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매미 소리가 요란하다.
어느덧 온 강산은 푸른 옷으로 단장하고 저녁쯤이면 모기 성화에 책 뚜껑을 하나씩 들고 열심히 부채질이다. 태어난 지 두 달 지난 아들도 배가 고픈지 더운지, 열심히 울어댄다.
“여보. 젖이라도 물려보오.”
하니 어미는
“너무 더워서 그래요”
한여름의 늦은 저녁은 끈질기게 길다.
학교에 다니는 애들은 한 달 동안 농촌지원에 나가 ‘모내기’, ‘강냉이 영양단지로 옮겨심기’를 하느라 햇볕에 타서 눈알만 반들반들하다.
7월 10일. 그날도 평범하게 출근길에 올랐다.
한참을 가다 보면 길가의 풀들이 이슬에 맺혀 힘들게 나에게 애원한다. 제발 무거운 물방울을 털어달라고. 아침마다 그 무거운 이슬방울을 털어주는 것은 나의 신발이다. 직장에 도착해서 출근 도장을 찍고 발을 내려보면 흠뻑 젖어 있다.
조회를 마치고 협의회가 끝난 후에야 오늘 봐야 할 환자명단이 온다. 다행히 몇 명 안 된다. 오후 4시부터는 구역 ‘혁명역사연구실’에서 3시간짜리 ‘교시 발췌’가 있다고 한다.
그럭저럭 오전 일을 마치고 집으로 점심 먹으러 출발하려고 주변 정리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구내방송에서 아나운서의 박력 있는 목소리가 12시부터 중대 방송을 한다는 말을 반복한다.
온 구내가 숨을 죽이고 점심 식사하러 가지도 못하고 있는데, 방송에서는 근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김일성이 죽었다는 것이다.
나도 놀라고 다른 사람들도 자기들의 귀를 의심하며 한동안 숨을 죽이고 있었다.
정식 12시 사이렌이 울리고 가던 기차가 멈춰 기적소리도 들리고 배, 자동차 등 소리를 낼 수 있는 수단들은 다 고함을 치기 시작했다.
그제야 사람들은 땅을 치며 울기 시작했다.
들리는 소리는 다 사실이었다.
아마 그 땅에 사는 사람들 모두가 그날 거의 점심을 굶었을 것이다.
온 구내가 정적을 깨고 고함을 치고 난리가 났을 때쯤 당에서 긴급 지시들이 하달됐다. 비상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당, 청년동맹, 직맹의 모든 책임자 대상으로 긴급회의가 소집되었다.
당시 나는 당원이면서도 병원 방역소와 의약품관리소 관리자이고, 약 25명의 청년동맹원을 관리하는 청년동맹 비서를 맡고 있었다. 당비서실에 가니 당세포 비서, 청년동맹 비서, 직맹위원장 등등 다 모여있었다.
긴급회의에서 결정된 가장 중요한 내용은
“모든 당원들과 근로자들은 수령님께 대한 무한한 충성심과 수령님을 흠모하는 마음을 담아 각 구역, 동기업소별로 추모장을 꾸리고 자발적인 참여로 수령님을 추모한다”
는 내용이었다.
우리도 병원 회의실에 화환과 김일성 초상을 걸어놓고 24시간 교대로 근무를 서면서 조문객을 받았다.
조문객이라 하면 오던 사람 또 오고 하여 한 사람이 다섯 번 올 때도 있었다.
올 때마다 어디서 얻어오는지 꽃을 가져다 놓는다. 아마 그때 그 땅의 꽃들은 무서웠을 것이다.
마지막에는 작물의 꽃까지 씨가 말라버렸다.
며칠이 지나니
“수령님은 우리들의 아버지인데 꽃만 가지고 올 수 없다”
며 음식상이 차려진다.
아침 한 끼도 변변히 먹지 못한 시절에 제사상을 차린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먼저 하는 사람은 충성심이 높고, 하지 않는 사람은 충성심의 척도가 낮게 평가되는 시절이다.
보통 사람은 먹어볼 수도 없는 흰쌀밥에다 시장에서 구한 귀한 생선과 술까지 차려졌다.
그 시기 일반인으로서는 아주 힘든 일이었다.
그것을 차려가면 술은 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고 음식들은 24시간 근무서는 사람들의 시장기를 달래주었다.
모든 행동은 철저한 감시와 통제 속에 있었으며 일거수일투족, 말 한마디, 행동 하나, 철저한 감시의 연속이었다.
나는 생각이 깊어졌다. 산모도 먹지 못해 젖이 잘 안 나와 갓난아이의 영양도 떨어지는 상황에서 제사상을 마련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나는 집에 와서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다른 사람들은 다 제사상을 차리는데 우린 어떻게 하면 좋겠소?”
