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강원도 캠핑장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도보 1분 거리에 넓은 강이 펼쳐져 있는 곳이라 물놀이도 실컷 하며 여름 캠핑을 한껏 즐겼다. 시원한 물놀이를 끝내고 바베큐를 먹으며 무심결에 저녁 하늘을 바라보았는데 별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강원도에는 별이 잘 보일 줄 알았다며 대충 실망한 기색을 내비치고서는 다시 바베큐와 이야기삼매경에 빠졌다.
다음 날, 저녁에도 어김없이 주전부리와 맥주 한 캔을 홀짝이는 나에게 갑자기 짝꿍이 "이리 와봐 얼른." 하는 소리에 슬리퍼를 끌며 쫓아갔다. 조명이 없는 반대편 새까만 하늘에는 크고 작은 별들이 콕콕 박혀있었다. 검정 도화지에 하얗고 작은 모래알갱이를 마구 뿌려놓은 느낌. 불과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곳인데 밝은 조명이 빛나는 곳과는 전혀 다른 밤하늘의 모양새에 새삼 놀랐다. 저녁이 되면 환하게 켜지는 캠핑장 조명에 가려져 별빛은 보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캠핑장을 조금 벗어나 짙은 어둠과 마주했을 때 비로소 별이 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가장 빛나는 별을 보기 위해선 가장 깊은 어둠 속으로 걸어가야 한다. 그것이 가장 아름다운 별을 보는 방법이다. 가장 큰 희망은 가장 큰 절망에서부터 시작된다.
브런치 마음씀 작가님 글 <어둠에 대처하는 법>에서 발췌
기가 막힌 타이밍에 읽은 문장이다. 내가 애정하며 구독하는 마음씀 작가님 글의 첫 인용구이다. 작가님 글 보며 깊은 울림을 받곤 하는데 쏟아지는 별을 본 날 첫 문장이 나를 멈추게 만들었다. 아름다운 별을 보기 위해 불빛 하나 없는 곳으로 찾아가니 정말 별이 보였다. 절망 속에서 꽃 피우는 희망이란 이를 겪어본 사람만이 추후에 미소를 지으며 공감할 수 있는 말이라 생각된다. 경험하기 전엔 사실 크게 와닿지 않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희망을 얻기 위해 제 발로 어둠 속으로 들어갈리는 만무하지만 만약 의지와 관계없이 절망하며 괴로운 시절을 보내고 있는 이들이 있다면 인생에서 반짝이는 보석은 위기라고 생각하는 절망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감히 이야기해 주고 싶다. 그리고 어쩌면 절망의 무게가 커질수록 얻게 되는 보석의 중량도 늘어나게 될는지도 모른다.
아들 써니가 밖에서 목소리를 잃었을 때, 가장 먼저 생긴 감정은 '무서움'이었다. 엄마 아빠를 제외한 타인과 말을 하지 못한 다는 것은 '한 인간으로 제대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인생 전체를 뒤흔드는 걱정으로 번졌다. 그 당시 내 세상은 온통 어둠뿐이었다. 앞뒤가 꽉 막혀있는 어두운 터널 속에 갇힌 기분이었다. 탈출구의 빛조차 보이지 않았으니까.
선택적 함구증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일희일비하지 않고 아이를 기다려주는 것이 필요한데 온통 어둠뿐인 내 세상 안에서는 그게 쉽지 않았다. 무섭고 불안한 마음 때문에 말을 할 수 있게 뭔가 새로운 시도만 하고 있었을 뿐이다. 닦달, 협박, 회유, 강제, 부탁 등등 내가 할 수 있는 온갖 것들을 아이에게 쏟아붇기만했었다. 그야말로 발버둥이였고,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악화되는 상황으로 인해 좀 더 짙은 어둠의 시간이 흘러들어왔다. 짙은 어둠에서는 그야말로 세상과 차단된 느낌이었다. 그런데 큰 절망감에 빠지니 오히려 고요함이 찾아오면서 침착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죄책감을 조금은 떨쳐내고 내 아이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보게 되었고, 본질적인 부분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아득한 빛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빛을 찾는 여정은 당연한 것에 대한 감사함을 깊이 깨우치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먹고 자고 말하고 일하는 등 인간으로서 영위하는 기본값이 어쩌면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그 사실을 직시하니 많은 것이 바뀌었다. 내 아이는 앞을 잘 보고 잘 들으며 팔과 다리가 건강하게 태어났지만 누군가는 이것이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 다른 사람과 '발화'가 되지 않는 내 아이를 보며 감탄사라도 내뱉는 것이 큰 목표가 되어있는 나를 마주하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러면서 아이가 보여주는 사소한 모습들이 전부 감사함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모든 인생에 당연한 것은 결코 없었다.
이후 나는 본질적인 부분인 아이와 나의 '관계'에 집중하며 정서안정에 힘쓸 수도 있게 되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지금은 아이를 위해 무언가를 할 때가 아닌 하지 말아야 할 때였다는 것을. 오히려 걱정되는 아이의 행동이 아닌 나의 즐거움에 집중할 때라는 것도 함께 알게 되었다. 엄마의 정서가 곧 아이의 정서라는 말이 무엇인지를 몸과 마음으로 정면으로 마주하며 깨달았다.
엄마와 아이의 마음은 한 세트다. 그리고 바탕이 되는 엄마의 마음색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아이에게 아무리 화사한 하얀색으로 덧입혀 준다고 해도 기저에 숨은 어두운 엄마의 색으로 인해 아이는 어정쩡한 회색은 될지언정 진정한 하얀색은 될 수 없다. 엄마의 마음이 밝아져야 아이 마음도 밝아질 수 있는 것이다.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도 행복한 것임을 지독한 어둠 속에서 알게 되었다.
나에게 반짝이는 별은 보통의 어둠이 아닌 지독한 어둠 속에서 그 존재감을 나타냈다.
캠핑장에서 짝꿍이 별을 보며 나에게 한마디 건넸다.
"원래 밝은 곳에서는 별들이 안 보여"
대부분이 아는 말이다. 밝은 곳에서는 별이 잘 보이지 않는다. 밝은 곳에서는 오히려 반짝이는 별을 굳이 찾아보려 노력하지도 않는다. 보통의 하루에서 별다른 희망을 찾지 않듯. 사실 지금도 나는 희망을 찾을 필요가 없는 보통의 날을 늘 갈구한다. 인생이 그렇게만 흘러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앞으로도 절망과 위기는 언제고 불현듯 찾아올 것이 뻔하다. 하지만 절망에 빠졌다는 사실에만 집중하지 않고, 감정소모는 적게하며 그 속에서 나만의 반짝이는 별을 찾는 노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제는 알게 되었다. 어둠 속 나만의 별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그것만으로도 꽤나 성숙한 인생을 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위기의 순간에 얻은 교훈과 신념, 가치관 같은 것들은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강력한 삶의 동력으로 작용할 것이라 믿는다. 어떤 어둠이라도 희망의 별은 우주에서 늘 반짝이고 있다는 사실 하나가 이제는 꽤나 든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