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대청소(1)
성진은 이제서야 희주가 부엌에서 달그락대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고개를 쭉 내밀고서 희주가 무얼하는지 살피다가 싱크대 아래 찬장 안에서 스텐리스 들통을 꺼내는 모습을 보았다. 성진은 리모컨을 들어 TV 전원을 껐다. 거실이 고요를 되찾으니 부엌에서 나는 소리가 더욱 선명해졌다. 스텐리스 들통을 물에 헹구는 소리, 희주가 슬리퍼를 끌고 걷는 소리, 냉장고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그 뒤로 나는 냉장고의 웅웅거리는 소리, 희주가 무언가의 랩 비닐을 찌익 하고 벗기는 소리. 성진은 몸을 일으켜서 희주에게 다가갔다. 엄마, 뭐해? 희주는 밥 하지. 하고 간단하게 답했다. 성진은 고개를 돌려 거실에 있는 알람 시계의 시침을 확인했다. 아직 우리 점심 공양 받은지 2시간 좀 덜 지났는데, 벌써 밥을 한다고? 희주는 성진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그저 소양지 한 근을 물에 담궈서 핏물을 빼내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옆에 있던 생미역을 뜰채로 건져 올려 싱크대 한쪽에 올려두었다. 성진은 스텐리스 들통을 슬쩍 흘겨 보고서 족히 14리터는 된다고 생각했다. 제법 어마어마한 양의 미역국이 나올 것이다. 이거 다 어쩌게? 너무 많은 거 아니야? 염려 섞인 그의 말에 희주는 미간을 찌푸렸다. 잔말하지 말고 준이한테 전화해서 새아기랑 언제 올 건지 물어나 봐. 성진은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 역시도 성준에게 전화 할 타이밍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순순히 부엌을 나왔다. 소파에 다시 앉아 폰 화면을 켜고, ‘못난이’라 찍힌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누른 그는 한참이 지나 ‘연결이 되지 않아 소리샘으로 연결되오니…….’가 나오자, 인상을 구겼다. 다시 부엌으로 가 성준이 전화를 받지 않는다며 퉁명스럽게 말하는 그에게 희주는 별 것 아닌 양 운전 중인가 보다 하고 말았다. 이제 막 양파를 까기 시작한 희주를 보고 있자 성진은 괜히 뿔이 나기 시작했다. 뭐가 이쁘다고 이런 걸 해주냐? 희주는 고개를 돌려 성진을 가만히 쳐다봤다. 일자로 앙다문 그의 입매는 여기서 더 참견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무언의 경고가 걸려 있었다. 그렇지만 성진은 바로 꼬리를 내리지 않고 걔들을 왜 챙겨? 국이며 반찬이며 바리바리해서 챙겨 봐야 지들 좋을 때만 오는 애들을? 올케는 오늘 종재도 빠지고, 성준이 걔는 아부지 유품 정리해야 하는데 아직 오지도 않고 있고! 엄마는……, 성진은 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희주가 정말로 머리 끝까지 화가 났다는 표정으로 그의 앞에서 소리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으이구, 이 철딱서니야. 즈이 엄마 속을 저렇게 몰라서 어쩌냐 쟤는.”
희주가 시집 올 때 받은 원목 도마가 한숨을 쉬더니 그랬다.
“냅둬요. 성격이야. 딴에는 저것도 걱정이라고 하는 건데, 진짜 엄마 속은 헤아릴 수가 없는 거지. 성진이 언닌 좀 단순하잖아요. 오히려 이런 파트는 오빠랑 그 새로 온 며느리 언니가 잘해. 이따 오면 한 번 봐 봐요. 아마 엄마 음식 맛있다고 온갖 아양을 다 떨면서 집에 갈 때 음식한 거 양껏 다 싸들고 가서 엄마 기분 완전 다 풀어줄 걸?”
“그러니까. 저거는 딸인데 왜 살갑지를 못하냐는 거지 나는.”
