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여행은 대체로 화려했다. 뭔가 특별한 것을 해야 할 것만 같은, 강행군을 해야만 여행인 것처럼 여겨지곤 했다. 보라카이 여행은 체력전이었다. 화이트 비치가 펼쳐진 바다에 넋을 놓다가도 인생샷을 남기겠다고 수도 없이 점프하며 기진맥진했다. 온몸이 맛있게 익어가는 줄도 모르고 액티비티도 즐기고, 낮보다 화사한 보라카이 밤바다 근처 클럽도 들락거리며 새벽까지 열정을 소모했다. 올라온 텐션에 매 끼마다 알코올중독자처럼 '레드홀스'를 몇 병씩 홀짝였다. 새벽 3시에 식당에 들어가 마늘볶음밥과 치킨을 시키고 테이블에서 엎어져 잠들어버리기도 했다. 이번 생에 다시는 보라카이를 안 올 거야! 하고 마음먹은 사람처럼 이곳에서 꼭 해야 한다는 주변인들 말을 기어코 잘 듣는 착한 사람이 곤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는 여행을 가더라도 무리하지 않는 여행을 선호하게 되었다. 20대 체력을 따라가기 어려워서가 가장 큰 이유일테지. 체력을 적절히 안배하고 휴식이 있는 여행. 음주로 하루를 마감하는 대신 깨끗이 씻고 책 몇 장 끄적이고 자는 일상의 루틴을 가져가는 여행. 여러 관광지를 다녀야 한다는 강박이 없는 여행이 점점 더 끌린다. 얼마 전 베트남으로 다낭, 호이안으로 휴가를 다녀왔다고 사람들에게 말하니 나에게 물었다.
"바나힐스, 미케비치, 안방비치 등등 갔다 왔어?"
"아이 있으니까 바구니배도 탔겠네."
"아니, 그런 곳은 안 갔는데요."
"그래?? 그럼 그런 곳 안 가고 뭐 했어?"
그런데 안 가고 뭐 했냐는 상대 질문에는 베트남까지 가서 꼭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왔다는 약간의 질책이 담겨있는 듯했다. 그나저나 유명 관광지를 가지 않으면 그 나라를 여행한 것이 아닌 걸까?
올해 베트남은 아이 낳고 처음 간 해외여행이었다. 먼저 베트남 일정이 있었던 짝꿍은 선발대로 출발, 나와 아이가 후발대로 출발했다. 누군가의 단독 보호자로 해외를 가는 건 처음인지라 설렘보다는 긴장감을 갖고 무사히 도착하기만을 바랐다.
숙소는 남호이안 빈펄리조트지만 다낭공항에서 가야 하므로 다낭 시내에서 반나절이상 시간을 보내고 늦은 시간 체크인을 하기로 했다. 마사지를 받고 문 닫을 시간이 임박해서 한시장을 다녀오니 이미 기진맥진했다. 정신을 다잡고 구글맵의 평점과 이용자리뷰를 보고 저녁 먹을 식당을 골라 찾아갔다. 음식들은 대체로 입맛에 맞았다. 식당을 둘러보니 관광객은 우리뿐이었다. '경기도 다낭시'답지 않게 한국어가 통하지 않았고, 메뉴판에서 한글은 찾을 수 없었다.
주변테이블을 보니 조부모, 부모, 자녀들이 모여 식사하는 테이블이 많았다. 여러 세대가 한대 섞여 식사하는 현지인들이 많아 생경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대가족 문화가 있는 나라는 어떨까 궁금증이 생기기도 했다. 그들이 먹는 음식이 궁금해 메뉴판에서 찾아보니 해물 전골 같은 음식을 가스불 위에서 직접 끓여 먹는 것이었다. 완전 내 스타일인데!라고 속으로 외치며 베트남 음식이 잘 맞을 것 같은 직감이 들었다. 우리는 식사 후 호이안으로 넘어가 체크인을 했다.
남은 일정은 대체로 비슷했다. 4일 연속 리조트에서 조식과 점심을 먹고, 수영장에서 물놀이를 하고, 해질 무렵 올드타운 가서 마사지 후 저녁 먹고 길거리를 거닐다 오는 것이 여행의 전부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20세기 이전에는 힘든 여행은 아랫사람을 시키고 지체가 높은 이들은 유람의 범위를 벗어나는 모험은 삼가 왔다. (중략) 프랑스의 철학자 피에르 바야르는 『여행하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하는 법』이라는 유쾌한 책에서 이런 여행을 '비(非) 여행' 혹은 '탈(脫) 여행'이라 불렀다. (중략) 다른 사람을 시켜 대신 여행하게 하고 자신이 나중에 그것을 재구성하는 데에는 어떤 이점이 있을까? 바야르에 의하면 그것은 '어떤 타자를 감수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여행했을 때에는 놓칠 수 있는 것을 타인을 통해 경험하는 것, 타인이 놓쳤을 어떤 것을 상상력을 동원해 복원하는 것. 이런 것들이 우리의 정신을 풍요롭게 만든다고 보았다.
