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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피 지망생 Aug 08. 2022

내창 터진 날

숨은 제주를 발견하는 재주 2 - 우리 동네 하천 탐사

비가 내렸다. 그동안 제 할 일을 게을리한 게 미안했는지 하늘은 쉴 새 없이 비를 퍼부었다.


이런 날 우산장수만큼이나 바빠지는 곳이 하나 있는데, 제주의 하천이 그렇다. 제주도 하천의 대부분은 평소에는 말라있다가 비가 많이 내린 날에만 흐르는 건천이다. 때문에 비가 많이 내리는 날에만 이름값을 한다. 이런 날 동네 하천의 성난 얼굴을 구경하는 게 나의 소소한 기쁨이다.


제주도 사람들은 이렇게 폭우가 쏟아져 급류가 흐르는 하천을 가리켜 '내창 터졌다'라고 표현한다. 문자 그대로 내창('내'의 방언)이 빗물의 수요를 감당하지 못하고 터졌을 때 쓰는 말이다.


 전까지만 해도 이런 날엔 뒤도 보지 않고 엉또폭포를 찾았다. 엉또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소리를 듣고 있으면 내 모든 걱정과 불안이 저 하얀 포말처럼 가루가 되어 날아가는 듯했다. 자연에 압도 당해 나라는 존재가 대자연 앞에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이 들 때면, 그새 작아져버린 존재의 걱정거리는 더 작게만 느껴졌다. 그 부질없음이 좋았다.

언젠가부터 비가 쏟아진 다음 날엔 어김없이 렌터카가 몰렸다. 사람 많은 곳을 좋아하지 않는 나는 더 이상 엉또폭포를  찾지 않았다.

산간 지역에 70mm 이상 비가 내렸을 때만 폭포가 되는 '엉또 폭포'


대신 그동안 눈여겨 봐둔 '엉또폭포 주니어'들을 찾았다. 가는 이 없는, 매일 흐르지 않기에 이름조차 없는 그곳들을...

이 녀석은 작년 겨울에 도순천 하천을 바다부터 거슬러 오르는 트레킹 도중에 발견한 폭포인데, 쌍(?) 폭포다. 높이는 10미터쯤 된다.  


요 녀석은 진짜 이름이 '제2의 엉또폭포'다. 내가 지은 이름 아니고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더라. 



이 녀석들은 비가 와도 찾는 사람이 없 늘 외롭다. 비올 때만 폭포 구실을 하는 처지는 매한가지인데, 비가 와도 외로운 저들과 달리 비올 때마다 문전성시인 엉또폭포가 이들은 얼마나 얄미울까.

이외에도 내창 터진 날 함께 터지는 '이름 없는 폭포'가 몇 군데 더 있는데, 사진은 찍지 않았다. 생명은 소중하니까.



내창 터진 날보다 더 좋아하는 날이 있다.

'내창 터진 날 그다음 날 다음 날'

거대한 물폭탄이 세상의 불순물들을 한바탕 쓸어버리고 나면 깨끗하고 투명한 것들만 냇가에 남는다. 이곳은 다시 고인물이 될 때까지 '투명에 가까운 초록'  되고, 비로소 자연은 나와 아이들의 놀이터가 된다.

나의 1픽 폭포인 세로토닌 폭포
속괴. 내창 터진 다음 날
제2의 엉또 폭포. 내창 터진 다음날
 나의 1픽 수영장
작년 겨울에 발견한 블루홀. 물빛이 예사롭지 않다.
간만에 깨끗해진 남내소. 아마도 제주도 최대 규모의 소(沼)가 아닐까 싶다. 학교 운동장 절반 크기다 ㄷㄷ


거대한 자연에 압도되어 한낱 미물이 되었던 나는, 이제 비로소 자연의 일부가 되어 자연의 속살을 유영한다. 아주 자연(nature)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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