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점을 찍는 1시간, 점심 혼자 먹는 남자 (12)
어떤 사람의 정체성이 하나라면,
그 하나가 무너지는 순간
끝까지 추락할 수 있다.
<이상적인 현실주의자> vs <현실적인 이상주의자>. 나는 지금껏 전자를 택했다. 이상적인 현실주의자의 방점은 "현실"에 있다. 장점은 현실이 커질수록, 현실적인 선택을 하면서도, 내 현실과 시야의 크기를 점점 넓혀나가면 이상의 크기도 넓힐 수 있다는 것. 반면, <현실적인 이상주의자>의 방점은 "이상"에 찍힌다. 이상은 내려올 수 없다. 이상은 무조건 우상향이다. 현실적인 이상주의자는 모순적이다. 이상의 방향은 변경될 수 없는데 현실과 타협하려다 보니 자신과 계속 싸우게 된다. 현실은 나를 짓누르는데 이상은 내려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상적인 현실주의자의 정체성은 가치관의 지향점을 현실의 틀에 맞춰가며 이상의 크기를 늘려간다. 브런치 작가들이 대표적인 <이상적인 현실주의자>들의 전형 아닐까? 허나 아직 스스로를 "작가"로 칭하기 민망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민망함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브런치 작가는 <이상적인 현실주의자>를 지향해야 하는데, 스스로를 <현실적인 이상주의자>로 착각하여 본인의 작가여도 작가라고 부르기 민망하다고 느끼는 것은 아닐까.
여러 겹의 정체성을 갖고 살고 있다. 브런치 작가와 컨설턴트 그리고 직장인. (물론 지금 당장은 직장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절대적이다) 그럼에도 8년째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과 타인을 성장시키고 미래에 빛을 보도록 코칭하여 좋은 결과까지 이끌어내는 컨설턴트로서의 삶이 누적되며 새로운 정체성이 되었다. 설령 직장인으로서 무너지는 순간이 찾아와도 두렵지 않다. 타인을 이롭게 하는 일에서 정체성을 찾게 되는 순간, 나는 무너질 수 없다. 왜냐하면 나라는 존재는 언젠가 사라지지만 타인은 절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타인을 위한 나로 살다 보면, 타인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친절이 중요하다. 물론 불친절이 선행되면 가차 없다. 착한 사람에겐 한 없이 더 착해지고 싶고, 나쁜 놈에게는 그놈보다 더 나쁜 놈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나를 단단하게 만든다. (근데, 이걸 왜 밥 먹으면서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멘탈이 아니라 밥알만 단단해진 건 착각일까?)
타인을 이롭게 하는 일에서
정체성을 찾게 되는 순간
나는 무너질 수 없다.
물론 타인을 위해 사는 삶은 어렵다. 타인은 본능적으로 비교의 대상이 되기 때문. 허나 실망할 필요는 없다. 잘난 사람을 보면 배우려고 하면 된다. <이상적인 현실주의자>들은 무슨 말인지 알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건 "내가 맞다"가 아니다. 그 상황에 맞는 걸 찾는 것이 중요하다. 나의 이상으로 도달하기 위한 파도에 올라타는 게 중요한 것이다.
밥알을 곱씹는다. 둥그런 마음의 구를 돌려보듯, 입안에서 밥알을 혀로 굴린다. 모든 인간은 둥그런 공을 품고 산다. 머릿속에서 내 마음의 구(球)를 관찰한다. 누구나 상황에 맞는 면을 선택한다. 누군가는 체면을 택하거나 외면을 선택한다. 그 이면에 무엇이 존재하는지는 알 수는 없는 노릇. 다만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고통을 보고자 노력한다. <이상적인 현실주의자> 든 <현실적인 이상주의자>든 지금 이 순간을 마주하기까지 보이지 않는 슬픔과 아픔이 있으리.
밥알을 너무 굴리다가 혀를 깨문다. 맞은편에 엄마가 있었다면 먹는 것 가지고 장난치지 말라고 한 소리 들었으리라. 이제는 그 한 소리, 그 잔소리가 그리워서 혼자 한잔 해도 되는 나이가 되었다. 이럴 때면 나는 영락없이 <현실적인 이상주의자>가 된다. 더 이상 그 시절이 되돌아올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엄마가 잘라준 수박을 게걸스럽게 먹고 나서 수박씨를 총알 삼아 동네 친구들과 놀던 그 녀석이 되기에는 수박은 더 이상 수박이 아니고 "전해질" 보충에 탁월한 영양 공급원으로서 존재한다.
지금처럼 무더웠던 여름날에는 무알콜 맥주를 마시며 일하고 싶다. 칼스버그를 마시며 대학교 수업을 들었던 덴마크 교환학생 시절. 2017년 8월, 덴마크 오르후스 대학교에서는 몇몇 강의 시간에 맥주 마시는 게 허용되었다. Carlsberg, Tuborg, Sombersby와 같이 자국 브랜드에만 허용되었던 관대함이 그리워 편의점에서 4캔을 집는다. 이상과 현실의 공백을 잇는 건 결코 멀리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