- 김영하, 『여행의 이유』中
『여행의 이유』에서 김영하 작가가 출연한 <알쓸신잡> 여행 예능프로는 이중, 삼중으로 '탈여행'을 수행한 것이라고 말한다. tv를 보는 시청자는 영국 귀족이나 조선 양반들처럼 대리인을 여행시키는 것과 진배없고, 그들은 여행의 정수를 tv로 경험하게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여행 안내서와 여행에세이가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이유라고도 덧붙인다.
여행준비하면서 베트남에 관한 책들을 몇 권 읽었다. 베트남 역사와 관광지 정보가 가득 담긴 내용을 훑어보았다. 다녀와서 느낀 것이지만 이번 베트남여행은 어느 정도 '탈여행'을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물놀이와 휴식을 주된 활동으로 하고 유명 관광지 방문은 책을 통해 익히는 것. 타자가 제공하는 정확한 정보를 익히고 그곳의 역사를 살피는 것. 관광지를 직접 둘러보면야 좋지만 시간의 효용성을 따지며 생략했던 것이 '탈여행'의 비슷한 매락은 아닐는지 생각해 본다.
미국이 유일하게 패한 전쟁. 베트남전쟁에서 그들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 관광지 한 군데 들러 기념사진을 찍는 것보다 유의미한 것 아닐까. 그리고 몇 가지 사실들이 더욱 의미 있는 여행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들의 조상은 작은 덩치를 이용해서 지하 동굴을 만들어 숨어 지내며 전쟁을 치렀는데, 그 동굴 안에는 병원도 있을 정도로 작은 사회였다고 한다. 현지에서 만난 베트남 사람들의 인상과 일하는 방식을 살펴보며 끈기와 집요함이 상당한 민족임을 연관 지어 보는 것. '응우옌'성씨가 우리나라 김 씨만큼이나 흔해서 길거리에서 '응우옌'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볼 수 있다는 사실. 베트남이 남과 북으로 대립하면서 생긴 남북 경계선 지역이 다낭이었다는 사실. 호이안 올드타운에서 느꼈던 이국적인 건축양식이 일본, 중국, 프랑스 등 나라들과의 역사적 관계에서 비롯된 결과라는 사실이 그것이다.
화려했지만 보라카이 여행하면 '게리스 그릴'이라는 소박한 식당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오징어 꼬치가 입맛에 딱 맞아 여행기간 내 여러 번 갔던 곳이다. 여행지를 떠올리면 때로는 색으로 기억되는 경우도 있다. 보라카이는 짭조름하고 풍미 가득했던 오징어 맛에 휘황찬란한 석양의 기억이 덧대어져일까. 나에게는 짙은 푸른색과 보라색이 마블링된 그런 색으로 기억된다. 한 끼를 때우기 위한 음식이었음에도 시간이 한참 흐른 뒤 다양하고 멋진 것들을 압도하듯 먼저 기억되는 것은 먹는 먹는 행위가 단순 행위로만 그치는 것은 아닌듯하다.
베트남을 다녀온 후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저렴한 물가로 거침없이 시켰던 T본 스테이크, 외국인들이 좋아하는 화려한 세트메뉴 등 화려한 음식이 많았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베트남 여행하면 '닭죽'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레몬그라스가 들어가 특유의 향긋함이 있어서 더욱 맛이 좋았다. 익숙한 음식을 해외여행지에서 먹어서일까. 여러 번 찾아가 먹어서일까. 보통의 음식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짝꿍지인 중에 오사카 여행을 자주 가는 부부가 있다. 매번 같은 숙소로 갈 뿐 아니라 주로 다니는 식당들만 간다는 사실에 나는 매번 놀라곤 했다. 여행하는 동안 마주하는 위기 상황을 최소화하려는 그들의 보수적인 태도로만 여기곤 했다. 그런데 그런 여행이 주는 달콤함을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여행지의 낯섦과 익숙함이 공존하는 여행. 아는 맛이 주는 안정감이 있는 여행도 하나의 대단한 여행의 목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전혀 접해보지 않은 새로운 음식도 물론 맛있고 좋은 경험들이지만, 이번 여행을 통해 익숙한 식재료에 독특한 1~2개의 향신료로 변화를 주었을 때 나는 더욱 감동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온갖 새로움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나는 자꾸만 익숙한 무언가를 찾고 기억하고 싶은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사실 여행 가면 저명한 관광지를 모두 다니고 싶은 욕심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주어진 시간이 한정적인 것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순간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선택하고 어디에 집중해야 하는지 기준을 세워야 하는데 이번 여행을 통해 나만의 기준 같은 무언가를 조금은 찾은 느낌이 든다. 한 곳에 머무르며 같은 활동을 하고, 관광지 보다 내가 머무는 동네를 깊이 살펴보는 것, 일상의 루틴을 여행지에서도 이어가는 것, 익숙하지만 감동을 주는 음식을 여러 번 먹는 것도 나에게는 꽤나 근사한 여행으로 기억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