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히 가라앉는 여름 늦더위. 이제 해가 지면 제법 선선한 기운이 몰려든다. 밤중에 들린 꽃가게에는 꽃들이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가을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인 '단풍'과 '낙엽'은 분명 '꽃'과 거리가 있다. 잎이 물들고 낙엽이 쌓이는 와중에도 자연은 꽃을 피운다. 알록달록 다양한 빛깔의 국화를 비롯한 가을꽃들을 한동안 들여다본다. 진한 꽃향기 사이로 서늘한 가을내음이 느껴진다.
앞으로 한 달 정도 뒤면 주변 풍경은 단풍으로 물들기 시작할 것이다. 단풍으로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아래에서 나무를 올려다보니, 은행잎이 마치 노란 은행알처럼 작게 보인다. 가을 하늘 아래에서 나무가 한없이 높게 보인다. 바람이 일자, 고목을 타고 내려오는 노란 은행잎들. 하얀 구름이 나무를 포근하게 감싼다.
맑고 푸른 가을 하늘 아래에 서다. 천고마비의 계절이라는 말과 어울리는 풍경. 머리 위에는 일찍 물든 단풍잎이 손을 흔들고, 눈높이에는 예스러운 한옥의 기와가 걸려있다. 아직 단풍으로 물들지 않은 초록빛 나무들 사이에 울글불긋 단풍으로 물든 나무들이 섞여 있다. 시원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가을의 정취에 동화되었던 어느 가을날.
가쁜 숨을 내쉬며 교외를 달리던 어느 가을날. 해가 저물자, 하늘이 단풍으로 물든 것처럼 붉은 노을로 물들었다. 늦가을 단풍보다 붉게 느껴지던 저녁노을. 땅거미가 저물자, 주위의 사물은 모두 그림자가 된 것처럼 어둑하게 보였다. 지상의 색을 빨아드려 하늘의 팔레트에 흩뿌리던 찰나의 순간들. 가을날 자연이 벌인 불꽃축제는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저무는 꽃들 사이로 피어오르는 주홍빛 노을. 큰금계국, 금잔화, 코스모스 종류로 추정되는 들꽃. 빈 꽃봉오리들 사이에 맺힌 노을빛. 시들어가는 들꽃이 완전히 저물기 전, 온 힘을 다해 노을을 피운 것만 같았다. 풍경으로 받은 인상을 살려 사진으로 전달하고 싶었다. 그래서 선명한 사진을 뭉개고, 하늘을 물감이 번진 것처럼 편집해 꽃과 하늘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노래 앨범 커버로 사용한 가을 풍경. 노래의 제목은 '봄날의 캐롤'이다. 영화 '봄날은 간다(One Fine Spring Day, 2001)'를 보며, '봄에도 겨울을 노래할 수밖에 없는 사람은 어떠한 기분일까?'라는 생각이 들어 만든 곡이다. 사진을 보며 '가을에 피는 꽃들과 저물어 가는 노을', '가을에 지는 꽃들과 피어오르는 노을'처럼 상반된 느낌이 들었다.
사진을 보며 들었던 느낌이 노래와도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에 커버 이미지로 선택했다. 조악한 수준이지만, 감사하게도 다른 나라에 사는 친구들에게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이번 가을, 옛날에 만든 노래를 들으며 멋진 노을을 감상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