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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온 Dec 22. 2023

어린 날의 나쁜 날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있었던 일이다. 동네 골목에서 주름잡던 언니가 있었는데 건너편 집에 있는 언니의 시계를 훔치자고 제안했다. 무섭다고 했던 나에게 아무 일도 없을 거라며 다독인 언니는 결국 그 시계를 훔쳐 왔다. 나에게 맡기며 꼭 잘 갖고 있으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런 일에는 절대 휘말려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언니가 다시 날 괴롭힐까 봐 아무 말하지 못하고 그 시계를 침대 머리맡에 숨겨 두었다.


불안한 예감은 틀리지 않고 찾아온다. 시계 주인의 언니 엄마가 그 작은 골목에서 나를 불러낸 것이다. 창문으로 내려다본 골목에는 다른 동네 아이들이 가득했고 아줌마는 당장 나를 내려오라고 눈빛을 보내셨다. 우리 가족 중 아무도 날 따라서 내려가 주는 사람이 없었다.


역시나 그 언니는 나를 도둑으로 몰며 내가 저 시계를 훔쳤다고 나를 몰아가기 시작했다. 아줌마는 이미 아이들의 선동에 나를 범죄자 취급하며 혼을 내셨다. 억울했지만 그 상황을 빠져나갈 구멍은 없었다. 뒤를 돌아 집 창문을 바라보니 큰언니와 엄마가 팔짱을 끼고 나를 내려다보던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인생에서 내편은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나는 8살 때 알아버렸다.


집에 어떻게 올라왔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언니들 방에 들어가 국어책을 펼쳐 공부하는 척하며 이를 바득바득 갈며 울었다. 역시나 아무도 나에게 관심은 없었다. 그날의 날씨, 그 아줌마의 눈빛과 엄마와 언니의 모습 같은 것들이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히 기억이 난다.


밤마다 그날로 돌아가면 이젠 억울함 보단 외로움에 사무친다. 아무도 내 얘기를 들어주지 않았다는 사실이 8살 여자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버거운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이야,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누가 널 억울하게 만든 거니?

다음부터는 그러면 안 되는 거란다.


이런 얘기를 들었다면 그날은 더 이상 나쁜 날이 되지 않았을까? 이제야 그 아이에게 말해본다.

많이 놀랐지? 너무 걱정하지 마. 이제 나와서 밥 먹자. 너 억울한 거 내가 다 알아. 그러니까 괜찮아. 다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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