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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피 지망생 Jun 16. 2020

감각의 귀환

장마철 습도가 창이라면 긍정 마인드는 방패다

밴 라이프를 시작하고 살아난 게 있다면, 단연코 감각이다. 이젠 날씨와 기온을 귀와 피부가 먼저 알아차린다.


자세히 보면 사진 오른쪽 위에 내 집(하얀색 차)이 보인다


날씨는 귀가 먼저 느낀다. 내가 사는 곳 근처엔 시냇물이 흐르고 있어서 24시간 내내 시냇물 소리가 ASMR처럼 깔리는데, 소리가 평소보다 크게 들릴 때가 있다. 이런 날엔 창밖을 확인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 밖에 비가 내리고 있음을. 비가 오니 시냇물 수량이 늘어나 흐르는 소리가 크게 들리는 것이다.


시냇물은 끝내 바다를 만난다. 강물이 바다를 포기할 리가 없지.


그날의 날씨를 귀가 먼저 알아차린다면, 기온은 피부 몫이다. 콘크리트 집에 살면 보일러와 에어컨이 계절 감각을 앗아 계절 감각이 절로 무뎌진다. 여름에도 에어컨을 켜면 여름이 아닌 듯 살 수 있고, 겨울에도 보일러를 켜면 겨울이 아닌 듯 살 수 있으니까. 에어컨이 없는 캠핑카에서는 계절을 피부의 감각 세포가 먼저 느낀다.


요즘 들어 내 감각세포가 열일하는 걸 보니 여름이 다가오긴 하나보다. 덮고 있는 이불이 두껍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결국 얇은 이불로 교체했다. 이젠 덥지도 춥지도 않은 게 살만해지나 싶었더니, 복병이 등장했다.


장.마.

글자부터 습기를 잔뜩 머금은 이 녀석은 제주도에 사는 사람에게 공포의 대상이다. 유독 습했던 작년 여름, 습도가 생활에 미치는 악영향을 미리 체험한 나는 태풍을 앞둔 농부 마냥 장마철 대비에 여념이 없었다. 명색이 미니멀리스트인데 제습기라도 사야할 판이었다.

습도를 머금으면 주황색 실리카겔이 진회색으로 변한다


전기를 못쓰니 일반 제습기는 못쓰겠고 아쉬운 마음에 샤오미 휴대용 미니 제습기를 2개 샀다. 가성비로 유명한 샤오미 제품이라 가격이 싸고(2개에 35,000원 정도) 전기가 없어도 쓸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제습기 안에는 습기를 빨아들이는 실리카겔이 들어있는데, 습기를 많이 빨아들이면 주황색으로 표시된 실리카겔이 진회색으로 변한다. 이때 코드를 연결해서 열을 가하면 습기가 공기 중으로 날아가 다시 제습기로 쓸 수 있게 되는 원리다.

100-300번 정도 반영구적으로 쓸 수 있다는 게 마음에 들어 이 녀석으로 결정했다. 무엇보다도 플라스틱 쓰레기가 남지 않는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막상 휴대용 미니 제습기 2개를 놓고 보니 이로 장마철 습기를 버틸 수 있을까 싶은 거다. 3일이면 주황색 실리카겔이 진회색으로 변하는데 충전은 다른 곳(전기를 쓸 수 있는 곳)에서 해야 하다 보니 휴대용 미니 제습기 2개로는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하나 더 살까 하던 와중에 올해 장마가 '이틀 후' 시작된다는 뉴스를 접했다. 마음이 급해졌다. 미니 제습기를 하나 더 사기엔 한발 늦었다. 결국 생애 최초로 1회용 제습제 샀다.

(당연히 옥시에서 만든 '물먹는 하마'는 아니다. 옥시는 나의 불매 리스트 최상단에 위치한 회사다. 옥시 OUT)

내게는 '가능한 1회 용품 쓰지 않기'라는 철칙이 있는데 이번엔 별 수 없다. 습도 때문에 내 집을 사우나로 만들 수는 없으니.


얼마 전 플라스틱 쓰레기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봤는데 그나마 이런 종류의 플라스틱 쓰레기는 재활용이 가능하다고 했던 게 위안이라면 위안이다. 우리가 플라스틱 쓰레기로 버리는 플라스틱 중 재활용이 가능한 플라스틱 쓰레기는 10% 내외라나. 다큐멘터리를 보니 우리가 버리는 플라스틱 쓰레기를 수입하는 국가들이 죄다 개발도상국이라는 사실어찌나 미안하던지. 편리함을 누리는 사람 따로 있고 치우는 사람 따로 있는 현실에 나도 일조를 한 것 같아 마음이 쓰리다. 나의 플라스틱 쓰레기가 묻힐 땅이여, 1회용 제습제를 는 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니 용서해주길.


내 쓰레기가 묻힐 땅은 제3세계 어느 나라일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1회용 제습제까지 사가며 만반의 준비를 했는데, 제습제가 도무지 반응이 없는 거다. 제습제를 놓아두면 며칠 안에 바닥에 물이 고인다는데 내 제습제에는 물 한 방울 모이지 않았다. 이유가 뭘까?


연구 끝에 내린 결론. 

내 집이 좁아서 그렇다. 1.5평이니 제습제가 많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휴대용 제습기 2개면 충분했을 수도 있겠다. 지레 겁먹고 1회용 제습제를 괜히 산건 아닌가 싶다.


집이 좁으니 이런 때는 참 좋다. 집안 일로 인한 스트레스 제로. 설거지는 채식 위주로 먹으니 1분이면 끝나고 쓰레기도 거의 나오지 않는다. 청소는 30초면 끝난다.




내가봐도 난 참 긍정적이다. 그래서 밴 라이프에도 금세 적응한 것 같다. 습도, 더위, 추위 따위의 불편함이 창이라면, 긍정 마인드는 방패다. 아직까지는 창이 방패를 못 뚫고 있다. 앞으로도 긍정 마인드라는 방패가 뚫릴 일은 없을 것이다. 인터스텔라의 명대사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난 결국 답을 찾고야 말 테니까.



우린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 영화 [인터스텔라] 중




장마도 지나가리라. 그 다음 더위가 찾아오겠지만 더위 따위야... 내겐 산이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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