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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탈북 01화

#1 배급

by 한성태

봄도 늦은 봄이다. 여름의 문턱을 넘는 입하(立夏)는 지나고 소만(小滿)의 차례이다.

때는 1994년 5월이다.


늘 울리던 아침 7시, 사이렌 소리도 요즘은 뜸하다. 종종걸음을 움직여 구역병원으로 출근하는 나의 발걸음은 무겁다.

오늘은 배급 날이다. 아침 7시 구역병원 정문에서 10분 전에 출근 도장을 찍고 동의과(東醫課)에 도착한 나는 우선 입원실부터 돌아보았다.


동의과 입원실은 환자가 많지 않다. 기껏해야 다리 삔 환자, 허리 아픈 환자, 머리 아픈 환자들이다. 그나마 이 중 70%는 직장에 나가기 싫어 병원에 뇌물을 고이고 들어온 가짜 환자이다.

동·리 병원에서는 외래 진단서를 최장 3일까지, 최대 2번만 처방할 수 있는데 그 이상 진단서가 필요하다면 큰 병원에 가야 하고 더 큰 뇌물이 필요하다.

막상 정말 아픈 사람이 병원에 바칠 뇌물이 없어 진단서 없이 직장에 나가지 못하면 무단결근이 되고 무단결근이 3일 이상 되면 법적제재가 가해진다.


출근하고 나면 조회와 함께 의사협의회가 시작된다. 협의회에서 배정받는 환자가 오늘 치료 환자이다.

우선 출근 도장을 찍었으니 나는 동기 의사에게 조용히 부탁했다. 내 환자가 오면 어떻게 해달라고….


“강 선생! 오늘 환자 좀 부탁해! 나 오늘 배급 날이야.”


강 선생은 내 사정을 잘 안다. 집에는 출산한 지 며칠 안 되는 아내가 누워있다.




배급소는 9시 넘어야 문을 연다. 배급소 앞에는 구루마(손수레)들이 쭉 늘어서 있고 배급을 타러 온 여인네들이 왁자지껄 떠들고 있다.

내가 도착하니 배급소 문은 벌써 열려있고 70~80명 되는 여자들이 앞에서 열심히 불러대는 배급 소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배급 날짜는 매달 1일부터 15일 사이에 직장 및 직업별로 정해진다. 권한이 좀 있는 직장(당, 행정, 법 검찰, 병원 의사 등)일수록 배급 일자가 빠르다.

우리 집 배급일은 매달 2일, 17일인데, 여인네들이 흔히 말하기를 서로 배급일을 물어보면 우리는 ‘당 날’이요. 우리는 ‘인민위원회 날’이오 하고 통한다. 그렇게 따지면 나의 배급 날은 ‘인민위원회 날’이다.


한참을 기다려 배급소 소장이 “217번!”하고 소리친다.

제일 뒤에 있던 나는 “예!”하고 소리치며 앞으로 나갔다. 멀끔한 젊은 남자가 앞으로 나가니 뒤에서 여인네들이 수군거린다.


“어이구! 멀끔한 총각이 배급 타러 왔네. 저것 봐! 인민위원회 날이야.”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계속되고 나는 자루 두 개를 들고 잡곡 나오는 곳에서 옥수수쌀을 받고 백미 나오는 곳에서 백미를 받아 양손에 갈라 쥐고 배급소 문을 빠져나왔다.


7:3. 잡곡 70%, 백미 30%. 다 합쳐서 15kg 정도를 등에 지고 배급소에서 멀지 않은 집으로 향했다.




1994년부터 국가 배급이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배급소에서는 이번에 주지 못한 배급은 식량이 풀리면 한 번에 준다고 계속 역설했다. 그러나 날이 가면 갈수록 절반에서 절반으로 또 줄었다.


거리에는 거지와 도둑들이 늘어나고 하지 말라고 하는 장사꾼이 늘어났다.


줄 수 있는 쌀이 없으니 배급소는 문을 닫고 뒷문이 열렸다. 당 간부, 검찰, 안전부, 보위부, 인민위원회 가족들은 타 먹을 배급 외에 더 가져간다. 병원은 거기에 끼지 못한다.


배급소가 문을 닫자 이젠 배급을 주는 곳이 협동농장으로 바뀌었다. 연간 주지 못한 배급량을 배급소에서 계산하고 지정된 협동농장으로 손수레를 끌고 몇십 리 찾아간다.


하루 종일 젖은 옥수수가 탈곡기에서 내려오길 기다린다.


양곡에 포함된 수분(水分)을 계산하지 않고 무게를 달아주니 농장에서는 이익이다.

