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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사이에 마이라에게 무슨 일이, 데스트랩 리뷰 2

소품처럼 끌려다니던 여성 캐릭터의 주체적, 의지적 변화

by 한성

(※스포일러 주의!※)


재밌다고, 재밌다고 칭찬에 칭찬을 거듭한 데스트랩의 아주 큰(....) 단점이 있다면 그건 역시나(....) 여성 인물 서사다.

앞에서 스포일러를 얘기했지만,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시드니와 클리포드는 내연관계다.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겠지만 돈을 위해서 그랬든 글을 위해서 그랬든 시드니와 클리포드가 손을 잡았고, 마이라를 죽이기 위한 연극을 꾸민다. 평소 심장이 약했던 마이라는 큰 고통을 느끼며 죽는다. 즉, 마이라는 시드니와 클리포드의 욕망에 희생되는 인물이다.

연극 <데스트랩> 마이라 브륄역 이지현 배우 프로필 사진 (출처 : 주식회사 랑 공식 트위터 계정)

남성의 '비이성적' 욕망에 의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던 선한 여성이 죽었을 때의 분노


이가 관객들에게 절대 유쾌하게 느껴질 리 없다. 특히 마이라는 극 집필이 잘 안 풀리던 시드니가 클리포드의 연극 대본을 탐내면서 클리포드를 죽이겠다는 의사를 드러내는(물론 진심이 아니었지만) 시드니를 계속 만류하고, 시드니가 클리포드를 죽인 뒤에(물론 죽인 게 아니었지만) 시드니에게 이 집에서 나가라고 선언한다거나, 죽기 직전에 고해성사를 하듯 클리포드의 대본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잠시나마 생각한 것에 대해 몹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마이라가 죽는다(!) 그러니 처음부터 끝까지 클리포드와 시드니의 작전이었음이 밝혀졌을 때, 관객들은 분노할 수밖에 없다. 돈에 눈이 멀어서, 아내가 싫어져서, 멋진 희곡을 저명한 작가와 함께 쓰고 싶어서 등등의 이유로 저 세 사람 중 그나마 양심이라는 게 있어 보였던 인물이 죽었으니.

게다가 이전 시즌에서는 이런 마이라가 굉장히 무력하게 그려졌다.(물론 이것도 사람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 작년의 <데스트랩>을 보면서 필자는 이렇게 느꼈다.) 그냥 시드니가 하는 말에 계속 화들짝 화들짝 놀라다가 시드니가 사고 치니까 ㅇㅁㅇ하다가 이렇게 된 거 시체 좀 나랑 같이 좀 옮겨달라니까 옮겨주질 않나(?) 그러다가 클리포드가 살아 돌아오니 너무 놀라서 심장마비로 죽는다. (....) 필자가 모르고 보는 재미를 생생하게 느꼈음에도 지난 시즌에 데스트랩이 별로라고 느낀 이유다. 분노가 몇 배는 더해졌달까.

물론 마이라가 무대의 중앙으로 나서는 순간이 있다. 클리포드에게 시드니를 작품의 공동작가로 넣어달라고 말할 때. 근데 그건 시드니가 마이라의 돈을 다 써버려서 궁핍해져 버렸으니 마이라 입장에선 당연히, 해볼 말이라고 생각한다. 리고 이것마저 시드니와 클리포드의 작전에 포함되어있다고 나는 생각하기 때문에, 이 행동에 마이라의 의지가 크게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 전후에 너무 놀라고 너무 끌려다니고, 결국 죽음까지 맞으니까.

연극 <데스트랩> 마이라 브륄역 조한나 배우 프로필 사진 (출처 : 주식회사 랑 공식 트위터 계정)

시드니와 클리포드의 살인에서 드러나는

마이라의 "의지"


그러나, 이번 시즌에는 마이라 의지가 훨씬 더 도드라지게 보이는 순간들이 추가되어 있었다. 심지어 "주체적으로"! 그런 순간들이 더해지니, 마이라가 그저 시드니에게 끌려다니는 삶을 산 건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았다. 보다가 어떤 생각도 했냐면, 작품 하나만 달랑 성공하고 족족 망한 작가인 시드니와 함께 살면서도 마이라는 행복했겠구나. 왜냐, 자기가 선택한 거니까.

