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탈북 04화

# 4 장사

by 한성태

2000년대 들어서면서 사람들의 생각이 좀 달라졌다.

산에 가서 땅을 일구어 농사하던지 장마당에 나가 장사를 하는 사람은 살아남았고, 김일성·김정일의 당에서 하라고 하는 대로 하던 사람은 모두 다 죽었다.


사람들 속에서는

“승냥이는 다 죽고 여우만 남았다”,

“노동당이 먹여 살리냐? 장마당이 사람 살리지”,

“강성대국 문이 열리면 들어가지 마라. 문에 끼어 죽는다”,

“이놈의 세상, ’ 바쳐라 ‘하는 소리만 안 들어도 살겠다”

등등의 말들이 새어 나왔다.




나는 의사였으니 동네 사람들을 치료해 주고 약을 지어주며 그 대가로 쌀 한 되씩 들고 온 사람들 덕분에 굶지는 않고 살았다.

2000년 초반, 북한 전역으로 파라티푸스라는 전염병이 퍼져 잘 먹지 못하는 사람들은 무리로 죽어 나갔다.

나는 동네 사람들을 위해 산에 가 ’새모래덩굴‘이라는 약초를 캐어 소태, 지유 등의 약초를 섞어 솥에 다려 파라티푸스로 아픈 사람들을 많이 고쳐주었다.


하도 사람들이 굶어 죽어 나가니 ‘식량 구입’이라는 명목으로 친척·형제들의 집으로 다닐 수 있게 조금 허용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장사에 눈이 텄고 그중 ‘약초 장사’를 많이 했다. 중국에서 무슨 약초를 사겠다며 주문이 들어오면 일반 사람들은 나에게 어떻게 생긴 약초인지를 물어 산으로 찾으러 갔다.

그리하여 산에는 약초가 말라갔다.

한때 삽주(백출), 단풍마(부채마), 세신, 솔 화분 등 약초란 약초는 다 돈이 되었다.




알고 보면 내가 그 땅에서 살아남고 내 아들까지 대한민국에 데려올 수 있었던 건 어쩌면 할아버지, 아버지 덕분이라 할 수 있다.

충북 청주의 청주한씨 집성촌에 살다가 일제 강점기에 어떤 일을 계기로 일가를 이끌고 북쪽 땅으로 이주한 할아버지는 한의사였다.

아버지 역시 할아버지께 한의술을 배워 유능한 ‘침쟁이’가 되었는데, 내가 어렸을 때 종종 평양에서부터 환자가 집으로 찾아왔던 기억이 남아 있다.


내 형제는 모두 7남매로 위로 누나가 셋, 형이 하나, 아래로 남동생이 둘이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으나 아버지는 둘째 아들인 나에게만 당신의 의술을 물려주었다.

4살 때부터 왕진 가방을 멘 아버지 등에 업혀 아버지의 치료 장면을 지켜보곤 했다.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는 한 장면은 어느 겨울날, 환자를 치료하고 있는 아버지 옆에 어린 내가 앉아, 집주인이 내어준 옥수수 알갱이를 컴퍼스로 하나씩 찍어 화롯불에 구워 먹으며 아버지가 하시는 모습을 지켜보던 기억이다.

그렇게 눈동냥으로 배우기 시작한 침술을 10살부터는 직접 아버지 몸에 침을 놓으며 연마했다.


16살에 군대에 나가 8년이 지난 24살에 제대하고 돌아와 정식으로 함흥의대 동의과(東醫科)에 입학했지만, 먹고살기도 어려운 시절이라 지금 생각하면 대학에서 배운 것이 많다고 할 순 없다.

대학에서는 환자의 개별 신체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일반적으로 공통된 위치에 놓는 침혈법과 약제법을 배웠을 뿐 약초 채취 과제를 위해 학우들과 산에 올라 힘들게 약초를 캐던 기억이 대부분이다.

그러니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서 배운 침술과 약초 법제법이야 말로 진정한 의술로 익힌 나의 소중한 자산이라 할 수 있다.




동의보감에 ‘창출고(蒼朮膏)’라는 명약이 나온다.

김일성의 시절 한때, 북한의 제약회사에서 ‘장출고’를 만들어 약국에 내보냈다. 주원료는 백출(白朮, 삽주의 뿌리)이다. 백출은 위(胃)를 안정하게 하고 장의 기능을 보호해 주며 혈액순환을 돕는 좋은 약초이다.