국가에 양곡을 바칠 때는 다 말려서 일정 기준보다 수분이 적다는 검사를 받아야 납품할 수 있는데, 배급을 줄 때는 수분검사 없이 ‘물 옥수수’로 그냥 계량해서 줘도 되니 협동농장 입장에서는 많이 이익이 되는 것이다.


밀린 배급으로 마르지 않은 옥수수를 구루마에 200~300kg씩 싣고 몇십 리를 끌고 집에 와 하루만 방치하면 곰팡이가 핀다.


일반 직장인들은 결근, 지각 등등의 이유로 배급표가 잘려 나가 그나마 협동농장에서 받는 옥수수도 실제로는 몇 kg이 되지 않는다.




그다음 해부터는 배급이 달라졌다.

봄이 오자 직장별로 곡식을 배급받는 대신 협동농장의 토지를 배분받는다. 개별적으로 감자 종자, 비료, 퇴비를 마련해 직접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가정의 인구수별로 땅을 나누어준 것이다.


한 사람당 30~50평, 3인이면 100평~150평이다.

이젠 구루마에 배급 대신 퇴비, 종자를 싣고 감자 심으러 간다.


감자 농사를 짓는 데 있어 일단 종자를 땅에 심어놓으면 다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감자가 탁구공 크기만큼 어느 정도 크면 그때부터는 경비를 서야 한다.

꽃제비들은 물론이고, 군인들도 먹지 못해 영양실조에 걸려 머리카락이 다 빠지는 상황이라 그때부터 군인들의 약탈이 시작된다.


돌멩이를 잔뜩 넣은 자루를 지고 와 감자밭 가운데에 내려놓고 경비원이 오면 돌을 던진다.

돌에 맞아 피가 터지고 숨지는 사례도 있다.

가지에 매달려 있는 열매면 그냥 따가면 될 텐데 땅에 박힌 감자이니 무조건 뽑아 버린다.


한마디로 초토화가 된다.

이러니 직장마다 감자를 심은 가장들은 5명 정도씩 무리를 지어 경비를 서야 한다.

그 사람들 역시 다음날 출근을 해야 하는데 말이다.

참 힘든 세상이다.


6~7월경, 감자를 수확할 때가 되었다.

열심히 가꾸고 경비를 선 주인은 아무 권한이 없고 협동농장 사람들이 와서 수확량을 판정한다.

한 평에서 감자를 캐서 저울에 달면 그 무게만큼 협동농장은 국가에 양곡을 납부한 것이 되고 배급소는 주민에게 배급을 준 것으로 친다.

종자와 비료를 구하지 못한 세대는 수확량이 적어 굶어야 하고, 농사를 위해 출근하지 못하면 의무를 하지 못했다고 단련대에 끌려 나간다.




다음 날 아침 늦지 않게 7시에 출근 도장을 찍었다.

10분 늦으면 지각이다. 세 번 지각하면 하루 결근으로 판정된다.

아침 10시 정도가 되면 병원 마당에는 환자들을 싣고 운송차들이 속속 들어온다. 목탄차도 있지만 손수레, 소달구지가 더 많다.


북한 병원은 다 종합병원이며 국가가 운영한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4과(課)’ 라고 부르는 과가 있는데, 당 간부 전용 병원이다. 여기는 약이나 의료기구들이 우선 공급된다.


병원의 직제를 보면 병원행정을 담당하는 ‘병원장’, 실제 의료를 담당하는 ‘기술부 원장’, 병원 직원들의 정치적 관리자인 ‘초급 당비서’, 직원들을 감시·통제하는 보위부 안전부 소속 ‘요원 담당’이 포함되어 있다.


환자가 오면 외래에서 접수해서 과별로 배정된다.

입원환자, 수술환자들은 아침마다 진행되는 의사협의회를 통해 각 과로 배정받는다.


국가 배급 공급이 끊어지고 사회 시스템이 무너지니 환자와 의사의 관계가 뇌물 관계로 변해 버렸다.

긴급한 수술환자가 발생하여 그 환자가 수술받으려면 약이나 의료도구들을 직접 시장에 가서 사와야 한다. 수술 중 정전되면 전기를 공급하는 배전부를 찾아가 사정사정해야 한다. 또 의사들도 배가 고프니 환자가 의사 밥까지 챙겨야 한다.

전기, 약, 의료도구, 식사…. 그 모든 걸 환자가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3일짜리 진단서를 떼려면 쌀 1kg, 담배 한 갑이 필요하다. 산부인과 의사들은 집에서 소파 수술을 할 수 있게 차려놓고 뇌물을 받고 몰래 한다.

퇴직한 의사들은 다 장마당에 몰려든다. 장마당의 약장수들은 거의 다 의사, 약사들이라 보면 된다.

장마당에 가면 병 처방이 되고 약을 살 수 있으니 보통 사람들은 병원은 있으나 마나라고 생각한다.


