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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탈북 05화

# 5 간리역

by 한성태

간리역은 평양시 형제산 구역에 속해 있다. 간리역은 평양, 남포, 청진, 신의주로 가는 기차역의 요충지이다.

역에 들어가기 전부터 대대적인 검문이 시작된다. 평성에서 간리역까지 기차 보안원들은 눈에 쌍심지를 켜고 평양으로 갈 수 있는 증명서를 가졌는지를 꼼꼼히 점검한다.


단 한 사람이라도 증명서 없는 사람이 평양으로 들어가면 큰일이 난다. 그런 사람이 평양으로 가다가 간리역에서 잡히면 감옥(수용소)에 가게 되고 그곳으로 가면 죽은 목숨이다.

그야말로 몸에 있는 먼지 하나도 남김없이 다 털어내야 평양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것은 모두 ‘장군님의 안녕’을 위한 것이며, ‘수령 결사 보위’에 사활을 건 독재국가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나는 간리역에 도착하자마자 기차 바퀴 밑을 5개 지나 화물차, 객차 등의 철로 밑으로 빠져나와 잽싸게 담을 넘었다. 역 구내를 통해 나가면 단속, 검문, 벌금에 처해진다. 여행증명서가 없기 때문이다.


사전에 여행증명서를 발급받고자 하면 목적지에 가는 이유 등을 조사받아야 하고 그러다 보면 한 달도 더 걸린다. 그러니 증명서 없는 사람이 부지기수이다.

또 이런 사람들을 잡아서 벌금을 받아야 보안원, 역무원들도 살아간다.


타 지역에 사는 자식은 부모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어도 3개월 후에나 갈 수 있다. 여행증명서를 발급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에도 군 복무 중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부고를 받은 것은 3년 후였고, 보름이나 걸려서 여행증명서를 받아 집으로 사망휴가를 다녀올 수 있었다.




나는 간리역에서 남포-신의주행을 타야 한다.


간리역에 도착한 나는 배낭에서 비닐 방막을 펴고 잠자리를 마련했다. 역 안으로 들어가면 사람도 많고 빈대가 물어 도저히 거기서 잘 수가 없다. 역 앞에도 넓은 공간이 있는데 거기에도 사람이 많다. 장사하러 가는 사람, 군인들, 거지들….


여기서는 자기 몸 간수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순간에 거지가 된다. 잠깐이라도 긴장을 놓으면 신고 있는 신발도 벗겨가고 짐도 다 도둑맞는다. 그래서 나는 군인들이 몰려있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배낭끈은 팔목에 꼭 묶고 머리에 베고 신발 끈은 더 잡아매고 한숨 잤다.


밤새 정신이 들어있고 모기들의 성화에 정신을 차리니 아침 시체 청소가 시작되었다.

보안원 2명에 승용차 바퀴를 달아맨 손수레를 장정 3명이 끌고 온다. 그 위에는 시체 8구가 실려있다. 거기에는 임신한 여자도 있었는데 숨이 덜 넘어가 가쁜 숨을 쉬고 있었다.

살아있는 사람도 희망이 없으면 시체가 된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간리역은 하루에 적어도 80명 정도 땅에 묻힌다고 한다.

무덤덤하다. 하도 죽은 사람을 많이 봐서인지 나의 눈에도 무덤덤 증이 생긴 것 같다.




여기저기에서 물장수가 나타난다. 어딘가로 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세수라도 하라고 조그마한 그릇에 물통을 든 아이들, 아줌마들이 소리를 질러대며 돌아다닌다.


“세수하세요!”,

“먹는 물 사세요!”


역에서는 하루만 지나도 얼굴이 까맣게 된다. 석탄 먼지, 매연으로 이틀만 세수하지 않으면 그곳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꽃제비가 된다.


나는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주고 세수를 했다. 군인들, 여행객들, 거지 아닌 사람은 누구나 세수를 해야 거지처럼 보이지 않는다.

물 한 병 사서 역에서 마주 보이는 건물 아래 다시 자리를 깔고 앉자, 이제부턴 배를 채워야 했다.




건물은 4층짜리였고 노란색 타일을 붙여 깔끔해 보이는 건물이다. 이 건물은 ‘간리여관’이다.

1층은 감옥에서나 볼 수 있는 철창이 둘러 있고, 2층은 쇠 그물이 쳐져 있다.


그 밑에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고, 나도 비좁은 공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자리에 앉아 배낭에서 비닐봉지에 ‘속도전 가루’를 퍼담고 거기에 소금을 좀 넣고 물을 부어 주물럭 해서 속도전 떡을 만들었다.

하지만 먹으려고 하는 순간 등 뒤에 있는 건물 안에서 철창 사이로 고사리 같은 손들이 나와 있었다.


