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름하는 수퇘지豭 불알까지 발라 똥통에 키워서는 이 부위 저 부위 불에 얹어 구워 먹고 삶아 먹는다.
한나 아렌트 저서 <악의 평범성>을 말하지 않아도, 산해진미 밥상 위에는 이미 차려진 마비가 엄연하다.
저항 없는 풀 나무야 응당 쓸거리 먹거리로 받아들였고, 문명이란 도륙은 마치 '인간 향락' 줄임말이 되지 않았는가?
인간人間은 특히 사이(間)를 두어 그 간격을 정보情報라든지, 호시와 탐탐의 이중(다중)성으로 채워 인간 방식으로 사냥하는 법을 터특했고. 이것이 가능하게 한 것이 역시 시간時間이었다, 이 찰나의 간극, 밥상 앞에서 교교한 입맛을 다시는 잠자리 눈이 아무리 많은 상像을 가졌더라도, 얻어 사는 주제 '나'는 제대로 된 '나'라는 상 하나 읽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