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딸이 태어나고 육아휴직을 신청했다. 둘째는 얼굴이 나를 똑 닮아서 보고 있으면 어린 시절의 나를 3인칭 시점에서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 어린 시절의 불안과 결핍을 물려주기 싫어서, 그 불안과 결핍이 어디서 나온 건지 알 수 없어서, 나는 다온이가 어두운 감정을 느끼지 못하도록 더 안아줬고, 더 자주 사랑한다고 말했다. 욕심이 컸는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일도 많았다. 하루 동안에도 소소한 기쁨, 가끔의 환희와 희열, 불안, 짜증 등 다양한 감정이 롤러코스터를 탄 듯 오르내렸다.
다온이(둘째 딸)는 그렇게 칭얼대다가도 낮잠 시간만 되면 큰 대(大) 자로 뻗어 잤다. 나도 옆에 대자로 뻗어 큰 대자 2개를 연결해주고 싶었으나 그래서는 안 됨을 경험을 통해 알았다. 이때 피곤하다고 같이 자버리면 나중에 해야 할 일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때문에, 다온이가 자는 동안 집안일 3종 세트 ‘설빨청(설거지, 빨래, 청소)’을 마무리하는 것으로 원칙을 정했다. 이 시간 동안 집안일을 가능한 빨리 마무리해야 짧으나마 내 자유 시간을 만들 수 있었고, '다온이를 얼마나 빨리 재울 수 있는가?'는 그날 나의 행복을 좌우할 일일(一日)일대의 문제가 됐다.
그날도 다온이를 재우려고 나란히 누웠다. 육아는 ‘이유 없이 지치는 날’과 ‘이유 없이 더 지치는 날’로 내 삶을 나눴다. 그 날은 ‘이유 없이 더 지치는 날’이었고, 갑자기 온몸이 나른해지는 기분이 들면서 뒷일 생각 않고 다온이를 재우며 같이 잠들고픈 강한 유혹을 느꼈다. 뒷일에 대한 걱정을 뒤로 미루면 꿀잠이 보장되는 상황.
나는 다온이의 눈을 보며 텔레파시를 보냈다.
‘제발 자라, 제발 자라, 제발 자라...’
평소에는 재우는 데 수십 분이 걸리던 다온이의 눈꺼풀이 서서히 내려앉았다. 따스한 햇살이 집안에 온기를 더해주고 있었고, 거실에서는 블루투스 스피커로 틀어놓은 검정치마의 ‘hollywood'가 무한 반복되고 있었다. 가뜩이나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노래가 BGM으로 흘러나오는 와중에, 나의 쌓인 피로 위로 길게 늘어진 햇살이 내려앉자 환각 상태에 빠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둘 다 이불채 하늘을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고, 다온이 울음소리에 깨어보니 어느새 2시간이 지나있었다. 다온이가 푹 쉬고 싶은 내 마음을 알았는지 한 번도 깨지 않은 것이다!! (깼는데 내가 못 들었는지도 모르겠지만, 글의 의도 전달을 위해 깨지 않은 것으로 하자^^)
여러 날을 내리 잔 듯한 개운함. 이제 막 잠에서 깬 다온이를 바라보니 언제 울었냐는 듯 온 세상이 환해지는 웃음을 선물한다.
그 순간, 나는 분명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선명하게 떠오르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의 기억이다. 그러고 보면 행복, 별거 아니다. 행복은 ‘일상 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행복을 잡아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마음’ 안에 있는 게 아닐까. 내가 놓친 확실한 행복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격한 운동을 마치고 돌아와 마시는 살얼음 뜬 맥주 첫 모금, 자전거로 오르막길을 힘겹게 오른 후 이어지는 내리막길에서 바람이 내 뺨을 스치는 기분, 무심코 켠 라디오에서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 나올 때 이 세상 누군가와 통했다는 느낌, 노을이 늘 비슷하게 지는 것 같아도 날마다 다르게 진다는 소소한 발견, 그 노을을 바라보며 느끼는 생의 의미, 아침에 일어나 시계를 봤는데 아직 새벽일 때 더 잘 수 있다는 기쁨, 함께 길을 걷다 잠시 어디 갔다 오겠다며 사라지더니 왔던 길을 돌아가 걸인에게 돈을 쥐여주던 형의 따스함, 버스를 타려고 나갔더니 버스가 마치 나를 기다렸다는 듯 다가올 때의 환희, 눈 쌓인 날 첫눈을 밟을 때의 보드라운 감촉, 감정의 부유물을 단번에 씻어내주는 좋은 책, 음악, 영화, 현관문을 들어설 때마다 한달음에 달려와 품에 안기는 딸과의 포옹...
다 쓰려면 책 한 권은 더 써야 할 것 같다. 하루하루 너무도 소중한 행복의 순간들이 스쳐 지나가는 데도 우리는 스쳐 가는 대로 보내버린다. 그 순간들을 잡아채 전해지는 감정을 오롯이 느낄 줄 아는 사람은 행복으로 가는 급행 티켓을 잡은 것과 같다. 소소한 일상의 행복들이 쌓이면 오늘이 행복해지고, 행복한 오늘이 쌓이면 행복한 삶이 된다.
내 삶이 불행하다고 느껴진다면 지금 당장 종이를 꺼내 작지만 확실한 행복들을 하나둘 써 내려 가보자. 우리가 행복보다 불행에 집중해서 그렇지, 스쳐 가는 행복들을 흘려보내서 그렇지, 행복은 늘 우리 곁에 있었다. 지금도 우리 곁에 있다.
행복의 공식
내가 생각하는 행복의 공식은 다음과 같다.
행복 = 내가 가진 것, 내가 이룬 것, 내가 해낼 것(잠재력, 희망) ÷ 내가 바라는 것
바라는 게 너무 많은 사람은 행복해지기 힘들다. 우리나라의 재벌들의 삶은 이 공식이 틀리지 않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우리보다 훨씬 많은 돈을 갖고 있지만 더 많이 가지려고 악다구니를 쓴다. 그러다 인생의 끝에 깨닫게 되겠지. 저 세상에는 그 돈들을 가져갈 수 없음을.
돈에 대한 끝없는 욕심은 행복의 공식에서 분자(내가 가진 것)가 아무리 크더라도 분모(내가 바라는 것)를 더 키워버리기 때문에 결국 행복의 크기를 줄인다.
반대로 주어진 것에 감사하면서 바라는 것이 적은 사람, 나에게 맞는 소소한 행복의 기쁨을 느낄 줄 아는 사람, 현실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분모의 크기를 줄여 행복의 크기를 무한대로 늘릴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자기가 뭘 할 때 행복한 지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바라는 것 중 해내는 것도 많다.
당신은 어디에 속하는가?
나부터 행복해져야 하는 이유
우리. 함께 행복해지자.
그러려면 먼저 나부터 행복해져야 한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쓸 마음의 여유 공간이 없다. 반대로 행복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행복을 나눠줄 수 있다.
내가 행복하다 느껴진다면 행복의 여유분, 그러니까 난 이만큼만 있어도 행복해지는 사람인데 그보다 더 가진 마음, 딱 그만큼만 타인에게 나눠주자.
우리, 그렇게 살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