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김일성의 위조된 역사에 대해 많이 공부한다.
그중에는 1938년 12월부터 1939년 3월까지 100여 일간 김일성이 이끄는 항일 빨치산이 중국 지린성(吉林省) 몽현현(지금의 정우현) 남패자에서 압록강 연안 국경지대인 장백현 북대정자까지 ‘끊임없이 계속되는 가열한 전투와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모진 추위, 가슴을 넘는 눈길과 식량난’ 속에서 일본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감행한 행군 얘기가 나온다.
이것을 ‘고난의 행군’이라 하여 ‘자력갱생, 간고분투의 정신, 어떠한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패배주의와 동요를 모르는 낙관주의 정신, 불굴의 혁명정신’의 상징으로 가르친다.
도시에서 추방되어 시골 삼거리 마을에 도착해 주섬주섬 짐을 부리고 나서 집 상태를 살펴보니 문짝도 달아야 하고 부엌도 고쳐야 불을 땔 수 있는 지경이라 동네에 가서 손수레를 빌려 진흙을 파다 부엌을 수리했다.
마을 이장 격인 반장이 찾아오더니 둘러보고는 자기 집에서 헌 문짝을 갖다주었다. 그것을 톱으로 잘라 대충 맞춰놓고 흙으로 만든 부뚜막에 가마솥을 걸어놓고 불을 지피니 곰 굴이 따로 없다. 구멍이라는 구멍에서 온통 자욱한 연기가 쏟아져 나왔다.
어린 아들은 아내의 잔 등에 업혀 하루 종일 울어댄다.
시골의 사정은 도시의 배급을 받는 사람들보다 더 참혹하다. 국가에서 받는 식량을 도시에서는 ‘배급’이라고 하지만 농촌에는 ‘분배’라고 한다.
김일정 시절 분배를 잘해줄 때는 한 해에 한 사람당 250kg 정도는 주었다. 가족이 여덟 명이면 2톤 정도를 분배받을 수 있었으니 그런대로 살 수 있었다. 그때는 농촌에서 ‘풍년 분배’라는 노래까지 만들어 부르며 김일성을 찬양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추석이 되어도 여물지 않은 벼를 한 사람당 3kg, 네 식구면 12kg 정도 받는다. 그걸 가마솥에 말려 조상 제삿밥 한 그릇 놓고 네 가족이 쌀밥 한 번 겨우 해 먹을 수 있다.
1년에 받는 총 분배량을 계산해 봐도 옥수수, 벼 합쳐 150kg 정도인데, 애국미·군대 지원 명목으로 30%를 떼고 나면 실질적으로는 80kg 정도이다.
여기에 별도로 인민군대 고기 지원으로 돼지고기 15kg를 내야 한다. 고기 1kg은 식량 3kg로 치기 때문에 분배받은 양곡에서 추가로 45kg이 더 떼인다고 봐야 한다.
돼지를 길러 바치면 그나마 다행인데 새끼 돼지 가격이 식량 10kg 값이다. 잘 키우면 좋겠지만 사람도 죽어 나가는 판국이니 돼지 역시 영양실조라 무게를 늘리기 쉽지 않다.
또 좀 키워놓아도 도둑이 문제다. 군인들도 먹지 못해 영양실조에 걸려 있는데 집에서 기르는 돼지가 무사할 수 없다.
감자, 옥수수, 벼, 먹을 수 있는 것은 다 군인들의 약탈 대상이 된다.
가을이면 멧돼지까지 양곡 약탈에 나선다. 그 멧돼지를 잡아야 하는데 ‘김정일의 안녕’이라는 명목으로 총은 일체 사용 불가이니 가을에 곡식이 익을 즈음이면 밤마다 모든 사람이 솥뚜껑, 냄비를 들고 나와 두드리고 소리를 지르는 그야말로 희귀한 현상이 연속으로 벌어진다.
멧돼지 피해를 보면 온 가족이 굶어 죽으니 어쩔 수 없이 이렇게라도 경비를 서야 한다.
내가 살던 북한 사회는 철저한 계급사회이다. 노동당 마크를 보면 망치, 낫, 붓이 그려져 있는데, 각각 노동자, 농민, 지식인을 상징한다. 지식인은 다시 당 간부와 군인계급으로 나뉜다.
간부·군인 계급은 대를 이어 간부와 군인을 할 수 있고 중간 계급이 노동자이며 제일 낮은 계급은 농민이라 할 수 있다. 인도에 카스트라는 신분제도가 존재한다는 소리는 듣긴 했어도 북한의 농민계급만큼 비참할까 싶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농민계급이면 아들에 손자까지도 그 계급에서 벗어날 수 없다. 농민계급의 자식은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농업대학을 갈 수 있을 뿐이다.