이렇게 말을 하니 아내가
“여보! 당신 생일에 해주려고 제가 건사해 놓은 쌀이 좀 있어요. 그걸로 우리도 해요. 그래도 당신은 당원이면서 청년동맹비서가 아니에요? “
하는 것이다.
눈물이 소리 없이 흐른다.
이 일로 형과 의논했다.
제사상을 내는 사람에 대한 정보는 어디서 하든 모두 보고가 되니 병원 추모장에 형과 합동으로 제사상을 차리면 형님의 직장에도 통보가 갈 수 있도록 했다.
그리하여 내 생일날 밥 한 그릇 떠 놓으려고 남겨놓은 한 줌의 쌀은 김일성의 제사상에 올라 형님과 우리 가족의 추모장 제사상이 되었다.
매일이다시피 구역 문화회관 넓은 광장에는 추모 모임과 행사가 진행되었고 사람들이 움직이는 모습은 하나의 큰 기계 움직이듯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간다.
추모 기간이 일주일에서 일주일 더 늘어나 15일이 되었다. 아무리 여름이라지만 왜 그리도 더웠는지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다.
큰 광장 한 편에는 의사들이 대기 중이다. 일사병으로 쓰러지는 환자들이 하루에도 50명 정도씩 되었다.
환자들이 쓰러지면 천막에 옮겨와 땅에 줄을 맞춰 눕혀놓고 심장이완제를 놓거나 열이 나는 환자에게는 아날긴 주사를 놓아 정신이 들면 그 자리에서 돌려보낸다.
지긋지긋한 추모 기간이 저물어간다.
다음 해에도 그날이 오면 애도 기간이 5일씩 반복되었다.
사실 매 순간이 애도 기간이다. 수령님을 잘 모시지 못한 잘못은 그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의 책임이고 잘못이다.
김일성이 죽은 다음 해 4월부터인가, 충성심 검증이 들어갔다.
애도 기간 중 당, 청년동맹, 직맹, 소년단 등 모든 조직에 속한 사람들은 그들의 일거일동, 말과 행동들을 충성심에 의하여 총화하고 검증받아야 했다.
어느 조직이나 할 것 없이 주 생활총화, 월 생활총화, 분기 생활총화, 초급·부분 조직 방향을 위한 총회 등 행사가 계속 맞물려 돌아간다.
조직책임자들은 모두 동맹원, 당원, 맹원 중에 자기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사람, 즉 스파이를 만들어 두어야 한다.
이미 전에 생활총화에서 보고받은 문제였다.
어느 간호사 집에서 애도 기간에 조부모 제사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아버지가 술을 마셨고 간호사도 술 한 잔 먹었다는 내용이다.
나는 즉시 제보한 사람을 불러 질책했다.
”누구나 부모가 있고 돌아가시면 제사를 지내겠는데, 동무도 그 상황이 되면 그렇게 될 수도 있는 거 아니오? 조용히 넘어갑시다. 사람 하나 못살게 만드는 건 쉬운 일이오. 그만 없었던 일로 합시다. “
라고 설득했다.
이 문제로 내 인생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당시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나의 질책에 앙심을 품은 자는 이를 몰래 고발하였고, 보위부에 상정되어 나는 당으로부터 엄한 질책을 받았다. 당시는 사소한 일로도 직책과 당원증 박탈, 추방과 감옥, 총살까지 이루어지던 시절이었다.
나는 이 일로 청년동맹 비서 자리를 박탈당했고 추가로 언제 어떤 처벌이 내려올지 모르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 간호사와 가족은 즉각 먼 곳으로 추방되었다.
그리고 나에게도 그날이 다가왔다.
1996년 5월 어느 날, 당에서 사무실로 나오라고 해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그 사람 입에서 많은 말이 나왔지만, 나의 귀에 꽂힌 단어는 ‘출근 금지’와 ‘추방’이었다.
다음 날 아침, 트랙터 한 대가 우리 집 앞에 와 통통거리며 서 있었다. 병원에서 노무자 5명이 타고 왔다.
아내는 두 돌 밖에 안 되는 아들을 업고 소리 없이 계속 운다.
트랙터에 이삿짐을 싣고 떠나 도착한 곳은 어느 산골 농장의 문짝도 변변히 없는 하모니카 주택이다.
이제부터 여기서 살아야 한다.
이것이 나의 청춘을 바쳐 거의 10년을 나라를 위해 언 땅에 배를 붙이고 나라를 지킨 사람에 대한 선물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3년 후 사망통지서를 받고 고향에 갔을 때 눈물이 아닌 그 무엇, 걸쭉한 고름이 빠지는 것을 느꼈었는데, 지금은 배신감으로 눈에서 피가 흐른다.
이것이 충성심의 검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