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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수인 Sep 15. 2024

언니가 날 어떻게 잊어?

1장 유품 정리(3)






“얼마 만에 보는 건지 모르겠어. 나 안 잊었지? 그렇지? 언니?”


“잊었어야.”


다소 감격스러운 그 광경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는지 빨간 원앙이 비웃었다.


“고럼. 아까 아직도 여깃냐 안 혔냐? 고것이 바로 잊은 것이여. 것도 아주 씨커멓게.”


“아휴, 쟤들 또 저런다. 또 저래. 지들도 같은 장식품인데, 저렇게 심술은…….”


원앙 인형들은 리모컨의 말을 들은 척도 않고 서로 시시덕댔다.      


“장식품? 미안하지만, 난, 쟤들처럼 아무데도 쓸모 없는, 그런데 자리나 차지하고 앉아 있는, 기생 인형 따위가 아니야.”


“잠깐만, 시방 저것이 우덜더러 뭐라냐? 뭐, 기생충?”


“응. 그래, 너 말대로 그거도 괜찮겠다. 암튼 지금 분명히 말해둘게. 난 너희들처럼 여행 간 김에 재미로 사온 저가의 기념품 따위가 아니야. 나는, 우리 아빠가 언니 열 두살 생일에, 깜짝 생일 선물한다고 고심하고, 또 고심해서, 그 당시에는 너무 사치라고 할 만큼 비싼, 그런데도 너무 예쁘고 기능까지 좋아서 귀하디 귀하게 모셔 들어온 특별한 존재야. 이 집으로 이사 올 때도 언니는 제일 먼저 날 뾱뾱이에 싸서 1호 보물이라며 소중히 안고 들어왔고, 아빠가 나 처음 사왔을 때, 한동안 성준이 오빠는 나 한 번만 만져보면 안 되겠냐고, 언니의 온갖 심부름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였어. 근데 그런 내가 왜 너희들 같은 촌스러운 애들이랑 동급으로 후려쳐져야 하니?”


많은 세월 동안, 있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었던 돼지토끼 알람 시계의 자기 소개를 듣고 모두들 어안이 벙벙했다.


“그리고 아무리 내가 예쁘고, 지금 봐도 새 것 같아 보인다 해도, 나 이 집에서 소파 다음으로 가장 오래 산, 너희들의 하늘 같은 선배야. 예의 좀 갖춰서 말해.”


“어, 그래 미, …….”


“연설, 누가 누굴더러 촌시렵다 그러는 것이여?”


리모컨이 시계에게 빠르게 사과하려던 순간, 빨간 원앙이 먼저 말을 가로챘다.


“슨배라는 소리가 고렇게나 듣고자픈가분디, 그런 냥반이, 우덜더러 촌시렵다니 뭐다니, 그른 소리 허면 안 맞는 거 아닌 감? 즈기요. 슨배. 우덜은 전통적인 라인으루다가 부러 이르케 만들어졌다고 치는디, 산 지 이십 육 년이 넘어가는 슨배는 뭐가 으디가 으떠케 트렌디 하셔가지고 그르케 자신감이 넘쳐버리실까요잉? 여그서 똑같이 늙어가는 마당에!”


“으아따, 잘 헌다. 울 마눌! 그리 확 허고 유식허게 잘 쏘아붙잉께, 나가 속이 다 시원해불고만? 서양 말은 또 은제 그르케 잘 배워부러쓰까잉? 대견허고 이뻐죽것어! 자네, 그양, 자네가 좀 참으소. 저것이 괜히 늙어가지고 미스테리 부리는가븐디.”


“미스테리? 허……, 진짜 어이가 없네. 야, 똑바로 알아. 네가 말하는 건 히스테리야. 진짜 답이 없구나? 너네? 리모컨 쟤 말대로 너흰 정말 새대가린 게 분명하다. 언젠 위아래가 있니 없니 TV한테 꼽사리를 있는대로 주더니, 지금 바뀐 행태 좀 봐. 도대체 심보가 왜들 그러니? 못 돼 처먹어선.”


“그려. 그려. 그르케 생각 혀. 근디 말여. 우덜은 있능 말만 하제. 없는 말은 안 혀.”


“무슨 소릴, 나도야. 나도 없는 소리는 못해. 참나. 그동안 못난 것들끼리 잘 붙어 지내는 게 한편으론 이해도 되고 다행이다 싶기도 했는데……. 예쁘길 해. 유용하길 해. 가족들 사랑을 듬뿍 받아 본 시절이 있기를 해? 아무것도 없는 것들이 입만 살아가지고. 근데, 너흰 그냥 답이 없는 거 같아. 상종하기도 싫어진다. 정말.”  