“아저씨 한 숟갈만 좀 주세요.”,

“저도 좀 주세요.”


10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의 손은 먹지 못해 퉁퉁 부어있었다. 그 순간 집에 있는 아들 생각이 나 울컥 했다.

할 수 없이 나는 만들어 놓은 떡을 한 숟가락씩 떼어 나누어주고 물 한 모금씩 건네고 다른 곳으로 옮겨가 다시 떡을 만들어 먹었다.




잠시 후 간리여관 앞에서는 난리가 일어났다.

중년 남성들이 5살, 7살, 10살 되어 보이는 아이들 여섯 명인가를 끌고 여관으로 들어갔다. 아이들은 발버둥을 치며 끌려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남자들은 막무가내다.


“나 집에 갈래.”

“할매 집에 갈래.”


아이들은 악을 써도 소용이 없었다.

이 아이들은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꽃제비들이다. 아이들을 잡아가는 사람들은 ‘917 상무’ 요원이다.

북한의 아이들은 태어나서부터 김부자에 대한 세뇌 교육에 길들여진다. 그런 아이들이 한순간에 전쟁도 아닌 평화 시기에 고아가 되었다.


1997년은 김일성 3년 상을 맞이한 해였다.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아이들이 김일성이 사망한 날인 7월 8일을 맞아 어떻게 평양으로 스며들어갔다.

손에 꽃송이를 하나씩 들고 만수대 김일성 동상 앞에 수백 명의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새까만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 대원수님! 우리는 고아가 아닙니다. 아버지 대원수님~”

하고 통곡했다 한다.

이 사실을 보고받은 김정일이


“우리가 전쟁 때에도 고아들을 돌봐왔는데…. 우리 당에서 책임지고 잘 길러냅시다.”

라고 말했고 그날이 9월 17일이었다. 그리하여 전국에 ‘917 상무’가 조직되었고 꽃제비 사냥이 시작되었다.

그들을 가둔 곳은 꽃제비 합숙소가 되었다. 여기서 고아들에게 공급되는 식량은 그것을 관리하는 사람들의 몫이 되었고, 고아들은 그 시설에서 무리로 죽어 나갔다. 간리여관도 그런 곳이었다.




이틀 만에 남포-신의주 기차를 탔다. 기차 안에는 콩나물처럼 사람들이 들어차 있고 나는 바깥공기도 쐴 겸 다시 기차 지붕으로 올라갔다. 상당히 위험하지만….


머리 위에는 고압 전기선이 지나고 조금만 잘못하면 전기에 맞아 황천길로 가야 한다. 제일 위험한 것은 기차 터널에 들어갈 때이다. 고압선이 낮아져 언제 머리에 스칠지 모른다. 그다음으로 위험한 건 기차 연결 부분이다. 쩔꺽거리며 서로 맞닿는 연결 부분에 손과 발이 들어가면 그대로 절단된다.


연결 부분에 같이 앉은 사람은 3명이었는데, 그중 한 명은 황해북도 사리원에서 온다고 했다.

우리는 서로 소통을 하고 장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나보다 나이가 들어 보였지만 물어보니 2살 아래다.


직업은 사리원에서 농촌건설대 노동자로서 일했다 한다. 아내가 병이 좀 있었는데 얼마 전에 먹지 못해 죽었고 집에는 아들 두 명이 있다고 한다. 나와 같은 입장이다.


무엇을 가져가는가? 물어보니 20kg 정도의 구리를 가지고 간다고 한다. 그때는 장사 물품이 여러 가지 있었지만 제일 돈이 되고 인기가 많은 것은 구리였다. 구리 1kg이면 웬만한 가족이 열흘은 살 수 있었다.

그러니 보안원, 보위원 등 단속 권한을 가진 사람들은 다 구리 단속을 했고 그것을 빼앗아 다시 팔아먹었다. 약초 같은 것은 그 사람들 눈에 차지 않을 때이다.


그 밖에도 장사 물품은 다양했었다. 군인들은 총알을 팔아먹다 총살당하고, 철도의 레일, 못, 공장의 설비, 심지어 논에 살고 있는 거머리까지 팔 수 있는 것은 다 돈이 되었다.




어느덧 기차는 안주역을 지나 정주역에 도착했다. 정주역은 단속이 매우 심한 곳이다. 왜냐하면 북한은 남한과 가까운 연선 지역과 중국과 가까운 국경 지역 40km 안에는 누구도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군수공장 구역, 평양시와 함께 이쪽으로 갈 수 있는 조건은 분명한 여행목적을 가진 여행증명서를 발급받은 자여야 한다.

그래서 이런 곳은 ‘승인번호 구역’이라고 한다. 증명서도 일반 증명서와는 다르다. 그 증명서에는 붉은 줄이 위엄 있게 대각선으로 굵게 그어져 있고, 이름, 성별, 직장, 직위가 밝혀져 있다.


