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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수인 Sep 19. 2024

수능 부적 나이키

2장 대청소(4)






“아이씨! 진짜! 시끄러워서 못 살겠네! 그만들 좀 처울어!”


누군가 마구 짜증을 퍼부었다.


“뭐고, 지금 누고? 누가 이래 씅질이고?”


“내가 누군지 알 건 없고. 지금 너네들 이러는 거 때문에 시끄러워 죽겠다니까?”


신발들은 신발장 가장 아래 칸 구석에 있는 누군가를 향해 귀를 기울였다.


“아니, 내는 니가 누군지 하나도 안 궁금타. 니가 뭔데 지금 이래 심각하고 슬픈 상황에 씅을 내냐 이 말잉데, 와 딴 소릴 하노!”


“저기요. 아줌마. 난 지금 이 상황에 대해서 내 알 바도 아니고요. 그냥 진짜 개시끄러우니까 조용히 좀 해달라고요. 네?”


“옴마야, 이기 미칬나. 누굴 보고 지금 아주매라 카노!”


“아우야.”


당장이라도 쫓아갈 기세로 흥분한 흰 샌들을 기능성 단화가 넌지시 불렀다.


“와요?”


“조용히 하자.”


“뭐라카노! 성님! 지금 무신, 하, 나 진짜 뭐 이런 갱우가 다 있으요!”


“불편하다잖아. 다세대 주택 민원처럼 생각하고 그냥 넘어가.”


“옴마야, 성님! 지금 그기 됩니까? 쟈가 누군지도 몰르는데, 와 내가 울지도 몬해요? 내 아들 가는 길에!”


“아들 같은 소리 하네. 진짜. 이제 그 꼴 안 봐도 되서 좀 참으려고 했더니, 이 봐, 아줌마. 한참 아래로 들어와선 뭘 자꾸 아들, 아들 해? 여기 웬 아줌마 아들이 있다고 그러냐고. 역할 놀이도 적당히 좀 해야 봐주지. 진짜 왜 저러는 거야?”


“옴마? 옴마? 쟈 말하는 뽄새 보소? 아이 나 진짜 넘어가겠네. 넘어가겠어. 야, 야, 니 진짜로 뭐고? 어? 뭔데 이르케 내 쏙을 확 디집어뿌노! 어?!”


성진은 이제 제상의 신발 칸이 깨끗하게 비워진 것을 보고 잠시 어깨와 허리를 펴 근육을 풀었다. 그러고 나서 어디 빠뜨린 신발이 없나 구석구석 살피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근 몇 년 간 본 기억은 없지만, 아주 익은 신발 하나가 눈에 확 들어왔다. 세상에 이거……! 그는 얼른 주저 앉아 가장 아래 칸, 아무도 모르게 어둠 속에 처박혀 있던 헌 운동화 하나를 꺼내들었다. 드디어! 흰 샌들과 나머지 신발들 모두가, 그간 누구에게도 자신의 모습을 내보이지 않고, 구석에 처박혀 꼭꼭 숨어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다가, 오늘에서야 비로소 온갖 짜증을 내며 존재감을 드러낸, 성질머리가 꽤 고약한 또 다른 신발의 정체를 정확히 알게 되었다.


“나이키네.”


“그러네? 한…… 십 년? 아니, 십 오 년은 더 돼 보이는데요?”


“허! 근데 지금 내인테 아주매라 카고 여태 깝칫나?”


“아우야. 아무리 봐도 우리 보다 한참 위인 거 같은데, 말은 좀 조심하자.”


기능성 단화의 말처럼, 나이키 운동화는 대체 본래 그가 어떤 색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빛바란 상태였다. 그는 닳아 없어지다시피 한 신발굽과 구멍 난 뒷꿈치 안쪽에 튀어 나온 보형물을 모두에게 여실히 보여주며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 저 늙어빠진 거 먼저 버리뿌면 되겠네.”


흰 샌들이 모질게 말을 뱉은 거 치곤, 성진과 운동화가 사이에 분위기는 사뭇 묘했다.


“오랜만에 본 거 치고, 많이 안 늙었네. 주인?”


성진은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운동화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다 잊어 놓고, 이제 와서 그런 얼굴을 하면 내가 뭐, 봐 주기라도 할 줄 알아?”


마치 그 말을 다 전해 들은 것처럼, 성진은 운동화를 현관 앞에다 내려놓고 한쪽 발을 구겨 넣기 시작했다. 모두들 그 모습을 보고는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너, 내가 너 입시 시작하고 끝낼 동안 내내 뒷바라지하고, 행운의 신발까지 돼 준 거 전부 다 기억하고 있지? 수능 끝나고 나서 대학 입학식 하는 날, 나 너랑 그때도 같이 있었다. 네가 서울대 교육대학 차석으로 입학한 거 그거 다 내 덕분이야. 알지?”


