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초연작의 한계, 그리고 명작의 현대적 재해석 실패
(※글의 특성상 연극 <유리동물원>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나는 공연을 보기 전에 시놉시스나 인물 소개 등을 보고 가는 편이다. 이번에 본 <유리동물원>은 시놉시스와 인물 소개에서 크게 매력을 느끼고 선택한 공연이었다. 예매 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는 시놉시스와 인물 소개 중 '로라'의 소개는 다음과 같다.
시놉시스와 로라의 소개를 요약하자면, 로라는 집 안에만 머물렀지만 강인한 내면을 가지고 있고, 그러다 집을 찾아온 손님 '짐'으로 인해 변화하는 인물이다. 아, 로라가 나의 관심을 끌지 않을 수 없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이 연극의 시대적 배경이 경제대공황을 겪고 있던 미국이라고 했을 때 여성 혐오도 만연했을 것이므로, 로라의 변화가 현재의 여성들에게도 정말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공연의 묘미(?) 중 하나는 우리가 예상한 대로 흘러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너무 많은 걸 기대했다.
강인한 로라?
관객이 단번에 납득하지 못한다면 그건 실패다
로라는 수줍음이 상당히 많고 내성적인 성격의 인물이다. MBTI로 따지자면 파워 I 성향. 타자 수업을 배우러 갔다가 너무 긴장된 나머지 토하고 집에 돌아온 이후 부끄러워서 그 뒤로 다시는 학교에 가지 않는 인물이다.
로라는 한쪽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이다. 이는 수줍음이 많고 생각이 많은 성향이 더 깊어지는 데 영향을 준다. 로라는 학교를 다닐 때 계단을 오르며 들렸던 보조기 소리를 몇 년이 지난 지금에서도 기억한다.
그래서 공연을 보는 내내 그런 생각이 들었다. 로라, 강인한 내면을 가진 거 맞아? 필자는 인물 소개를 읽고 갔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그렇게 느낄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었다. 그리고 필자마저도 대체 어디서 강인한 내면을 가진 모습이 나온다는 거지? 하면서 의아해했다. 인물 소개를 보고 나서야 인물의 성격이 그랬다고 이해할 수 있다면 그건 실패한 것이다.
강인하지 않은 여성에게 강인하다는 수식어를 억지로 붙여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건 아마도 이 연극의 치명적인 결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바로, 로라를 변화시키는 인물인 '짐'이 그 결함이다. 짐은 로라와 동창이면서 로라의 첫사랑이다. 짐은 '상당히' 자신만만하고 당당한 인물이다. 너무 자신만만하고 당당해서 다소 재수 없을 지경이다.
(시간이 조금 지난 지라 정확한 대사가 기억나지는 않지만...) 니 제일 큰 문제는 열등감이라며 되게 가볍게 얘기하질 않나, 지가 뭘 안다고.... 아, 아무튼. 그래도 지금까지 내성적인 성격과 장애로 인해 생긴 불편함으로 혼자만의 세상에 스스로를 가둬왔던 로라는 짐의 이야기를 통해 깨달음을 얻는다. (솔직히 이 부분도 그렇게 맘에 들지는 않았다. 남성 캐릭터로 인해서 깨달음을 얻는 여성 캐릭터. 너무 전형적이라서. 그런데 뭐, 그래도 일단 긍정적인 변화를 주면 좋으니까. 그런데...!)
로라가 짐을 통해서 잠깐동안 누린 자유는 로라를, 그리고 관객들마저 행복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한다. 짐과 로라가 키스를 한 이후에 갑자기 짐이 로라에게 약혼한 여자 친구가 있고, 곧 결혼할 예정이라고 고백한다. (심한 말) 아무리 좋은 말을 해주면서 로라를 둘러싼 굴레들을 로라 자신이 뛰어넘을 수 있게 했다 하더라도, 결국 상대방이 겪어온 삶의 굴곡에 대한 배려 없이 지가 하고 싶은 말 지껄이다가 분위기 타고 "춤이나 추실까요"하더니 키스하고 "아앗 미안; 나 여자 친구 있어"하는 애였다. (쓰다 보니 짐 정말 최악이다.)
