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A라는 친구가 있었다. 좋아하는 놀이가 잘 맞아 빠른 시간 내 단짝 친구가 되었다. 그러나 A는 자기주장과 고집이 강한 친구여서 시간이 조금 흐른 뒤부터는 대부분 그 의견에 따라주어야만 놀이를 지속할 수 있었다.
친구 B에게 화나는 일이 있었던 A는 그 친구에 대한 감정을 나를 비롯하여 주변 친구들에게도 강요하기 시작했다. B와 놀지 못하게 하고, B와 말도 하지 말라며 명령조로 어깃장을 놓곤 했다. 그리고 이 일이 추석연휴를 지나고 와서도 지속되었다. 그렇게 A는 같이 노는 다른 친구들을 번갈아가며 못 놀게 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A는 나에게 "O 더하기 O이 뭔지 알아? 이거 모르면 나랑 못 놀아."라고 했다. A는 똑똑해서 아는 것도 많고 말도 유창하게 잘하는 친구였다. "~하면 나랑 못 놀아"라는 말이 두렵기도 하고 속상해서 화장실에 엄마 계산기를 몰래 들고 들어가 숫자와 기호들을 꾹꾹 눌러도 보았다.
어느 날 뒷산에 올라 여러 친구들과 갈대를 꺾어 놀잇감 삼아 놀던 중 A가 불평불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본인 것은 모양이 이상하고 좀 꺾였다고. 한참을 투덜대다 나에게 귓속말로 한참을 속삭였다. 정확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내 갈대는 멀쩡한데 자기건 이상하다는 것의 내용이었다. 그래서 나는 모양이 멀쩡했던 갈대를 땅에다 버렸다. 그제야 그 친구의 불평불만이 사라졌고 우린 다시 웃으며 놀기 시작했다.
단짝 친구라고 불리었지만 놀이 과정이나 일상의 대화에서 내 말이 A에게 수용당한 적은 별로 없었다. 예를 들어 내가 태권도 학원에서 빨강띠를 땄다고 이야기하면 "아니야, 너 빨강띠 안 땄어!"라며 이야기를 부정하고 학원을 전혀 다니지 않는 A는 "나는 너보다 높은 품띠야." 하며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 같이 줄넘기를 하고 놀면 나는 분명 10개를 했는데 A는 늘 아니라고 우겼고, '아기'라는 글씨를 유리창에 적으며 읽고 있는 나에게 바르게 쓴 글씨마저 틀렸다고 우기던 A.
점차 A와 멀어지고 싶은 마음에 다른 친구와 조금 친하게 지내면 '배신자'라고 놀려대고, 내가 함께 노는 친구의 머리와 가슴팍을 때리기도 했다. 사소한 것에 시비 거는 A의 비아냥 거리는 말들이 가슴에 박혀 악몽을 꾸기도 했다. 나중에 선생님을 통해 들은 것이지만 나에게 집착을 했던 A는 내 옆에 다른 친구가 있기라도 하면 그 사이를 비집고 기어코내 옆에 섰다고.아이들에게는 이러한 상황이 자연스레 받아들여졌고, 어른의 눈에만 보이는 그런 것들이 많았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A가 나를 향한 시기 질투가 정도를 넘어섰다고 했다.
최근 A의 기억이 떠오른 건 내 아이가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기억과 내 아이가 겪을 심리적 스트레스가 뒤엉키며 마음이 조금 소란스러웠다.