그 순간 그의 몸체는 하얗다 못해 환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궁극의 나이키 에어포스 그 자체였다. 다른 신발들은 모두 그의 진정한 포스에 눌려 가히 한마디할 엄두 조차 내지 못했다. 성진은 그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이키 운동화의 풀린 끈을 정성스럽게 다시 매주고 있었다. 그는 곧 신을 벗고, 두 손에 운동화를 올려 한참 더 들여다 봤다.


“와…… 대단한 분이셨네.”


희주의 베이지색 굽 낮은 구두가 한마디했다.


“대단하긴 했지. 나도 그동안 잊고 지냈네. 저 신발, 나랑 비슷한 시기에 이 집에 왔었는데, 성진이 언니 그때 첫 메이커 신발이었거든? 언니 저거 신고 매일 실기 연습하고 그랬었는데……. 진짜 추억이다. 아무튼 우리 중에 어떤 대단한 업적을 기린다고 치면, 그, 죽은……, 아니, 저 파란 상자에 지금 옮겨진, 아버지 출퇴근용 까만 구두랑 저 나이키 운동화. 저 둘은 진짜 크고 대단했다고 말 할 수 있지.”


지금보다 약간 더 젊었던 시절 희주가 큰 맘 먹고 샀던, 아직까지도 털안감이 빽빽하게 붙어 있는 가죽 부츠가 발목 부분을 반쯤 접은 채로 옛적을 회상했다. 그리고 그 순간 성진의 눈높이에도 그가 보였다. 성진은 눈을 가늘게 떴다가 신발장 가까이로 다가가서 강아지 귀처럼 양갈래로 목이 접혀 흐물거리는 부츠의 목을 한쪽으로 가지런히 모아 잘 두었다. 그런 후 그 옆과, 그 옆옆에 있는 신발들을 하나하나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혀를 찼다. 쯧. 이거 뭐야. 밑창이 다 빠졌잖아?


“아씨…… 걸렸다.”


성진이 낡은 기능성 러닝화를 꺼내서 눈높이에 들고 바닥이 얼마나 엉망진창으로 너덜거리는지를 가늠했다. 그러더니 역시 못 신겠네 하고서는 종량제 쓰레기 봉투를 열어 안으로 던져버렸다. 성진은 부엌 쪽을 힐끔 쳐다보고서는 다시 몸을 돌렸다. 그의 눈이 당장에 뭐라도 걸리면 러닝화처럼 만들어버리겠다는 빛을 냈다. 그리고 그 시선은 얼마 안 가 할머니가 신던 신발들에게로 머물렀다.


“옴마야? 쟈 왜 우릴 보노?”


“우리도 유품이긴 하지.”


“아이, 그래도요. 성님, 우리는 아부지가 쓰던 거는 아닝기라…….”


성진이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고개를 돌려 소리쳤다. 엄마아! 할머니 신발도 버릴까? 얼마 후 희주가 고개를 좀 내밀더니, 아니. 그거 내가 신을라고 놔 둔 거야. 한다. 그 몇 초 간, 신발장 네 번째 칸에 주루룩 놓여 있던 이들은 단 한 번도 숨을 제대로 내쉬지 못했다.


“아이참, 죽을 뻔 봤네.”


“근데……, 이렇게 죽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예? 그기는 또 무신 말인데요, 성님.”


“이렇게 죽으면 우리 아들이랑 같이 가는 거잖아.”


“성님…….”


“왜? 넌 싫어?”


“아이요. 아이요. 내 그까진 생각을 몬해서 그랍니다.”


“괜찮지?”


“예. 그람요. 우리 아들이랑 같이 간다카이 오히려 더 좋네.”


“사실 저도요! 전, 홈쇼핑 보고 산 적당히 가성비 좋은 신발이라, 별로 간택 당한 적이 없거든요? 그래서 언제 버려져도 이상할 게 전혀 없었고……. 그런데 이렇게 형님들이랑 같이 갈 수 있다면 왠지 좀 덜 무섭고, 오히려 가는 길이 설레고 기분이 좋을 거 같아요. 꼭 소풍 가는 거 같이!”


“뭐노? 갑자기. 야, 니, 맞나? 그이까네, 니도 우리랑 같이 죽어도 여한 없다 그기제?”


“네. 그동안 두 분이서 돈독하게 지내시는 거 보면서 저도 속으로 계속 부러웠거든요.”


“얘, 왜 이제야 그런 말을 해. 진작 했으면 우리랑 더 잘 지냈을 텐데. 난 네가 그냥 우리한테 관심이 없는 줄로만 알았어.”


“아니, 제가 좀 숫기가 없어요. 방송도 나오고 그랬지만, 타고난 성향이라 어쩔 수 없더라고요? 하하.”


“죽을 때가 돼뿌니, 인제야 읎던 용기도 생기고 그라나부네.”


“그래. 이제라도 이렇게 말해줘서 고맙다. 더 무서울 것 없이 사이 좋게 갈 수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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