결국 짐은 마지막 고백을 통해서, 자신이 로라에게 권위적인 태도로 일관해왔다는 걸 드러낸다. 진심으로 로라를 대했던 것이 아니라. 짐은 로라가 자신의 보조기 소리에 대해 말할 때와 같이 로라가 살아온 시간 동안 쌓여온 깊은 감정에 대해서 가볍게 말한다. 이를 합리화시켜줄 수 있었던 로라를 향한 호감마저도, 결국 그에겐 한 때의 불장난처럼 치부해도 될 만큼의 일이었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짐과 함께 춤을 추다 뿔이 깨져버린 유니콘 모양의 유리 공예품을 짐에게 주고, 두 사람이 잘 되길 바랐던 아만다를 위로해주고, (상징적으로) 로라가 전등을 끄지 않고 켜는 모습을 보여주면서(원작에서는 전등을 끄는 것으로 끝난다고 한다.) 로라가 강인하다는 걸 관객들이 느낄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강인함을 보여주는 방식은 다양하겠지만, 자신에게 찾아온 불행에 '의연하게' 대처하는 여성의 모습은 지금까지 너무 많이 봤다. 그리고 그게 과연 여성의 '강인함'을 보여주는 건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냥 사회가 그렇게 참는 게 강한 거라고 만든 게 아닐까, 싶다. 차라리 짐에게 네가 무례했다고 화를 내고, 유니콘 모양의 유리 공예품을 새로 사고, 전등이 아니라 환한 무대에서 끝을 내는 게 로라가 강인하다는 걸 보여주는 게 아니었을까.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렇게 애매하게 주체적인 모습을 보여주면서 사람을 낚는 게 더 나쁘다고 생각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내가 시놉사기, 인물소개 사기에 당했기 때문이다. 시놉시스만 보면 짐이 로라를 일으켜 세우고, 가족 사이의 틈이 생기면서 로라가 자신을 구속하는 아만다에게서 벗어나지 않을까? 하는 예측을 하게 한다. 물론, 이 예측은 깨진다. 로라가 강인한 내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공연을 보다보면 믿기 어렵다. 그래서 솔직히, 공연이 끝나고 제일 먼저 생각한 건 '낚였다'는 거였다. 그리고 어떤 측면에서, 이 말 정말 별로지만, '여캐코인'을 타려고 했던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이 극이 로라를 중심으로 흘러가는 극인데 거기다가 주체성이나 성장서사만 더해주면, 많은 관객들이 원하는 공연 아닌가. 내 의심이, 내 기우가 사실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차라리 솔직했더라면,
차라리 다르게 해석했더라면
<유리동물원>의 창작진은 차라리 솔직했어야 한다. 이 연극의 텍스트 자체로는 로라가 강인해 보일 수도, 강인해질 수도 없다. <유리동물원>은 이 연극의 시대적 배경인 1930년대에서 방황하는 청춘을 다루는데, 공연을 보다 보면 매우 놀랍게도 지금의 한국과 너무나 흡사하다. 가부장적 질서를 그대로 답습해 아들과 딸에게 강요하고 있는 엄마, 꿈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아들, '일을 못 할 거면 결혼이나 해라'라고 결혼을 강요받고 있는 딸까지. 그냥 이들의 모습을 그리는 것만으로도,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며 역사는 반복되는구나'와 같은 교훈을 남겼을지 모른다.
개인적으로 추측을 한다면... <유리동물원>을 이대로 가져오기에는 로라 캐릭터가 마음에 아주 많이 걸리지 않았을까. 짐을 만나기 전까지는 아만다에게 끌려다니다가, 짐을 만난 이후로는 짐에게 끌려다니니까. 그렇다면, 내가 늘 이야기하지만, 화끈하게 인물의 설정이나 성격을 바꿔오는 것도 방법이다. 라이선스라서 못 그랬다면.... 아예 가져오지를 말든가. 혹은 <유리동물원>은 그대로 가져오더라도 충분히 전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으니, 차라리 솔직한 게 나았다.
변화를 시도한 건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나, 변화는 자연스러워야 한다. 관객이 납득하지 못하면 그건 실패일 뿐이다. 굳이 변화를 주지 않아도, (물론 화는 아주 많이 나겠지만) <유리동물원>이 가진 '청춘'의 이야기에 방점을 아주 크게 뒀다면. 아니면 아예 2021년에 맞춰서 완전히 재해석을 했다면. 1944년에 초연을 한 <유리동물원>은 2021년의 한국에서도 큰 울림을 남겼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