약을 사 먹을 수 없는 사람들은 이미 다 죽었다.

길가에는 어딜 가나 시체가 뒹굴고 썩은 내가 진동이다. 죽을 사람들은 다 죽은 것 같다.

그러나 다음날 보면 또 시체다.




고등학교 시절에 친했던 한 친구가 있었다. 늘 조용하고 내 말을 잘 들어주던 친구 상일이다.

그의 아버지는 군대에서 장교로 오래 복무하다 제대하여 동사무소 사무장을 하고 있었다.

그때는 자전거가 귀하여 동네에 한두 집밖에 없었다. 상일이 아버지는 늘 자전거를 타고 사무소로 출근했다. 학교에서 돌아온 우리는 동사무소 앞에 세워둔 상일이 아버지 자전거를 가져다가 자전거 타는 연습을 하곤 했다.


상일이는 중3 때 엄마가 돌아가시고 의붓엄마의 눈칫밥을 먹다 군대에 갔다.

우리는 서로 헤어져 있다가 군대 제대 후 다시 만났다.

상일이는 군대를 공병 부대로 나가 주로 공사장에서 삽 들고 일만 하다가 영양부족으로 결핵을 앓았다고 했다. 얼마간 군의소에서 치료받다가 감정 제대하여 집으로 왔다.

군 복무하던 황해남도 어딘가에서 친하게 지내던 참한 여자와 결혼해 낳은 어린 아들이 있었다.


국가 배급체계가 붕괴하자 먹을거리가 걱정된 그의 아내는 황해도 친정으로 쌀을 구하러 간다며 친구에게 아들을 맡겨놓고 길을 떠났다.

상일이는 직장에 출근하면서 아들을 돌보며 지내다가 하필 예비역 교도대 훈련을 통보받게 되었다.

먹을 것도 없는 집에 어린 아들을 홀로 둘 수 없어 부득이 훈련에 참가하지 못했다.

아내는 두 달째 돌아오지 않는 상태였다.


훈련기간이 지난 며칠 후 담당 보안원이 찾아왔다.

보안원 사무실로 따라가니 이미 진술서가 다 작성되어 있고 읽어보라고 한다. 내용은 늘 들어보던 소리다.

‘원쑤들의 준동이 심한 환경에서 최고사령관 명령 불복종 등등….’

여러 가지 죄목이다. 그 사회주의 독재국가 현실에서는 맞는 말이고 타당한 죄목이다.


할 소리가 없다. 진술서에 손도장이 찍혔다.

다음날 직장으로 단련대에서 사람이 와서 상일이를 끌고 갔다. 죄 값으로 한 달 단련대 생활을 해야 한단다. 단련대에서는 식량도 본인 부담인데 집에 와서 뒤져보니 쌀 한 톨이 없어 그냥 몸만 끌고 갔다.


엉엉 우는 아들을 뒤로 하고 단련대에 가서 열흘 정도 있다 풀려 나왔다.

사연을 물어보니 군대에서 앓았던 결핵이 재발되어 각혈을 심하게 하니 전염이 될까 두려워 풀어주었다는 것이다. 기가 막힐 일이다.


아들은 꽃제비로 거리로 떠돌고 각혈을 심하게 한 상일이는 며칠 못가 영혼이 되었다.




11월인가, 추운 날씨에 눈이 날리는 날, 역 앞을 지나가다가 상일이 아들을 보았다.

너무 불쌍하고 가슴이 미어져 왔다. 새까만 얼굴에 윗옷은 입었는데 아랫바지를 벗고 있는 것이 아닌가! 찬찬히 보니 다리와 다리 사이 그 어린아이 성기가 벌겋게 부어있었다.


사연인즉 역 앞에서 국수 장사를 하는 장사꾼이 너무 배가 고파 앉아있는 아이에게 거지가 앞에 있으면 장사가 안된다며 냄비의 끓는 물을 뿌렸다는 것이다.

나는 그 아이에게 ‘덴쁘라’ 기름튀기 2개를 사주고 자리를 떠났다.

그 후 다시 그 자리에 가보니 상일이 아들은 역전 화장실 옆에서 시체로 굳어져 있었다.


배급의 붕괴는 수많은 목숨을 앗아갔고 죄 없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들었으며 공개 총살과 비공개 처형, 살인과 강도들로 수많은 사람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하늘에서 내리는 빗방울아!

이 땅에 내리는 이유가 무엇이냐?

쏟아지는 빗방울이라지만

말라버린 마음에 흐르는 눈물보다 적구나.

도시가 잠기는 장마라고 해도

우리가 흘린 눈물보다 아주 적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아!

이 땅을 함부로 파지 마라.

당신이 파는 한 줌의 흙 속에

누군가의 풀지 못한 영혼이 묻혀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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