당시 북한의 많은 주민들이 장출고를 좋아했고 건강에 덕을 봤다.

그러나 필요한 원료들을 충분히 조달하지 못하여 장출고를 더 이상 만들어내지 못하게 되자 ‘영신환’으로 대체되었다. 이것 역시 백출로 만든 약이다.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며 사람들이 장사에 눈이 뜨여 자원이 마르기 시작하자 간부들, 평양의 1%도 안 되는 사람들을 위해 제약공장에서 장출고를 만들 때, 만드는 사람들을 믿지 못해 총을 메고 감시까지 하였다.

장출고를 만들고 난 솥에 남은 누룽지는 만든 사람들 맛보기용이다.




1999년 6월. 나는 그동안 산을 다니며 캐온 삽주, 세신, 솔 화분을 지고 신의주로 떠났다.


떠나기 전 아내에게 며칠이 걸릴지 모르니 여러 가지 주의사항을 곱씹어 이야기했다.

도둑이 들 수 있으니 문단속을 어떻게 하라든가, 식량이 얼마 있으니 어떻게 나눠서 먹어야 한다는 등등을 알려주고 속도전 가루, 옥수수 변성 가루, 소금, 약초 등을 꾸려 가지고 역으로 갔다.


문을 열고 집을 나서니 집 걱정이 더 발목을 잡는다.

그때는 영양이 부족해 늘 허약했던 5살 아들 철이가 있고, 그 밑에 백날이 되어가는 아들 석이가 있었다.

얼굴이 비쩍 마른 아내가 울며 손을 흔든다.


“여보. 될수록 빨리 다녀올 테니 그동안 몸조리 잘하고 갔다 오면 당신이 좋아하는 밀빵 만들어 줄게. 쌀도 많이 가져오고.”


사실 그 당시는 장마당에 가야만 빵을 구경할 수 있었다. 아침 일찍 떠나면 부지런히 걸어 장마당을 보고 급히 돌아오면 어두운 밤이다.

돈이 없어 시장에 가봐야 빵 한두 개 정도. 두루 장을 봐가지고 돌아오면 하루 30km 걸어야 집에 올 수 있었다.


눈물이 글썽한 아내가 내 손을 꼭 쥐고 말한다.

“여보. 어디 다치지 말고 빨리 와요.”


“응.”

하고 장을 나서니 멀리서 다시 돌아보아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등에 어린 아들을 업고 오래도록 손을 흔든다.




일찍 떠난 걸음이 오후 되어서야 기차역에 도착했다.

기차라 해봐야 정해진 시간이 없다. 어느 기차는 12시간, 20시간씩 지연이다. 그것도 다행이다.

기차가 가다 전기가 끊기면 1주일도 지연이다.


사람들은 죽은 사람 시체에 익숙해졌다.

역전에 가면 김일성 김정일 초상이 걸려 있다. 그 밑에 2~3구의 사람이 누워있다.

잠을 자는 사람처럼 보인다. 죽은 사람이다.

그 옆에서는 살아있는 사람이 카드놀이도 하고 밥을 먹는다.


다행히 저녁 9시경에 금골-평양 4열차가 왔다. 그래도 4열차라고 하면 그중 잘 다닌다.

왜냐하면 김정일에게 올라가는 8호, 9호 물품이 4열차에 올라가기 때문이다.


증명서, 기차표 하나 없이 열차 사이 지붕에 자리 잡았다.

기차는 급행이라고 하지만 아주 느리게 간다.

우편함, 상급차, 군인차, 일반차로 나누는데, 우편, 상급차만 유리가 붙어있고 나머지는 유리가 거의 없다.

승강기 계단 밑 지붕에는 그야말로 해방을 맞아 고향으로 가는 형상을 떠올리게 한다.

저 앞에 달려가는 우편차에는 평양으로 가는 5호, 8호, 9호 물품이 실려있다.


농산물, 수산물, 약초 등등. 그것을 가꾸고 잡고 캐는 사람들은 신체검사를 하고 질병검사를 받는다.

이렇게 최상의 수준으로 검증된 사람들이 총을 멘 사람들의 감시 속에서 만든 피와 땀이 실려있다.

그러나 선전으로는 장군님도 쪽잠을 자며 줴기밥을 먹으며 우리 인민들을 잘 살게 하려고 힘들게 일을 한다고 선전을 한다.


여기 남한에서는 자가용으로 3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15시간 걸려 겨우 간리역으로 기차가 들어서고 있었다.

keyword
이전 03화# 3 고난의 행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