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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토리 Oct 02. 2024

일상을 여행처럼

아이의 유치원 방학은 5주이다. 네 살 처음 맞이한 방학은 멘붕으로 시작되었다. 집에서 쿠키도 만들어 먹고, 물감놀이, 물놀이도 실컷 하고, 네 친구들 내 친구들 번갈아 만나도 개학은 좀처럼 끝나지 않기에 한숨만 자꾸 새어 나오는 시기였다. 매 방학 때마다 한 달 OO살이도 떠올리지만 짝꿍 없이 아이만 데리고 떠나 혼자서 모든 걸 하는 게 좀처럼 용기 나지 않았다. 친구들과 함께 가는 것도 일정 맞추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어서 결과는 늘 '여행포기'였다. 게다가 미운 네 살과 애송이 엄마와의 콜라보는 방학 때 늘 절정을 맞이하곤 했다. 


역대급 폭염으로 기록될 2024년 여름, 또다시 방학이 시작되었다. 7번째 맞는 7살 방학에 또 한 번 아이와의 장기여행을 떠올리다가 또다시 고개를 세차게 휘저으며 내려놓았다. 다행히 올해 여름엔 베트남 여행을 계획해 놓았다. 그러나 1주일간은 여행하면 된다는 안도감이 잔여 방학에 대한 막막함을 해소해주진 못했다. 



꼭 멀리 가야만 여행일까? 


왜 방학마다 장기여행을 떠올리지? 여행을 통해 내가 얻고나 하는 건 뭘까? 꼭 멀리 가야만 여행일까? 막막함에 스스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이어가며 방학을 구상하던 중 마지막 질문에서 묘안이 하나 떠올랐다. 안 가본 곳이나 궁금한 곳을 여행지로 선택하는 나는 미지의 장소를 찾는 것은 분명했다. 그런데 어리석은 점을 발견했다. 한번 가본 곳을 여행지에서 곧 잘 제외시켰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일할 때 종종 갔던 경남 창원을 몇 번 가봤다는 이유만으로 여행지에서 늘 제외시키고, 과거 회사에서 여수로 워크숍을 다녀왔기에 여수는 안 가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한두 번 가보았던 지역을 내가 다 안다고 착각하는 심각한 자만심을 자각하는 순간이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랐지만
서울을 제대로 여행해 본 적이 있던가? 



어릴 적부터 늘 서울권에서 생활했지만 서울을 여행하는 마음으로 다녀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래! 이번 방학 콘셉트는 '일상을 여행처럼 보내기'이다. 게다가 서울 근교에 사는 아이에게는 그곳은 충분히 여행지로서의 의미가 있겠다 싶었다. 그리하여 아이와 가고자 하는 곳을 적고 매주 1~2군데 서울 당일치기 여행을 떠났다. 여행지는 서울이고 숙소는 우리 집이다!라는 마음으로 일상으로 여행을 떠났다. 




첫 여행지는 광화문이었다. 서대문구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나는 광화문은 수도 없이 다녔었다. 고2였던 2002년, 월드컵기간 다음날이 시험인데도 광화문에 나가 매일 응원했던 추억이 아득한 곳. 라섹수술한 병원도 광화문 근처인지라 정기검진하러 자주 오가던 곳. 광화문역 근처에서 소개팅하는 날 설레는 마음을 간직한 곳. 촛불시위를 하러 다녀온 곳이기도 하다.  


여행자 마인드로 다니기 위해 대중교통으로 다녀보기로 했다. 마을버스 타고 지하철 환승하여 1호선에서 한번 5호선에서 또 한 번 갈아탔다. 그런데 지하철을 타자마자 난관에 봉착했다. 아이가 서있기 싫다며 투정 부리다가 한마디 했다. 


"엄마, 왜 앉을자리가 없어!?"

"지하철은 자리가 없으면 손잡이 꼭 잡고 서서 가는 거야."

"싫어! 앉고 싶어! 어른들이 자리 양보해 주면 되잖아!"


순간 화도 나고 당황스러웠다. 자리양보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나이는 아닌 것 같은데 하며 이내 얼굴이 울그락푸르락 해졌다. 그러다 문득 얼마 전 아이와 잠자리에서 나눈 대화도 떠올랐다. 


"엄마는 아빠랑 결혼하기 전에 무슨 차였어?"

"엄마 그땐 차가 없었어.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다녔어"

"진짜? 어떻게 차가 없을 수가 있어? 믿을 수가 없는데!!"


믿을 수가 없다는 대답에 나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랐다. 졸린 나머지 놀랄 새도 없이 잠들었지만 광화문 가는 지하철 안에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너는 편한 세상에 태어나서 불편감이 전혀 없는 차만 늘 타고 다녔었구나. 과잉편리함과 친절함이 주는 부작용들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다. 정신을 다잡고 아이에게 단호히 이야기해 주었다. 


"네가 서있기 힘들 나이었으면 어른들이 양보해 주셨을 거야. 이제 넌 곧 학교를 갈 만큼 멋지게 컸기 때문에 자리가 없을 때에는 손잡이 잡고 서서 가야 하는 거야."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세상 모든 사람이 너에게 친절하지 않아."




