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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피 지망생 Jun 08. 2020

와 - 여름이다

바다의 계절

덫에 걸린 느낌이다.

떠나고 싶을 때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삶을 살고자 밴 라이프를 시작했는데 내가 바라는 모든 게 갖춰진 곳을 찾고 나니 이사(?)가 귀찮아졌다. 몇 군데 다른 장소를 물색해보긴 했는데 경치가 좋은 곳은 사람이 많고, 사람이 없는 곳은 차 세울 데가 마땅치 않더라. 밴 라이프의 최적지를 너무 일찍 찾아버린 게 되려 덫이 되어버린 셈이다. 소풍 가서 보물 찾기를 하는데 시작하자마자 보물을 찾아버린 느낌이랄까.


한 장소에 머문 지 오래되다 보니 생활 루틴도 일정해졌다.


퇴근 후 집 도착 - 책 읽기 - 저녁 식사 - 해 질 녘 산책 - 넷플릭스 보며 잠자기.


지금의 삶도 편하고 좋긴 하다. 내가 바라던 삶인 것도 맞다. 그런데 2% 부족한 이 느낌은 뭘까? 이러려고 밴 라이프를 시작한 게 아닌데... 당분간 장소를 바꿀 필요가 없다면 생활 패턴에라도 변화를 줘야겠다.


패들보드를 꺼냈다. 작년에 30만 원 주고 산 중고 패들보드. 이 패들보드로 말할 것 같으면, '미니멀리스트도 포기할 수 없으면 소유물' 세트의 마지막을 장식한 녀석이다. 내 안의 모험 DNA를 다시 깨워보기로 한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파도가 심상치 않다. 패들보드는 지금껏 딱 한번 타봤다. 초보가 오늘처럼 파도가 센 날 패들보드를 타는 건 빙판 위에서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는 격이다. 장소를 옮겨 파도 없는 곳에서 연습부터 하고 바다는 다음에 도전하기로 한다. 떠오르는 곳이 한 군데 있다.



다행히 아무도 없다. 패들보드에 공기를 주입한다. 혼자 하려니 너무 힘들다. 숨 헥헥거리며 15분 만에 공기 주입 완료! 배를 띄우고 노를 젓기 시작한다.


패들 보드 처음 탔던 날. 파도 없던 사계 바다. 2019


한량이 따로 없다. 유유자적. 안빈낙도, 자연과의 물아일체.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아직까진 한 번도 물에 빠지지 않았다. 두 번째 타는 것 치고 이 정도면 성공이다. 마지막 미션이 남았다. 배 위에서 뭍으로 올라 보드도 뭍으로 옮기기. 사진에는 잘 안 보이지만 물과 뭍 사이에 30-40cm 정도의 높이차가 있다.

보드 위에서 걸어서 이동하는 작전을 구상하고 혼자 흐뭇해한다 - 작전 실패 - 입수. 학교 다닐 때 물리학 공부 좀 제대로 할 걸 그랬다. 물 위에서 보드 위를 걸으면 당연히 제자리 걸음하게 되지. 에휴-

그래도 감은 잡았으니 다음엔 바다다!




다음 날 새벽, 이번엔 중문해수욕장 서핑 도전이다. 몇 년만의 서핑인가! 새벽 1시에 잤는데 3시에 눈이 절로 떠졌다. 설레긴 했나 보다. 다시 자긴 글렀다. 밖에 차 소리가 들린다. 설마... 창 밖을 보고 눈을 의심했다. 새벽 3시에 도착한 서퍼가 있다. 이 밤에 서핑을 하면 앞이 보이긴 할까? 바다를 혼자 차지한 듯한 느낌이 좋긴 하겠다. 4시 반쯤 되어 중문 해수욕장에 나갔더니 이미 바다 위에 떠 있는 서퍼가 2-30명은 되어 보였다.

서핑이란 처음 알게 된 8년 전만 해도 서퍼들이 별로 없었는데... 요즘 파도 있는 날 중문해수욕장을 보고 있노라면 여기가 해수욕장인가, 목욕탕인가 싶다.

요즘 중문해수욕장의 모습

몇 년 전 처음 배울 때 제대로 배워둘 걸 그랬다. 몇 년에 한 번 탈까 말까 하니 초보 신세를 못 벗어난다. 이렇게 안 느는 운동도 처음이다. 이제 여유가 되어 제대로 배워볼까 했더니 사람이 이렇게나 많다. 역시 사람은 가야 할 때 가야 한다. 다시 한번 버트 먼로 아저씨를 소환해야겠군.



가야 할 때 가지 않으면, 가려할 때 가지 못한다.

- 버트 먼로(1899-1977)


다시 시작해보려 한다. 언젠가는 서핑 보드를 패들보드처럼 타는 날도 오겠지. 그땐 비로소 켈리 슬레이터(역사상 최고의 서퍼로 손꼽히는 서퍼)의 명언을 빌려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서핑은 마피아 같은 거예요. 일단 들어오면 그걸로 끝입니다. 출구는 없어요."

- 켈리 슬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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