그때는 몰랐고 지금은 알게 된 것이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질투'라는 감정은 상당한 파괴력을 가졌다는 것이다. 친구를 시기 질투하는 것은 단순히 이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질투는 상대방이 나보다 낫다고 여겨지는 상황에서 생기는 마음이고, 상대방의 잘난 지점이나 나은 상황이 소거되면 그 마음도 함께 사그라지게 된다. 즉, 질투대상의 '잘남'을 반드시 꺾어야만 사라지는 파괴적인 감정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내가 좋은 갈대(놀잇감)를 갖지 못했으면 너도 멀쩡한 것을 가져서는 안 돼.라는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두 번째, 정상범위를 넘어선 질투심을 빈번히 느끼고 그로 인해 상대방에게 상처 주는 행동을 자주 일삼는 사람은 많은 경우 강한 자기애성 성격의 '나르스시스트'라는 것이다. 나르스시스트는 타인의 장점 혹은 잘난 부분을 깎아내려는 사람이다. 서로가 잘되길 바라지 않는다. 타인을 끌어내려야 스스로가 돋보이고 잘나 보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진정 자기애가 건강하게 충족된 사람은 나도 잘되고 너도 잘되는 긍정적 상호작용을 할 것이다. 나르스시스트는 그렇지 않다. '내가 이겨야 하고 잘나기 위해서 당신은 늘 져야 하고, 나보다 못해야 돼'를 전제하며 정서적 협박을 일삼는 악인이란 걸 깨닫게 되었다. 자기애가 유독 충만한 사람을 분류하는 말 정도로 알았던 '나르스시스트'에 대해 인지하고 이런 류의 사람을 어떻게 대응하면 좋은지에 대해 학습하는 계기가 되었다.
어느 정신과 의사는 말한다. 질투와 시기심이 많은 이는 되려 불쌍한 사람이라고 말이다. 겉으로는 잘난척하며 스스로 돋보이는 말과 행동을 하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자존감이 무척 낮은 사람. 스스로가 못난 사람이고 무능력한 사람이라 여기는 비합리적인 자기 신념을 가진 불안도가 높은 사람. 자신의 가치를 격하하기 때문에 가지지 못한 것을 상대방이 가졌을 때 엄청난 질투력을 내뿜으며 본인과 타인의 자존감을 모두 갉아먹는 사람. 질투가 심한 자기애성 성격을 가진 나르스시스트를 조심해야 하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나르스시스트는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까? 여러 정신과 전문의, 심리상담가들의 입에서 나르스시스트를 상대하는 방법으로 무대응, 침묵, 손절 등의 단어들이 나오는 걸로 봐서는 그들과 정서적 교류를 하지 않는 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럴 수 없거나 매일 볼 수밖에 없는 관계로 묶여 있다면 무표정으로 무대응 하는 연습을 충분히 해서 그들과 감정을 최대한 섞지 않아야 할 것 같다. 정서적 흡혈귀로부터 스스로를 반드시 보호해야 한다. 여러 인간관계 경험을 통해 이런 류의 사람을 빠르게 알아보는 것도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된다.
질투는 인간의 본성이다. 그렇다면 나의 질투는 어떻게 다루면 좋을까? 조금 더 건강하게 다룰 수 있는 무언가를 생각해 본다. 질투라는 물이 담긴 1리터짜리 생수병을 몸에 지니고 살아가야 한다고 가정을 해보자. 누군가는 질투의 양이 100ml, 500ml, 990ml 제 각각 일터. 어떤 이는 용량을 초과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들이 바로 나르스시스트일 것이다. 적정량의 수분이 우리 몸에 존재해야만 건강을 유지할 수 있듯이 질투의 양도 적당량으로 조절됐을 때에 건강한 내가 될 수 있고 괜찮은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찾은 해답은 '부러움'이라는 감정친구를 가까이하는 것이다. 상대방이 나보다 나은 무언가가 있으면 그에게 부러움을 표하는 것은 어떨까. 내가 못할 바에 너도 그걸 잘해서는 안 돼가 아닌, 네가 잘하는 것을 배우고 나도 그렇게 잘하면 좋겠다는 부러운 마음을 시작점으로 잡는 것이다.
"어쩜 이 분야를 그렇게 잘 아세요?" 혹은 "너 진짜 대단하다 어떻게 하면 너처럼 할 수 있니? 비법이 뭐야?"라고 상냥하게 말을 건넬 것이다. 이런 대놓고 하는 부러운 표현이 어렵다면 속으로 질투를 한 다음에 이를 입밖으로는 내뱉지 않아 보는 것은 어떨까. 그렇게 삼켜져 배설되지 않은 질투를 스스로의 동력으로 삼아 더 나은 결과물로 세상에 선보이는 것은 어떨까.
상대방을 갉아먹는 질투가 아닌 상대도 돋보이고 나도 발전할 수 있는 부러움이라는 감정에 대한 인지가 필요한 듯하다. 좋은 관계를 많이 만들기보다 나쁜 관계를 내 관계 속에 넣지 않거나 잘 끊어내는 것이 그나마 괜찮은 인간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 비법은 아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