“옘병천병! 누렇게 때가 타서 먼지 범벅인 주제에 아주 지 혼자만 고고헌 공주님 납셨구만! 야이 썩을 것아, 착각도 그 정도면 병이여. 우덜이나 너나 엄마 걸레질 한 번 받은 게 대체 언제적이여? 고냥 다 이 집 붙박이로 아웅다웅 하며 사는 것이제 뭘 자꾸 생긴 게 어떻고 능력이 저떻고 사랑 타령을 해부러싸?!”


“타령을 할 만 하니까 하지! 내가 다른 애들 존심까지 건드리기 싫어서 그동안 내색 않고 조용히 살았는데! 너희가 아무리 날 까내리려고 해도 난 이 집안 사람들에게서 특별한 존재야! 난 매달 전기세며 통신비며 큰 비용 낼 필요 없이 건전지 하나로만 움직여. 그것도 몇 달씩이나! 어디 그것 뿐이니? 이십 육 년 간 부품 하나 빠지거나 망가져 본 일도 없고, 볼 때마다 못생기게 사진 찍혀 걸려 있는 게 마음에 안 든다고 언니가 불평 불만하는 걸 들어 본 적도 없어!”


알람 시계는 직접적으로 누구라 콕 집어 말하진 않았지만, 듣는 이들은 찰떡 같이 다 알아들었다. 리모컨과 가족사진 액자 등등. 알람 시계가 어떤 포인트에서 자신들의 흠을 잡고 있는 건지를 가늠하고 나서는 모두가 순식간에 마음이 굳었다.


“저기, 그, 그래도 다들 여기에 있는 나름의 이유가 있지 않나요?”


그때, 도깨비 뿔처럼 뾰족하게 솟은 진초록색 스투키가 세 개의 몸통을 통해 곳곳에 위치한 거실 물건들을 살피며 말했다.


“제가 보기에는 어……, 아니, 저만 하더라도 어머님께서 며느리가 준 첫 선물이라고 주에 한 번 정도는 꼭 들여다 봐 주시거든요. 뭐 물론 그게 시계님이 받은 사랑 만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죽지 않고 잘 살아있어 기특하다며 웃어주시기도 하시고, 귀엽다고 칭찬해주실 때도 있거든요? 근데 전…… 사실 손도 좀 가는 편이고, 따지고 보면 뭐 관상용 이상으로 그렇게 쓸모 있는 존재는 아니잖아요? 그런대도 이렇게 이 자리에 남아 살고 있는데, 그러니까, 사실 여기 있는 모두가 조금씩 부족한 면이 있는 건 알겠지만, 어…… 뭐, 각자 각자가 매력도 있고…… 때에 따라서는 뭐 더 특별한 순간도 있고…… 그런……. 하…….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저도 모르겠네요. 죄송해요.”


스투키가 자신 없이 말을 마쳤다.


“아냐. 화분아, 너 말 참 잘했어.”


그동안 잠잠하게 있던 낡은 가죽 소파가 성진을 안은 채로 느릿하게 말했다.


“엄마는 지난 49일 간 거실에서 지내셨어. 같이 주무시던 아버지가 하루 아침에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이후로 매일 같이 말이야. 아마도 그때 받은 충격이 너무 커서 혼자 있기 무서우셨을 거야. ”


“맞아. 엄마가 날 보다가 엉엉 우시면, 어쩐지 그게 다행이다 싶을 정도로 걱정 되던 날들이었지.”


소파와 함께 밤새도록 희주를 지킨 TV가 얼른 덧붙여 말했다.


“그런 것처럼, 우리 각자가 그때 그때의 쓰임이 있고, 그 순간 만큼은 아주 특별해지기도 해. 시계 네가 가족들에게서 특별한 사랑을 받았단 사실은 나도 알고 인정하는 바야. 그때 난 참 네가 부러웠거든. 그렇지만, 그런 영광의 순간들을 가지고 다른 물건들을 무시하는 언사가 참 불편해. 너도 알잖아. 최고의 순간은 언젠가 지나가기 마련이야. 여기에서 그 시절을 가지지 못한 이들은 아무도 없어. 가족들 중 누군가의 선택을 받던 순간에, 이씨 집안에 처음 들어오던 순간에, 다들 얼마나 반짝였니? 아주 잠깐이라도, 빛나는 순간이 있었다고.”


“미안하지만 난 그 영광의 순간을 단 한 번도 놓친 적이 없어.”


소파의 타이름을 가만히 듣고 있던 알람 시계가 꾹꾹 눌러 대꾸했다.


“차라리 고장나 죽어버렸면 모를까. 이렇게 움직이는 동안엔 난 절대 잊혀질 리가 없어.”


“하이고, 저 아집 보게요. 암만 혀두 저가 여그서 제일 잘나부럿어. 아주.”


“아이, 됐어. 다들 이제 그만들 해. 누나도 엄마한테 이제 뭐 할 건지 묻는 거 보니까, 유품 정리가 곧 시작될 모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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