하니까. 그러니까, 여기서 괜히 여럿 속에 바람 넣어 뒤집지 말고, 가만히 있어. 그냥. 네 기막힌 방법이 쟤한테 어디 먹히겠니? 지금 괜히 어설프게 애썼다가 원하는대로 잘 안 되면 네 속만 더 상한다구.”
“…… 예에, 알겠으요.”
흰 샌들이 마지 못해 답했다. 성진은 그 후에도 몇 분 더 폰을 붙들고 있다가 별 표정 없이 고개를 들었다.
“이제 진짜네.”
등산화가 닥쳐 올 시련에 절망을 섞어 시작을 알렸다. 그의 말대로, 성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성진은 몸을 움직여 미리 접어 놓았던 파란 상자 하나를 질질 끌고 와서 신발장 옆에 떡 하니 놓았다. 그러고 나서는 가장 왼쪽에 있는 제상의 신발 하나를 꺼내 들었다. 주황빛이 살짝 감도는, 대나무 매듭처럼 십자로 네모나게 얽힌 유행 지난 갈색 샌들이었다.
“하이고, 나는 인쟈 더는 몬 보겠다.”
흰 샌들은 복받침에 몸을 떨었다. 그 떨림이 성진의 움직임에 의해 신발장이 흔들려서 그런 것인지 진짜로 흰 샌들 스스로가 떠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신발 전체에 전염 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아버지의 출근용 검은 구두가 성진의 손에 들렸을 때, 그걸 지켜보던 다른 신발들은 슬픔과 공포를 이기지 못해 울음소리를 냈다.
“잘들 지내야 합니더! 고만들 울고예! 저 진짜로 괜찮고 아부지 따라가이 좋아예!”
신발장을 빠져나오면서도, 검은 구두는 울고 있는 모두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며 웃는 소리로 그들을 달랬다. 그러나 그가 상자 안으로 완전히 들어가 모습을 감추자, 거의 모든 신발들이 목 놓아 통곡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아이씨! 진짜! 시끄러워서 못 살겠네! 그만들 좀 처울어!”
이 글의 시작이 궁금하다면,
https://brunch.co.kr/@hansuin/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