“딸이라고 살가울 거 뭐 있나요? 그 대신에 대학도 서울대로 가고, 엄마 꿈 하나 이뤄 주긴 했잖아요.”
양파 껍질을 까기 위해 잠깐 나와 있던 작은 과도가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래. 그렇게 보면 다 장단이 있다. 근데 너무 늦긴 하네. 성준이 내외가.”
마침 희주가 그럼 애 밴 애가 몸이 안 좋은 걸 어떡하니? 이제 막달도 얼마 남지 않은 애를 두고 당연히 몸조리 잘하라 그래야지. 괜히 불러서 그래도 와서 앉아있어라 어쩌라 서럽게 대해야겠니?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또 산 사람처럼 살아야지. 뭘 그렇게 도리까지 들먹여가며 걜 못 된 애로 만들 구실을 찾니? 나도 어디 가서 서운하다 어쩐다 소리 안하는 걸 네가 뭔데 나서서 그러냔 말이야! 하고 쏟아붓고 있었다.
“쟤가 선생질을 오래 하더니 예의, 법도, 규칙, 규율에 절여졌나? 왜 저러냐?”
“그러게요. 언니가 이번엔 좀 너무 가긴 했네요. 근데 뭐 저것도 딴에는 엄마 편 든다고 그런 걸 거예요. 하휴…… 그나저나 요즘 참 뒤숭숭하다 그죠?”
“내 말이. 뭐가 이렇게 폭풍처럼 왔다 갔다 하는지 모르겠다. 참 정신 산란하게.”
희주와 거의 동시에 같은 말을 내뱉은 도마는 빨리 가서 네 할 일이나 하고 집에 얼른 가버리라며 등을 떠미는 희주를 보며 또 한숨을 쉬었다. 거기에 가스레인지 옆 싱크대 판 위에 일단 올려 둔 스텐리스 들통이 낮게 울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리 어머이 지금 저럴 기운도 없을 건데…….”
그러게나 말이야. 주방에 있는 모두가 그런 류의 말을 던지며 성진을 질책하던 바로 그 순간, 쫓겨나던 성진이 그들의 타박을 직접 듣기라도 한 것 마냥 고개를 홱 돌렸다. 몇몇 주방 용품들은 그 순간 힉! 하고 새된 소리를 냈다. 성진은 할 말은 많지만 일단 참는다는 얼굴을 하고서 다시 고개를 돌렸다. 희주는 한숨을 크게 내쉬고 다시 양파를 들어 껍질을 까기 시작했다.
현관 앞에 도착한 성진은 그 앞에 놓인 새파란 판때기를 거칠게 들어 올려 붙잡고 형태를 잡아 눌러 접기 시작했다. 함께 들고 들어온 새까만 비닐봉지 안에서 포장용 박스 테이프와 두꺼운 커터칼을 꺼낸 그는 새로 사온 그것들을 감싸고 있는 투명한 비닐 껍데기 또한 있는 힘껏 뜯어 옆으로 내던져버렸다. 그러자 성미가 좀 가셨는지, 박스 바닥이 될 양 날개 부분은 또 신중하게 모아 흐트러지지 않게 맞춘 다음, 새로 산 테이프를 시원하게 뜯어 날개 중앙선에 갖다댔다. 거실에서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다른 물건들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될 유품 정리에 앞서, 가장 먼저 정리될 물건이 무엇일지 점을 치기 시작했다.
“신발장 앞이니까, 아마도 아버지 신발부터 정리 되겠지. 뭐.”
눈치 빠른 리모컨의 짐작에 다들 그렇겠다며 맞장구를 쳤다.
“쟤들은 지금 이게 재밌나 보네?”
“싸가지 읎는 것들. 다 모아다가 조사뿌러야 한데니께요!”
컴컴한 신발장 안에서 거실 물건들에게 들릴락 말락 한 말들이 흘러나왔다.
“아들아. 너 괜찮냐?”
이 글의 시작이 궁금하다면,
https://brunch.co.kr/@hansuin/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