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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토리 Oct 16. 2024

대단함에 관한 새로운 정의

고대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는 10년간 이어진 트로이 전쟁 가운데 몇십 일간의 비극적 상황을 노래하고 있는 작품이다. 간략하게 줄거리를 이야기하자면 다음과 같다. 


트로이 전쟁 영웅 아킬레우스가 수장인 아가멤논과의 불화로 인해 어느 날 전쟁 출전을 거부한다. 위기 상황에서 아킬레우스의 절친인 파트로클로스가 본인이 그를 대신하여 전장에 나가게 해달라고 요청을 하고, 결국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입고 처절한 죽음을 맞이한다. 분노에 찬 아킬레우스는 상대편인 트로이 왕자 헥토르를 잔인하게 죽인 후 복수하듯 전차로 시체를 잔인하게 끌고 다닌다. 트로이 왕이자 헥토르의 아버지인 프리아모스가 아킬레우스를 직접 찾아가 손에 입을 맞추며 아들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시신을 돌려줄 것을 정중하게 요청한다. 이에 아킬레우스는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를 떠올리고 그와 함께 음식을 먹으며 죽은 이의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며칠간 전쟁을 중단키로 결정한다. 


『일리아드』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난다. 모두가 알고 있는 트로이 전쟁 그 이후의 이야기. 특히 오디세우스의 지략으로 트로이 목마를 만들어 트로이성을 함락시키고 그리스연합군이 승리하는 하이라이트중의 하이라이트는 쏙 빠져있다. 이에 대해 <알쓸신잡 3>에서 김영하 작가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일리아드』는 전쟁의 잔혹함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인간의 분노가 결국 인간성에 패배당하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잔혹함을 이기는 건 결국 인간성이라 해석했다. 그러면서 작가는 뭘 쓰는가도 중요하지만 뭘 안 쓰는가도 굉장히 중요한 능력이라고 덧붙인다. 비극을 전하는 이야기인 줄만 알았는데 비극이 아닌 인간성 승리라는 희망을 전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김영하 작가가 새삼 위대하게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10년간의 긴긴 이야기에서 작가의 의도를 선명하게 할 수 있도록 하이라이트 부분은 과감히 쓰지 않는 대문호의 글쓰기 전략이 놀라웠다. 


그러면서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는 나를 한번 돌아본다. 글의 개연성과 설득력을 갖기 위해 연대순으로 글을 불필요하게 성실하게 쓰기도 하고, 묘사하듯 글을 장황하게 늘어놓기도 한다. 때론 미천한 글쓰기 실력을 감추기 위해 미사여구를 마구 끌어 붙이기도 한다. 글을 신나게 쓰다가 문득 멈추어보면 처음에 하고자 하던 주제에서 이탈하여 키보드 위에서 손이 열심히 춤추고 있는 나를 마주하기도 한다. 과연 내가 말하려는 주제에 맞게 글을 쓰고 있는 것일까?를 떠올리면 여전히 물음표가 가득 차곤 한다. 글을 어떻게 하면 잘 쓸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만 매달렸지 어디에서 글을 멈출까? 하는 질문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최근 『내 아이를 위한 사교육은 없다』라는 책을 읽었다. 아이들 배움의 외주가 너무나 당연시된 요즈음 김현주 작가가 사교육 없이 아이를 과학고에 보냈다는 사실 하나로 이 책은 엄마들에게 핫한 책이기도 했다. 그녀의 특별한 교육 노하우를 기대한 자에게는 다소 실망스러울 수도 있을 법한 책일 수 도 있겠다. 그야말로 별것 없었다. 일상에서 아이와 대화를 많이 하고, 아이의 관심사를 늘 살피고 함께 해라. 무엇보다도 아이와 어릴 때부터 여행을 많이 다닌 것을 언급했다. 즉, 공부정서를 잘 키워준 엄마의 좋은 사례가 아닐까 싶었다. 아이와 여행을 많이 다녔고 이를 책으로도 냈다기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읽어보았다.  


『내 아이의 배낭여행』은 아이가 6살 무렵부터 세 식구가 함께 중동, 동남아시아, 유럽 등 최소한의 짐을 꾸려 다닌 배낭여행 기록이자 에세이이다. 아이가 어릴 땐 비행기를 타는 것만으로도 힘겨울 텐데 어떻게 이렇게 많은 나라들을 여행할 수 있었을까 하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이런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라 사교육 받지 않고도 과학고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일까 하며 읽는 내내 탄성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정말 대단하고 느낀 부분은 정작 따로 있었다. 여행을 사랑한 부부는 3년 일해서 생활비를 모으고 3년을 쉬며 여행하는 라이프 스타일을 갖고 있었다. 카페를 차려 자리를 잡고 안정적인 운영이 가능할 때즈음 단골손님에게 가게를 팔고 장기 배낭여행을 떠났다. 그러다가 생활비가 바닥나면 다시 3년 정도 온라인 쇼핑몰을 성실하게 운영하고 안정이 찾아올 즈음 또다시 세 식구는 배낭여행을 하러 먼 길을 떠났다. 


그녀는 말한다. 이렇게까지 여행 다니는 것은 아이와 남편과 평생 남을 깊은 추억을 위해 시간을 돈 주고 사는 것이라고. 인생 가치관을 세우고 커다란 무언가를 포기할 수 있는 용기에 대단함을 느꼈다. 부부 모두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사회에서 도태되는 시간이라고만 여기던 나로서는 선뜻할 수 없는 선택이다.  




어디선가 들은『부모의 인문학 수업』의 저자 김종원 작가의 한마디가 여운이 길게 남았다. "자존감 높은 아이는 너무 힘든 상황에서 포기할 줄 알아요." 버겁고 힘겨운 상황에서 마음이 다쳐가면서 무리하게 이어가지 않아도 된다고 여기는 아이의 높은 자존감은 어른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아이 엄마로서 포기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무엇인지도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또 아이에게 꼭 해주어야 한다는 무엇들 보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안 했을 때 어떤 커다란 선물을 받게 될 것만 같은 은밀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느 순간부터 사업하며 큰돈을 버는 주변인보다 스스로의 가치관을 세우고 돈만큼이나 중요한 무언가를 생각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대단해 보이기 시작했다. 김현주 작가가 가족과 함께 시간을 쌓은 것은 마음을 쌓은 것 아닐까. 그렇게 함께 쌓은 마음은 힘이 강해져 어떠한 인생의 눈보라가 불어와도 발로 굳건히 버틸 있는 힘이 생겼을 것이다. 3년 돈 벌기, 3년 여행하기 라이프 스타일을 지속해 온 그녀는 이제는 작가로서 자리 잡아 책도 여러 권 내고 강연도 다니고 본인이 원하는 삶을 더욱 잘 살게 된 것 같아 보인다. 시간을 돈으로 산 참된 결과인 듯싶다.  


나만의 국어사전에 '출중하게 뛰어나다' 형용사로서의 대단하다 뜻 옆에 괄호치고 이런 예시를 추가하고 싶어 진다. 그리고 이제 이러한 것들을 나는 대단하다고 여기기로 했다. 

작가로서 쓰지 않는 능력. 자신의 가치관에 입각하여 사회적으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과감히 포기할 줄 아는 능력. 버티기 힘겨운 상황에서 포기할 줄 아는 능력.


내 마음속 사전에 추가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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