1996년에서 1997년 사이에 <김일성의 유훈을 관철한다>는 명목으로 김정일은 410호 방침을 내렸다. 4월 10일에 말을 했다고 하여 410호라고 부르는데, 내용인즉슨 자신의 본래 계급에서 벗어나 도시로 시집간 여자 등 농촌에서 빠져 신분 세탁한 사람을 다 잡아 농촌으로 추방하라는 것이다.
이로써 도시로 시집가거나 군 복무 10년을 마치고 농민계급에서 도시로 이주한 사람들이 모두 다 농촌으로 추방되었다. 시집간 여자들은 대부분 이혼당했고 자식들과 이별하였다. 남편까지 농민계급이 되기 싫기 때문이었다.
온 나라가 뒤숭숭해지고 자살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농민계급을 흔히 ‘농포’라고 불렀다. 어딜 가나 농민계급은 천대와 멸시를 받았고 자식들 역시 ‘농포 자식’이라고 하였다.
추방으로 인해 나도 하루아침 사이 노동자에서 농포가 되었고 내 아들도 농포 자식이 되었다.
‘동의사(東醫司)에서 농포로’의 계급 혁명이다.
일 년 내내 전투다.
모내기 전투, 김매기 전투, 풀베기 전투, 가을걷이 전투, 퇴비 전투 등등. 하도 전투가 많아 셀 수 없다.
길가에는 시체가 널려 있어도 나라에서는 강성대국을 건설한다고 길거리마다 방송 선전이다.
김정일이 ‘줴기밥에’, ‘쪽잠’, ‘한 공기 죽’으로 생활하며 인민과 고난을 함께 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노래로 만들어 길거리 방송으로 외치며 다닌다.
봄철이 되면 키가 1m 안 되는 아이들부터 밥술을 뜨는 모든 사람이 모내기 전투에 내몰린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모를 심어야 하고, 길 가는 사람들도 잡혀 논밭에 들어가야 한다.
보안원(경찰)들은 군에서 제대한 주먹이 센 청년들을 모집해 ‘규찰대’라는 이름을 붙인 후 보안원의 권한을 주어 길 가는 사람을 마구 잡아들여 짐 검사를 핑계로 약탈하게 했다.
가을걷이가 시작되면 옥수수를 지키겠다고 군인들이 총을 메고 밭을 지킨다.
도둑질하는 게 군인인데 결국 도둑에게 짐을 맡긴 셈이다. 곡식이 익기 시작하면 봄부터 땀 흘린 농민은 일체 관여할 수 없다.
배가 고파 생옥수수를 따 먹다 총에 맞은 사람이 비일비재하고 옥수수 몇 개 훔치다 들켜 단련대로 끌려갔다 주검으로 돌아온 사람이 무수하다.
전투는 계속되고 사람이 죽어 나가니 나라에서는 ‘죽더라도 장군님을 위하여 현장에서 순직하라’는 선전물이 나붙고 같은 내용으로 강연회 연설들이 이어진다.
죽을 지경이라도 일을 하다 죽으라는 것이다.
북한에서는 아이들로부터 어른, 노인 할 것 없이 모두 착취 대상이다.
예를 들어 아이들은 ‘꼬마 과제’가 있다. 꼬마 과제의 종류로는 토끼 가죽, 구리, 파지, 도토리, 장갑, 조끼 등등이 있다. 모든 게 강압적이어서 과제를 낼 수 없다면 돈이라도 내야 한다.
당, 청년동맹, 농근맹, 소년동맹, 인민반 등 크고 작은 조직에서 매일 같이 ‘바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인민군대, 돌격대를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개가죽, 고기, 김치, 장갑, 구리, 된장, 산나물, 콩, 닭알 등을 내라 한다.
하루라도 빠짐없이 과제와 지원물자를 바치라는 소리 때문에 너나 할 것 없이 죽을 지경이다.
가을에는 전 국민에게 ‘도토리 과제’가 떨어진다. 아이들까지 포함해서 도토리가 열리든 안 열리든 할당량을 바치지 않으면 나중에 식량과 돈으로 내야 한다.
송이철에는 ‘송이버섯 과제’가 내려온다. 장군님에게 바쳐야 한다는 과제들은 결국 식량과 돈을 내라는 것이다.
의사들에게는 ‘약초과제’가 있다. 대개 5월에서 6월, 9월에서 10월이다. 한 사람당 제출해야 하는 약초의 가짓수가 정해져 있다.
그 시기는 의사들도 병원 문을 닫고 시간을 내서라도 과제 수행을 해야 한다.
당과 나라에서는 말도 안 되는 불법을 하면서도 국민은 옥수수 한 개 때문에 불법을 한다며 감옥에 끌려가 죽을 수밖에 없는 세상이 아직도 존재한다.
온 나라가 감옥이다.
벼룩의 간을 빼먹는다, 벼룩의 잔 등을 기름내 먹는다는 세상이 바로 북쪽 나의 고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