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히피 지망생 May 22. 2020

탐험하라, 꿈꾸라, 발견하라

카약


스쿠버다이빙을 하기 위해 범섬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출발하자마자 장난감처럼 생긴 작은 배 한 척이 레이더망에 잡혔다. 그 배에는 좌석이 2개 있었는데,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의 어린 아들이 앞에 타고 있었고, 어느 용감한 아버지께서 뒷좌석에 앉아 열심히 노를 젓고 계셨다. 법환 앞바다의 강한 파도를 헤쳐 나가기엔 배가 너무 작고 위태로워 보여서 한참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저런 위험한 물건을 바다에서 탈 생각을 하다니 저 아저씨 겁도 없다 일행에게 얘기했던 기억이 생생한데, 지금 내가 그 배를 타고 있으니 인생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놀랍게도 우리가 범섬에 도착하고 스쿠버 장비를 내리는 사이 조금 전 봤던 그 카약이 우리 옆을 유유히 지나갔다. 속도가 은근히 빠르다)


어렸을 때부터 좋은 집, 좋은 차는 못 가져도 작은 배 한 척 갖고 싶은 꿈이 있었다. 작은 통통배라도 하나 있으면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 때 바로 떠날 수 있는 '현대판 한량'이 될 수 있겠다, 하는 기분 좋은 꿈.


몇 년 전 범섬으로 향하던 길에 봤던 카약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요즘 해안가를 지나다 보면 카약 타는 사람이 많이 보이던데, 이거면 나도 ‘선주’가 될 수 있겠! 바로 인터넷에서 카약에 대한 정보를 검색했다. 다 좋은데 어디에 보관하고, 어떻게 운반하지?


다행히 세상은 내 걱정보다 훨씬 앞서있었다.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었던지 공기주입식 카약이란 게 있단다. 혼자 사기엔 살짝 부담되는 가격. 이럴 때마다 늘 찾는 친구에게 솔깃한 제안을 던졌다. 가격을 절반씩 부담하는 조건으로 공동 선주가 되지 않겠냐고. (이 카약은 싸구려답게 어느 날 물이 새기 시작하여 조천 앞바다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다. 지금은 이 녀석보다 좋은 모델을 중고로 사서 타고 있다. 이것도 친구랑 공동 구매했다. 이것이 바로 히피의 '공유와 연결' 정신!!)


나만큼이나 모험을 좋아해서 찬란한 모험의 역사를 함께 써왔던 친구는 질문으로 답을 대신했다.

“어디로 갈까?”     


유난히 더웠던 8월의 어느 날, 드디어 첫 출정식을 가졌다. 카약을 차에서 내리고 바람을 넣었더니 얼추 배의 모양이 나다. 삼양해수욕장에 배를 띄웠다. 따로 카약 기술을 배운 적은 없었고 전날 유튜브에서 눈으로 배운 게 다여서 사람들이 많은 연안에서 연습을 해보기로 했다. 배에 올라타 둘이서 어설프게 호흡을 맞춰 노를 저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잘 나간다! 바다는 그날따라 잔잔했고, 우리는 자신감이 넘쳤다. 급기야 친구가 나에게 한마디 던졌다.


“우리 이거 타고 섬에 갔다 오자.”

우리의 가장 큰 문제점은 끊어야 할 때 끊을 줄 모른다는 것이다. 그 후 벌어진 일은 우리에게 쓰디쓴 교훈을 남겼다. 철저한 준비만이 안전을 보장한다!     


배를 싣고 협재 해수욕장으로 이동했다. 목표는 비양도.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섬. 문제는 카약 타는 첫날, 섬을 찍고 와도 될 만한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카약을 탈 때는 반드시 구명조끼를 입어야 하는데 구명조끼조차 준비 안 된 상황이었고, 바다 한가운데에서 맞이할 수 있는 여러 문제에 대한 대비도 없었다. 마음만 급해서 그 와중에 비양도에 도착해서 사용할 스노클링 장비만 챙겼다. 협재 해수욕장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배를 만들고 거침없이 노를 젓기 시작했다. 해수욕장과 비양도의 가운데쯤 와서 이젠 돌아갈 수도 없는 그 지점에선 살짝 겁도 났지만, 어차피 돌아갈 수 없으니 앞으로 노를 젓는 수밖에. 30여분 만에 비양도 도착, 휴식과 스노클링.  


