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먹고 잘 살아라-.
다른 사람과 다시는 안 볼 것처럼 헤어질 때 흔히 쓰는 표현이다. 역설적인 표현임을 모르는 이 없겠지만, 나쁘게 헤어지는 와중에 말로라도 상대의 안녕을 빌어주는 마음 씀씀이라니. 우리나라 특유의 정(情)을 새삼 느끼게 된다.
문득 잘 먹고 잘 산다는 게 어떤 삶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잘 먹는 것은 생존을 위한 필수조건이니 마땅히 빌어줘야 할 일이라 치자. 잘 산다는 건 도대체 어떤 삶을 말하는 것일까?
대답하기 어렵다고 당황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대부분 그렇게 커 왔다. 우리에게는 어떤 삶이 잘 사는 삶인지,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물어볼 여유가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누구이고,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지, 나는 무엇을 할 때 행복하고, 내가 바라는 삶은 어떤 삶인지 물어보기도 전에 타인(주로 부모님이나 주변 사람들)의 욕망에 의해 떠밀려 표류하다 보니 정작 나라는 존재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많다. 부모가 바라는 대학을 나와 모두가 부러워하는 번듯한 직장을 가졌는데도 정작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돌이켜보면 대학 시절, 가장 이해 안 가던 사람들이 ‘난 사실 다른 대학에 가고 싶었는데 부모님이 여기 오라고 해서 온 거야’라고 말하던 사람들이었다. 내 귀에는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아요’ 로 들려서 그들이 꽤나 안쓰러워 보였던 기억이 난다.
그런 의미에서 학생들의 생활 기록부의 진로희망조사부터 바꿀 필요가 있다. 생활기록부를 보면 ‘나의 장래희망’과 ‘부모님이 바라는 장래희망’ 칸이 분리되어 있다. 부모님이 바라는 장래희망 칸의 존재 이유는 뭘까? ‘부모님이 생각하는 너는 이런 직업이 잘 어울리니까 이런 직업을 가져보렴’의 의미라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가겠는데, 부모님이 바라는 장래희망 대부분이 판사, 변호사, 의사 등 몇 개 직업에 국한되는 걸 보면 그것도 아닌 듯하다. ‘난 이 대학에 오기 싫었는데 부모님 때문에 온 거야’ 라고 말하는 대학생들과 ‘부모님이 바라는 장래희망’ 칸 사이에는 분명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당신은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부자가 되고 싶어요’, ‘유명해지고 싶어요’,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싶어요’, ‘남들에게 존경받고 살고 싶어요’, ‘평범하게 살고 싶어요’, ‘사랑하는 사람과 오붓하게 살고 싶어요’ .......
이 모든 답은 사실 한 단어로 표현이 가능하다.
행복.
당신이 돈을 벌고 싶은 것도, 유명해지고 싶은 것도,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은 것도 결국 행복해지기 위함이다. 직업을 갖고 일을 하는 것도, 가족들과 아옹다옹 다투면서도 헤어지지 않고 알콩달콩 살아가는 것도 결국 행복해지기 위함이다. 당신은 지금 왜 내 글을 읽고 있는가? 아마도 ‘이 글에 나를 행복하게 해 주는 뭔가가 있지 않을까?’하는 일말의 기대감 때문이 아닌가? 만약 내 글에 재미를 느낀다면 글 읽는 재미를 통해 행복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다른 행복을 찾아 지금 백스페이스 버튼을 누르면 그만이다. 사실 내가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유도 행복해지기 위함이다. 글 쓰는 일이, 내가 쓴 글을 당신이 읽는 모습을 상상하는 일이 행복하지 않았다면, 나는 진작에 포기했을 것이다.
내가 아는 한, 행복을 바라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내가 언제 행복한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행복해지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결국 ‘당신은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요?’ 라는 질문은 ‘당신은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한가요?’ 와 같은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감이 일생일대의 숙제가 되어야 한다. 삶의 흔적을 되밟아가며 다행히 내가 행복하게 사는 방법은 어렴풋이 알게 된 한 사람으로서, 감히 행복하게 사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톨스토이의 명작 『안나카레리나』, 그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행복한 가정은 엇비슷한 이유로 행복하고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그 유명한 안나카레리나의 법칙이다. 도대체 행복한 가정을 행복하게 만드는 엇비슷한 이유란 게 뭘까. 나는 여기에 행복의 전제 조건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이 전제 조건을 충족하는 사람만이 행복으로 가는 문의 열쇠를 얻게 되며, 열쇠의 유무에 따라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이 나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내가 생각하는 행복의 전제조건은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다. 이는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 행복한 가정과 불행한 가정을 관찰할 때 나타나는 가장 큰 차이이기도 하다. 안나카레리나의 법칙에 빗대어보면 행복한 가정은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엇비슷한 이유로 행복을 느끼는 반면, 불행한 가정은 주어지지 않은 것에 불평하며 제각기 다른 불만으로 서로를 탓한다.
제아무리 좋은 환경에서 산다 해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행복할 수 없다. 눈앞에 멋진 풍경이 펼쳐져 있다고 상상해보자. 불행한 사람은 그 풍경을 보지 않고 창문에 낀 먼지를 본다. 행복한 사람은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감탄하며 그 풍경을 함께 바라보는 사람이 있음에, 지금 이 순간 그런 풍경을 바라볼 수 있음에 감사한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어도 행복한 사람은 자신이 행복한 이유를 찾고, 불행한 사람은 자신이 불행한 이유를 찾는다. 바로 그 차이가 행복과 불행의 차이를 만든다. 내게 주어진 게 많지 않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감사하는 마음은 지금 당장 행복해질 수 있는, 가장 쉽고 빠른 지름길이다.
물론 예외는 있다. 우리 주위만 보더라도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 바쁜 사람들이 많다. 이런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삶을 얘기해봐야 ‘가진 게 없는데 어떻게 주어진 것에 감사하느냐’는 대답만이 돌아올 것이다.
대학 시절,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의 삶이 궁금해 막노동(일용직 노동자)을 다녔던 적이 있다. 일당은 4만원이었다. 현장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일터에서 처음 만났던 형은 공사장 못에 발이 뚫렸는데도 병원에 가지 않았다. 병원비가 아까워서.
그때 그들이 없는 돈을 모아 술을 마시는 이유를 알게 됐다. 그들에게 희망과 같은 미래 가치는 사치일 뿐이었다. 당연히 행복이라는 단어도 사치였다. 그저 하루하루 ‘살아낼’ 뿐이었다.
그들에게 우리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삽시다 라고 말을 건네봐야 허망한 눈초리와 가시 돋친 말만 돌아올 것이다. 그래서 사회 안전망을 촘촘히 메우고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사회 구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 문제는 글의 성격상 뒤에 <나눔의 예술> 편에서 다루겠다. 당신이 내 책을 사는데 기꺼이 돈을 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한 사람은 아니리라는 전제 하에 이야기를 이어 가보자.
* '행복의 전제 조건 2'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