그래서 정주역은 국경으로 가는 단속의 시작점이다.

기차가 역으로 들어서자 무장을 한 보안원들 50명 정도가 줄을 맞추어 역내로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기차가 멈추자마자 지붕 위에서 내려와 비좁은 기차 안으로 들어갔다.


기차 안은 사람이 너무 많아 일일이 다 보지 않는다. 사람 검열보다 짐 검열이 더 심하다. 장사꾼을 뺏어야 자기들도 먹을 게 있기 때문이다.


보안원 두 사람이 기차 출입문을 싹 막은 다음 다른 보안원들이 안으로 들어가서 증명서와 짐 수색을 진행한다. 짐은 척 들어보고 무게가 나가면 증명서를 확인한다. 그중에 구리 금속이 있으면 압수다.


나는 다행히 검문에서 벗어났다. 몇백 명이 단속되어 철길 옆 홈으로 끌려 나왔고, 순서대로 죄인처럼 꿇어앉는다. 앉지 않는 사람에게는 구타가 들어가고 발길질이 시작된다. 짐이 많은 사람들은 맨몸으로 끌려 나왔다.




검문검색이 한참 진행되던 중 지붕 위에서 이야기를 나눴던 사람에게 일이 벌어졌다. 사리원에서 온 그 사람은 소리를 못 듣는 벙어리로 가장하고 앉아있었다.

보안원이 소리를 지르며 내려오라고 하자 벙어리 흉내를 내며 거절했다. 지붕 위에 있는 구리 배낭에 자기의 자식과 어머니, 자기 목숨이 걸려 있기 때문이었다.


보안원은 철길로 내려가 주먹만 한 돌을 가져와 그 사람의 등을 향해 던졌다. 던진 돌은 그의 머리에 맞았고 피가 흘러내렸다.

그래도 내려오지 않으니 결국 보안원이 지붕 위로 올라갔다.


“야! 개새끼야!”

하고 구둣발로 몇 번 차더니, 그가 두 손으로 끌어안고 있던 배낭을 보더니


“이게 뭐야?”

하고 배낭을 낚아챈다.


제일 돈이 나가는 구리다. 보안원은 구리 배낭을 들어 기차 아래 바닥으로 던지고는 그 사람을 끌어내려 가려고 했다.

그 순간 앉아있던 그는 한 팔로 보안원의 머리를 감싸 쥐고 다른 팔로 위쪽의 고압선을 끌어안았다.

찌직 찌직 하는 불꽃과 함께 보안원과 사리원 사람은 까맣게 타서 철길로 떨어졌다.




이쯤 되니 보안원들이 지붕 위 사람들을 향해 총을 꺼내 공포탄을 쏘기 시작했다.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한쪽으로 두 구의 시체를 치우고 북적한 3시간이라는 시간이 지난 후 단속된 사람들을 홈에 남긴 채 기차가 출발한다.


역 홈에서는 통곡 소리가 울려 퍼진다. 목숨을 건 장사 짐이 주인도 없이 기차에 실려 떠나는 것이다.

그 순간 20대로 보이는 여자가 벌떡 일어나더니 달리는 기차 창문에 달려가 매달렸다. 기차에 올라타려는 순간 보안원들이 달려와 그 처녀를 잡아 떨구었다. 그녀는 기찻길로 떨어졌고 다리가 잘려 나갔다.


또다시 기차가 섰다. 기차에 있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웅성댔고 눈물을 흘리는 나이 먹은 사람 하나가


“아! 일본 놈이 악독하다 했어도 이건 저놈들이 더하다.”

라며 혀를 찼다.


나 역시 조금 전까지도 같이 있던 사람이 시체가 되어 실려 가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먹먹해지고 채워 넣지도 않은 눈물이 나도 모르게 흘러내렸다.


이것은 모두 꾸며내어 쓴 글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사리원에는 고아 두 명이 새로 생겼다. 실로 말도 안 되는 현실이다.


자기 족속 지키겠다고 수백만의 국민을 죽음으로 내모는 나라는 독재국가 북한밖에 없다.

말 한마디 잘못해도 삼대가 멸하는 사회, 죄 없는 사람들 잡아다 정치범 수용소에 끌어다 영원히 세상 바깥으로 분리시키는 사회, 옥수수 한 이삭에 귀중한 목숨을 파리 잡듯 죽이는 세상이 바로 김일성·김정일 족속이다.

나는 평안북도 용천역에 내렸다. 신의주에 들어가기 두 번째 전 역이다. 신의주 도착 전 또 검문이 시작된다.

나는 용천역에 내려 시집가서 용천에 사는 누나네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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