문제는 그다음에 발생했다. 출발지인 협재 해수욕장으로 되돌아가는데, 비양도에 올 때만큼 배가 잘 나가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분명 정면 방향으로 노를 젓는데, 옆으로 밀리는 느낌이 들었고, 제자리에서 노를 젓는 기분이었다. 체력이 떨어져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저 멀리 해수욕장에서 떠밀려온 튜브가 우리 옆을 스쳐 지나간다.


조류!! 바다 위에 냇가처럼 물길의 흐름이 보였고, 우리는 그 흐름 위에 있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태평양 어딘가로 떠밀려 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우리는 분명 협재 해수욕장 방향으로 노를 젓는데, 자꾸만 한림 쪽 방향으로 배가 밀렸다.     


그제야 전날 귓등으로 들었던 카약 조난 사고가 떠올랐다. 비양도를 향해 혼자 카약을 타고 가던 사람이 힘이 빠져 해양경찰에 조난 신고를 했다는 소식.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 사람은 왜 조난신고를 했을까 하는 주제로 웃으며 얘기를 나눴었는데, 이러다 우리가 조난당하게 생겼다. 우리 배의 직진을 방해하는 조류의 힘을 이겨내려면 더 빨리 노를 저어 일단 조류를 벗어나야 했다. 하나, 둘! 하나, 둘! 조류를 이기기 위한 필사의 몸부림! 누가 보면 카약 올림픽 대회 나간 줄 알았을 거다.


잡담을 멈추고 쉬는 시간 없이 앞만 보며 노를 저었다. 조금씩 배가 앞으로 나아가는 게 느껴졌다. 그제야 어제 있었던 조난 신고의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우리는 둘이서 힘을 합쳐 위기를 빠져나갈 수 있었지만, 혼자였다면 나라도 당황했을 것 같다. 돌아와서 카약을 해체하며 알게 된 사실인데, 카약에는 스캐그(카약의 직진성을 향상해주는 장치)도 달려있지 않았다. 빨리 카약을 타고 비양도에 가고 싶은 마음에 둘 다 스캐그 다는 것을 깜빡한 것이다. 어쩐지 배가 자꾸 좌우로 흔들린다 했다.


철저한 준비 없이 마음만 앞섰을 때 어떤 일이 생길 수 있는지 소중한 깨달음을 얻었다. 그날 이후 카약을 탈 때는 반드시 구명조끼를 착용하고 카약을 타면서 맞이할 수 있는 위기상황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한 후 카약을 탄다. (그리고 멀리는 안 나간다. 하하)




우리는 흔히 인생을 항해에 비유한다. 우리가 인생에서 겪게 될 수많은 선택의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이 나일 수밖에 없기에 카약을 타고 어느 방향으로 갈지 결정하는 사람도 나이고, 이후 일어나는 모든 일의 책임을 져야 하는 것도 결국 나이다. 파도나 조류처럼 앞으로 나아감을 방해하는 것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지만, 위기를 헤쳐 나가는 열쇠 또한 내 안에 있다. 노를 저어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결국 파도나 조류에 휩쓸리게 되는 것도 인생과 닮았다. 혼자 노를 저어서는 위기를 빠져나가기 힘들지만 함께 노를 젓는 사람이 있을 때는 위기를 빠져나오기 쉬운 것도 그렇다. 인생은 나라는 배를 타고 떠나는 항해와 다름없다.       


간혹 위험할 수도 있는데 카약을 왜 타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카약은 안전수칙만 잘 지키면 결코 위험한 레포츠가 아니다. 강이나 하천에서 즐기는 카약은 더욱 그렇다) 나에게는 우리가 죽을 수도 있는데 왜 사냐고 묻는 것처럼 들리는 이 질문에는 괴테의 명언으로 답변을 대신하고 싶다.     


배는 항구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지만, 그것이 배의 존재 이유는 아니다.”                                 

 - 괴테



이전 11화 자명종 대신 음악을 들으며 일어날 자유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