여행이기에 발걸음이 닿는 곳을 향해 가면 그만이었다. 강렬한 햇빛이 무서워 우선은 지하철과 연결된 영풍문고 서점을 가기로 했다. 서점가는 길에 자그맣게 독도지킴이 홍보 전시실이 있었다. 독도와 울릉도를 지킨 안용복 장군과 신라 이사부 장군 이야기를 영상으로 보며 독도수호에 관한 이야기들을 접할 수 있었다. 아이는 흥미로워하면서도 일본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며 방명록에 비뚤지만 정성스레 이름을 적고 발걸음을 돌렸다. 


책을 사기 위해 광화문 서점을 가는 것과 여행하러 광화문을 갔다가 서점을 들르는 것은 사뭇 느낌이 달랐다. 목적 있는 방문은 해야 할 일을 했다는 체크박스에 표시한 성취감의 기분이라면, 목적 없는 방문은 어딜 염탐해 볼까 하는 호기심 가득한 설렘의 기분이랄까.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구석에 아빠다리 하고 앉아 그림책과 내 책들을 탐닉했다. 


평상시에는 먹거리에 다소 예민하게 신경 쓰는 엄마지만, 여행지에서는 다소 관대해진다. 이번여행도 예외는 아니었다. 건강함 보다는 그저 맛있게 먹을 수 있는 한 끼를 위해 찾아다녔다. 밥을 먹으니 햇볕아래 움직일 힘이 조금 났다. 청와대 자율주행버스가 있다고 해서 그리로 이동하기로 했다. 버스를 타기 위해 길을 건너야 하는데 건널목을 눈앞에 두고도 빙 둘러가는 바람에 땀이 속옷까지 흘러들어 가는 찝찝함이 더해졌다. 


버스 하차 후 자율주행버스 정류장을 찾아가야 하는데 지도 울렁증이 있는 나는 그 가까운 거리를 지도를 보고도 또 찾아 헤매느라 같은 길을 몇 번이나 왕복했는지 모르겠다. 아이는 더위에 약간 적응을 한 건지 정신을 놓은 건지, 엄마의 공간인지 무능함에 대해 별말은 안 했지만 뒷덜미에 땀이 똑똑똑 비 오듯 떨어지고 있었다. 애써 찾아간 정류장은 어이없게도 정말 코앞에 있었다. 버스도 10분 남짓 기다린 듯싶다. 버스 시스템 담당 직원분께서 말하시길 버스 상태가 좋지 않아 내일부터 정식운행을 한다며 안타까워하시며 자율주행센서 위치와 기능 등을 상세히 설명해 주셨다. 그래도 청와대 부근 한 바퀴를 돌았으니 다행이었다. 자율주행버스에서 내려 더위를 피해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잠시 더위를 피하기로 했다.  


박물관에서는  <노트르담 대성당 전시> 중이었다. 무료전시라 누구나 바로 입장이 가능해서 아이와 신나서 들어갔다. 일반전시가 아니 증강현실(AR) 전시로 개인에게 패드를 나눠주고 이를 들고 다니면서 QR코드를 스캔해서 펼쳐지는 노트르담 대성당에 관한 이야기를 보거나 듣는 것이었다. 불볕더위에 우연히 들른 곳에서 더위도 피하고 전시를 즐길 수 있어 좋았다. 어느덧 직장인들이 물밀듯 나올 시간이 되어 우린 부랴부랴 지하철 타고 버스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영어 'travel'이 '여행'이라는 의미로 처음 사용된 것은 14세기 무렵으로, 고대 프랑스어 단어인 'travail'에서 파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단어에는 현대의 우리가 '여행'하면 떠올리는 즐거움과 해방감이 거의 들어있지 않다. 노동과 수고, 고통 같은 의미들이 담겨 있을 뿐이다. 
  - 김영하, 『여행의 이유』中


이날 이후 우리 둘은 홍대, 혜화동, 압구정, 서울숲 등 서울 여러 곳을 여행자의 마음으로 대중교통을 타며 거닐었다. 집 나가면 고생이다라는 말은 언제나 진리였다. 여행으로 인한 힐링의 순간은 어쩌면 아주 잠깐일지도 모르겠다. 계획대로 이행되지 않아 시간이 통으로 날아가 버린다던지 혹은 그 지역이 전부 공사 중이거나 날씨가 최악이라 온전히 즐기지 못하는 상황들을 꽤나 자주 마주했던 것 같다. 


반면 모든 일에 반대급부가 있듯이 얻는 것도 있었다. 일상에서 하는 여행은 평소에 자각하지 못했던 것을 문득 깨닫게 해주는 뜻밖의 선물을 주기도 했다. 엄마로서 아이가 과잉 편안함과 친절함 속에서 놓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나에게도 아이에게도 여행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여행길 뚝딱거리는 고생을 통해 문제해결력과 순발력 레벨을 조금 더 키우는 것. 때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배우고 깨닫는 것. 시간이 한참 흐른 뒤 여행추억과 여러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내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이것이 나에게는 일상의 여행인 듯싶다. 여행자의 마음만 먹는다면 일상도 충분히 여행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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