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직업에 깊은 회의감이 밀려든 적이 있었다. 그 날 저녁, 아내에게 그동안 구상해 온 다른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더니 ‘애들 다 클 때까지만’ 참아달라고 했다. 당연하지요. 저도 그냥 푸념한 거였어요.
애들 제 앞가림할 때까지는 힘껏 달려봅시다. 인공위성도 정상 궤도에만 올려놓으면 제 알아서 돌아간다죠? 우리도 애들 다 크면, 애들만 정상 궤도로 진입시키면, 소풍을 떠납시다. 지금도 소풍이긴 하지만, 걱정과 불안 한 줌 없는, 시와 아름다움과 사랑과 낭만이 가득한 진짜 소풍을...
당신이라면 내 기꺼이 히피 공동체에 가입시켜 드리리다.
[글을 마무리하며]
프랑스의 철학자 라캉이 말했다.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어려운 말 같지만 어렵지 않다. 내가 원해서 한다고 생각하는 행동들 중 ‘사실은 내가 원하지 않은 건데 내가 원해서 하는 거라고 착각하는 행동’들이 있다. 그것은 타인의 가치관이 투영된 것일 수도, 미디어에 의한 세뇌일 수도, 다른 사람의 취향이나 가치관을 내 것으로 착각해 일어나는 일일 수도 있다.
이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어디까지가 진짜 나의 욕망이고 어디서부터 타인의 욕망’인지.
타인의 욕망과 나의 욕망만 구분할 줄 알아도 우리는 쉽게 행복에 닿을 수 있다. 이 사실을 30대 중반에 깨달은 후부터 인생의 바탕색이 바뀌었다. 그 위에 어떤 그림을 그려도 웬만하면 이쁘게 보이는 하늘색 파스텔 톤으로!
어느 날, 내 인생의 바탕색은 하늘색 파스텔 톤으로 바뀌었다
이 글을 읽는다고 당신 삶이 갑자기 바뀌진 않는다는 거, 나도 안다. 그러나 건방지게도, 의미 있는 변화를 가져오고 싶다.
나는 가진 건 별로 없지만, 이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이기에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고 믿는다.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는 게 얼마나 어려운일인지 누구보다 잘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꾸고픈 생각이 하나 있다.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행복의 크기는 커진다.’
이 생각만 바꿔도 대한민국은 지금보다 훨씬 행복한 나라가 될 거라고 확신한다. 단언컨대 저 문장이 사실이라면 우리 사는 세상은 이미 지옥이 됐을 것이고(가끔은 여기가 지옥인가 싶을 때도 있긴 하다), 나 같은 사람은 존재할 수 없다.
돈이 ‘어느 정도 있어야 행복해진다’는 인정한다. (이 ‘어느 정도’의 기준이 점점 높아진다는 게 또 문제다), 그러나 자산과 행복은 절대 정비례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재벌들을 보라. 재산을 둘러싼 ‘형제의 난’이 일어나지 않는 대기업이 몇 개나 될까?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행복하다면 그들이 제일 행복해야 하지 않은가?
실제 연구 결과도 있다. 연 소득이 2만 5천 달러일 때와 연 소득이 5만 달러일 때를 비교해보면 행복지수는 2배 상승하는 게 아니라 9퍼센트 상승한다고 한다. 연 소득7만 5천 달러가 넘어가면 행복지수에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난 진짜로 돈이 많으면 행복해지는 건가 궁금해서 바누아투(가난한 나라이지만 행복지수 1위에 올랐던 나라)를 다녀온 적도 있다. 그때의 느낌을 바탕으로 쓴 글의 제목은 '모든 인생은 훌륭하다'
바누아투를 다녀온 후, 나름의 연구(?)와 관찰을 통해 '돈이 어느 정도 있어야 행복에 닿기 쉬운 건 맞지만,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행복해지는 건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기 때문에, 돈은 '편리'이고 행복은 각자의 정체성에 맞는 뭔가를 할 때 나오는 '주관적 감정'이기 때문에, 인간은 타인의 욕망과 나의 욕망을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하면 A4 몇 쪽 분량은 나올 것 같아서 다음 기회로 넘기겠다)
내가 진심으로 원한다고, 갖고 싶다고 싶다고 느끼는 것 중 내가 진짜 원해서 갖고 싶은 게 얼마나 될까? 난 그 소유물이 갖고 싶은 걸까? '그 소유물을 갖고 싶은 나'가 갖고 싶은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정작 내가 갖고 싶은 것도 아닌데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으니 나도 갖고 싶어 지는 걸까? 이걸 가졌을 때 다른 사람이 나를 부러워하는 시선이 갖고 싶은 걸까? 내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소유물 밖에 없을까? 내 가치를 소유물로 증명해야 하는 사회라면 그 사회가 잘못된 건 아닐까?
어디까지가 '진짜 내 마음'일까? 타인의 욕망이 투영되지 않은 순도 100%짜리 진짜 내 마음.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작년, 대학교 후배로부터 편지 한 장을 받았다. 그 편지에는 “형이 쓴 글을 보고 삶을 바라보는 시야가 더 넓어졌어요”라는 내용의 글이 써져있었고, 5만 원짜리 지폐가 담겨 있었다.
“이 돈은 형이 기부하고 싶은 곳에 대신 기부해줘요”
이 편지를 받았을 때의 기분을 표현하기에 내 표현력이 부족하다. ‘황홀하다'는 표현이 아마 가장 가까울 거다. 내가 황홀했던 이유는 크게 2가지였다. 하나는 내 글이 누군가의 생각에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 또 하나는 이 후배는 내가 쓴 글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해줬다는 것. (후배랑 안 지는 20년 가까이 된다. 내가 쓴 글이 내 삶과 다르다고 느꼈다면, 즉 내 글이 거짓이라고 느꼈다면, 이런 편지는 쓰지 않았을 것이다.)
조금씩 바꿔나가면 된다. 서로가 서로를 힘들게 하는 세상이 아닌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그런 세상에서 살아보고 싶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는 노력의 총합이 세상을 더 힘든 쪽으로 몰아가려는 노력의 총합보다 큰 사회는 발전하고, 그때 역사는 진보한다고 나는 믿는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데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다.
그래서 언젠가 지금보다는 훨씬 살기 좋은 세상이 오면 딸에게 말해주고 싶다.
"너희 이름의 뜻이 뭔지 아니? 단비(첫째 딸)는 사막 같은 이 세상에 단비를 내리라는 뜻이야. 단비처럼 모두가 바라는 존재가 되라는 뜻도 있지. 다온(둘째 딸)은 단비가 내린 후에, 날씨가 추워지면 세상에 따뜻한 온기를 전하라는 뜻이야. 그럴 수 있지? 아빠는 너희한테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세상 물려주려고 나름의 최선을 다했단다. 이제 너희 차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