게다가 마이라의 의지를 보여주는 순간들은 극에서 굉장히(!) 중요한 때에 들어가 있어 더 의미가 있었다. 예를 들어, 마이라는 시드니가 클리포드를 목 졸라 죽이려 할 때 시드니를 밀어 그를 말린다. 나중에 클리포드가 살아 돌아와 시드니를 죽이려 할 때도 그저 보고만 있는 게 아니라 주변에 있는 것들을 집어던진다. 1막의 터닝포인트가 되는 두 번의 살인에 마이라가 개입하는 건, 마이라가 주변부를 떠도는 인물이 아니라 이 작품의 핵심 인물이라는 느낌을 었다.

연극 <데스트랩> 무대 사진 (출처 : 주식회사 랑 공식 트위터 계정)

죽은 뒤 소품처럼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등장인물'로 남아있는 마이라


게다가 '칭찬'하고 싶은 건, 연출인지 배우들인지 어느 쪽이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마이라가 죽어서도 존재감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작년에는 심장마비로 죽은 뒤 소파에 가만히 앉아있다가 암전 되고 퇴장했다. 하지만 올해는 마이라가 소파 옆에 기대앉아있다가 클리포드가 바닥을 두 발로 구르는 순간 마이라의 몸이 옆으로 쿵! 하고 떨어진다. 그건 여기, 아직 마이라가 있다고 알려주는 동시에 시드니와 클리포드가 마이라에게 저지른 짓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했다.


서사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한 시도,

이것만으로도 여러 가지가 읽힌다


연극 <데스트랩> 컨셉 사진 (출처 : 주식회사 랑 공식 트위터 계정)

그래서 이번 2021 <데스트랩>을 보면서는 훨씬 분노가 덜했다. 물론 1막을 보면서 빡치는 마음을 숨길 수는 없었다. (새삼 다 알고 보니까 시드니 진짜 너무하더라. 그리고 클리포드도 순진한 척 대박ㅇㅁㅇ) 하지만, 이라의 여러 변화를 보고 나니 연출이 마이라라는 인물을 굉장히 신경 썼구나라는 게 느껴져서 좋았다. <유리동물원>을 리뷰할 때도 얘기했지만, 나온 지 오래된 작품(<데스트랩>은 1978년 만들어진 작품이다.)의 서사적 한계가 있다. 그 당시 여성의 지위가 낮았으니 여성 인물의 활용도도 떨어지고 서사도 별로인 경우가 많을 수밖에. 그러나 2021년의 우리가 이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는 우리에게 달려있다. 2021 <데스트랩>은 보다 적극적으로 여성에게 의지와 주체성을 더하려 한 게 보여서 좋았다.(물론 여전히 서사적 한계는 있었지만. 이건 공연 내용이 애초에 그런 거라서 정말, 어쩔 수 없다.)

내용도 다르게 보였다. 2막에서 시드니와 클리포드가 서로를 의심하고 공격하면서 처절하게 망해가는 과정이 '권선징악'의 의미로도 읽혔다. 작년에는 그냥, 두 사람이 알고 보니 서로 바라는 게 달랐다는 걸 나중에 깨닫고 갈등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올해는 사람을, 특히 마이라를 죽이고 얻은 것들이 절대 평화롭게 유지될 수 없다는 걸 보여주는 것으로 다가왔다.


올해의 <데스트랩>을 칭찬해주고 싶은 이유다. 글에서 밝힌 서사적 한계나 글 분량상 다루지 못한 게이를 다루는 부분과 같은 데서 아쉬운 부분도 존재하지만, 점차 변화해나가는 과정에 이 공연이 있다고 생각한다. <데스트랩>은 원작 텍스트가 가지는 재미를 놓치지 않는 한편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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