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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피 지망생 Aug 10. 2022

바람이 널 데려다 줄 거야

숨은 제주를 발견하는 재주 3  - 서핑 in 우도

"가야 할 때 가지 않으면 가려할 때 가지 못한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할배 버트 먼로(1899-1978, 영화 「세상에서 가장 빠른 인디언」의 실제 주인공)의 명언이 얼마나 인생에 찰떡같은 말인지 절로 수긍하게 되는 요즘이다.

평생을 '세상에서 가장 빠른 모터바이크 기록'에 도전했던 버트 먼로


한때는 겨울 서핑에 도전해가며 서핑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던 나였으 차니즘이 재발하여 바다 가는 날이 줄어들더니 이젠 딱히 파도를 그리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 말았다. 무엇보다도 최근 몇 년 새 급격히 바뀐 이 바닥의 바다 환경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여름에 파도 좋기로 유명한 중문해수욕장의 요즘 모습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파도 반 사람 반'이다. 라인업 갔다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게 되진 않을까 괜히 망설여진다. 사람 많은 장소가 질색인 나는 그렇게 서핑과 멀어져 간다.

한때는 보드를 타고 파도의 파이프라인을 통과하는 게 꿈이었더랬지.

아- 처음 서핑을 배웠 , 바다를 전세낸 듯 남 눈치 안보고 탈 수 있던 그때 초보 딱지를 뗐어야 했다. 잘타면 사람 많든 적든 큰 상관이 없다.


에휴, 누굴 탓하겠는가?가야 할 때 가지 않은 업보다. 그렇다고 이 바닥을 아예 떠난 건 아니다. 언젠가 스리랑카나 베트남한적한 서핑 포인트 가실력을 단기간 내에 업그레이드시킬 날 기다리고 있다. 선수가 즐비한 중문해수욕장 라업에서 최소한 교통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 서퍼는 될 수 있지 않을까?

아무튼, 서핑 참 어렵다.




막상 이렇게 되고 보니 서핑 보드가 애물단지다. 나같은 미니멀리스트가 큼지막한 보드를 소유만 하고 쓰지 않는 건  안될 일. 언제 다시 서핑 뽐뿌가 올지 모르니 팔지 못... 그러던 차에 기가 막힌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에게 서핑을 가르쳐주 되겠구나! 아이에 서핑만큼 쉽고 재미있는 놀이가 있을까 싶은 거다. (아이들은 체중이 덜 나가 서핑 보드에서 일어나 균형을 잡는  어른에 비해 훨씬 쉽다.)


의지와 열정의 상징. 한 팔 서퍼 '베써니 해밀턴'

그래, 이거다! 그렇다고 베써니 해밀턴(서핑 도중 상어에게 물려 한 팔을 잃었으나 피나는 노력으로 세계적인 선수가 된 서퍼. 그녀의 이야기를 영화화한 게 영화 「소울 서퍼」다)처럼 선수로 키우겠다는 건 아니고, 내 딸이 자연을 벗 삼아 자연친화적(?)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 이 소박하지만 장대한 꿈에 닿는 데에는 서핑만한 게 없다.


예전에 누구였더라. 어느 라디오 방송에서 게스트가 자기는 '노을 지는 태양을 갖고 수십 가지 놀이를 할 수 있다' 말하는 걸 보고 참 멋진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더랬다. 나도 내 딸이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자연만한 친구도 없다고, 이 친구는 품이 넓어서 네가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다 품어줄 테니 가까이 두라고, 자연이를 평생 친구로 소개해주고 싶 생각을 했다. 


밀물
썰물

며칠 후 처가가 있는 우도에 보드를 갖다 놓았다. 우도의 처갓집 앞에 이름 없는 바다가 있는데, 이곳은 간조에 모래가 바닥을 드러내는 틈을 타 잔잔한 파도가 친다. 


른이 탈 파도는 못되지만 딱 아이가 탈만한 파도 들어온다. 서핑은 파도가 나를 밀어주는 느낌이 들 때 패들(보드 위에 누워 양팔을 번갈아 젓는 동작)로 추진력을 더해야만 보드 위에서 일어서도 넘어지지 않는데, 초보들은 패들의 힘이나 요령이 부족하여 쉽게 고꾸라진다. 이때 강사가 보드를 뒤에서 슬쩍 밀어줘야 넘어지지 않고 일어설 수 있다. 그러다 어느 순간엔 누가 밀어주지 않아도 탈 수 있게 되는 것.

처음엔 다들 이렇게 서핑을 배운다. 자전거를 배울 때 처음엔 누군가가 자전거 뒤를 잡아주다가 라이더가 중심을 잡았다 싶을 때 살짝 놓아주는 것처럼.




호주에 잠깐 살 때 가장 부러웠던 건 오후 3시만 되면 보드 옆에 끼고 바다로 달려나가던 서퍼들이었다. '나도 당구를 처음 배울 때 저랬었지. 당구장만 가까워지면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졌었는데..'하며 그들을 흐뭇하게 바라봤던 기억이 있다.

어느 날엔 바다에서 아빠가 아이의 서핑 보드를 뒤에서 밀어주 모습을 봤다. 정말이지 그림 같은 장면이었다. 든든한 아빠의 지원을 등에 업은 아이의 해맑은 웃음, 그걸 바라보는 아빠의 뿌듯한 표정, 노을 지는 하늘, 때마침 뺨을 스치던 바람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부모의 역할을 그림 한 장으로 압축하면 딱 저 장면이 않을까?앞에서 이래라저래라 훈수 두지 않고 뒤에서 묵묵히 지켜보며, 딱 필요할 때쓰러지지 않을 정도의 힘만 보태주는 부모.


그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는 분명 자주적인 사람이 되어 최소한 자기 인생을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어른이 될 것이다, 인생이 한 편의 영화라면, '감독: 부모, 각본: 세상, 주연 : 주변인, 조연:나'인 영화가 아닌 '감독, 각본, 주연: 나'인 영화의 주인공으로 살아갈 테지.  흥행 여부와 상관없이 그런 영화는 분명 멋진 영화가  것이다.



저기 파도가 온다. 오랜 상상을 현실로 바꿀 기회가 온다.


"단비야, 저기 파도 보이지? 파도가 가까이 오면 뭔가가 보드를 밀어주는 느낌이 들 거야. 온 세상이 나를, 내가 원하는 곳으로 밀어주는 그런 느낌이지. 그런데 아직 단비는 서툴러서 파도를 타기엔 기술이 부족해. 그래서 아빠가 살짝 힘을 보태 보드를 밀어줄게. 바다에 빠지는 거 두려워하지 말고 이라고 생각하고 일어서 봐. 준비됐?

지금 오는 파도 타자. 아빠가 숫자 셋 세면 보드 위에서 일어나서 앞만 보는 거야. 알았지?"



온 세상이 힘을 모아 널 데려다 줄 거야. 네가 원하는 곳으로.

네가 원하는 곳에 닿았을 때, 널 데려다준 바람과 파도와 사람들의 응원과 너의 모험심에 감사하렴. 처음 보드 위에 섰을 때 아빠가 뒤에서 살짝 밀어줬다는 거 잊지 말고...

아빠는 그거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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