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이 생겼다는 기쁨에 벽지를 고르고 창틀을 닦아내며 마냥 들떠 있었다. 불길한 마음에 무엇엔가 홀리듯 이 집에 왔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처음 집을 보러 갔을 때 느꼈던 알 수 없는 섬뜩함은 기억에서 아주 사라져 버린 듯했다.
집을 쓸고 닦고 치우면서 누렇던 벽지와 찢긴 장판은 새로 하기로 했는데, 왜 그런지 내 취향과는 거리가 먼 삼류 방석집에나 쓸 커다란 붉은 장미가 그려진 검은색 벽지가 자꾸 눈에 들어왔다. 평소 파스텔톤의 은은한 색상을 좋아하던 내가, 그땐 대체 왜 그 검은 벽지를 그것도 집의 중심인 거실에 도배했었는지 지금 스스로도 변명이 불가한 일이다.
‘누가 집 안 거실을 검은색으로 꾸미냐?’
지인들이 그렇게도 말렸는데 도저히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설명할 길이 없다.그저 그 어두운 색의 벽지가 계속 끌렸다는 것 밖에 기억에 없다.
당시 우리 아들은 네살이었는데, 처음으로 장난감과 책 그리고 원목의 2층 침대가 있는 자기 방이 생긴 것에 아이도 신이 나 있었다. 아이는 키즈카페처럼 꾸며준 공간이 자기 방이라는 사실에 너무 좋아하면서 방에서 나올생각도하지 않았다.
그간 아들은 늘 우리 부부와 한 방에서 잠을 잤었는데, 이사 와서 일주일쯤 지나니까 자기 방에 애착이 생겼는지 내가 자기 방에서 자야 한다고 말하기도 전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엄마! 나 2층침대에서 자면 안 돼?"
"안 되긴? 거긴 가람이 방인데, 당연히 되지!"
"야호! 신난다."
나는 나름 침대에서 혼자 잠자는 연습을 어떻게 시켜야 하나 고민했었는데, 제 스스로 침대에서 자고 싶다고 하니, 일이 쉽게 풀리겠다! 싶어 웬 떡이냐? 하는 심정이었다.
나는 아들과 잘 준비를 하고 함께 2층 침대에 누워 동화책을 읽어주었다. 아들의 머리맡엔 작은 무드등과 책들이 있었는데, 자기 전 늘 동화책을 읽어달라는 아들을 위해 마련해 둔 공간이었다.
나는 어떤 구연동화가 보다 더 멋지고 실감 나게 아들에게 "빵 사러 가요" 책을 읽어주었다. 아늘은 이사하며 집 옆에 있는 어린이집으로 옮겨서 친구들과 신나게 놀고 키즈카페처럼 꾸며놓은 집에서 또 정신없이 놀아서인지 금세 잠이 들었다. 나는 아들이 책 보다 더 좋아하는 음악 CD를 조용히 틀어놓고 행여 자다가 굴러 떨어지지 않게 2층 침대의 난간을 올렸다.
그렇게 아들이 잠든 사이 남편과 나는 술 한잔하고 이사와 집안 정리로 바빴던 일주일을 보상받 듯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었다.
한참을 달게 자는데, 발 밑에 뭔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잠에 취해서 '뭘까? 발 끝에 대체 누가 있는 거지?' 느끼며 '꿈인가?' 하는데, 훌쩍거리는 소리가 났다. 깜짝 놀라 일어나 보니 아들이 2층에서 혼자 어떻게 내려왔는지 애착베개를 끌어안고 울고 있는 것이었다.
"아이고, 아들 깼어? 엄마 없어서 놀랬어? 이리 와!"
나는 두 팔을 벌렸고, 아들은 쪼르르 다가와 안겼다. 그리고는 나에게 물었다.
"엄마! 저기 내 방이지? 그지?"
"그럼, 우리 가람이 방 맞지! 근데, 왜?"
"그것 봐! 엄마가 내 방이래잖아!"
아들은 안방의 열린문을 넘어 자기 방 문을 향해 들으라는 듯 말했다. 나는 갑자기 등골이 오싹하면서 집을 보러 왔던 그날 짐승의 눈 같던 두 눈이 떠올랐다.
다음날 나는 아들에게 물었다.
"가람이 어제 왜 자다가 엄마한테 왔어? 무서운 꿈 꿨어?"
"아니, 자는데 할머니가 자꾸 나보고 나가라고 그랬어! 내 방인데, 할머니가 자꾸 자기 방 이래! 내 방이지? 엄마?"
난 갑자기 웬 할머니 타령인가? 시어머님을 말하는 건가 싶어서
"가람이 할머니 꿈꿨어?"
"아니이~ 방학동 할머니 말고, 내 방에 할머니가 자기 방이라고 그래~ 자꾸"
나는 얘가 갑자기 무슨 소린가 싶기만 했다. 그날 저녁. 낮엔 자기 방에서 신나게 놀고 장난감 정리도 잘해 둔 아들이 어제와는 달리 잠자러 들어갈 생각을 안 하고 거실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 나는 별생각 없이 아이를 2층 침대에 눕혔고, 나도 정리 후 안방에서 잠이 들었다.
자다가 새벽에 인기척에 깨보니아들이 또 내 발치에 서서 훌쩍이며 말했다.
“엄마랑 잘래.”
나는 일단 아이를 안아주고 말했다.
“이제 가람이도 형아 되려면 씩씩하게 혼자서 잘 줄도 알아야 해”
"근데, 할머니가 자꾸 나가라고 그러잖아! 자꾸 자기 방 이래! 내방이라고 그랬는데도 침대를 막 흔들었어! 무서운 눈으로 나가라고 그랬어! 할머니 미워! 내방인데..."
아들은 못내 자기 방에서 쫓겨난게 서러운지 엉엉 울었다.나는 아이의 말이 단순히 꿈에 본 할머니를 얘기하는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람아! 방학동 할머니도 아니면 새 할머니(나는 새엄마를 외할머니라고 안 하고 이렇게 말했다)야? 어떻게 생겼어? 그 할머니?"
"머리는 방학동 할머니처럼 꼬불꼬불한데 방학동 할머니보다 더더 할머니야! 하얀색 윗도리에다가 방학동 할머니 입은 꽃바지(몸배) 입었는데, 조금 더러운 거 같아! 근데, 할머니가 자꾸 배고파~ 배고파~ 그랬어. 밥 안 먹었나 봐!"
나는 아이가 설명하는 할머니의 모습은 네 살 아이의 상상력안에서 창작해 내긴 힘든 모습이라는 생각에 정말 뭔가를 본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다시 무서운 생각에 머리가 쭈뼛 섰다.
나는 설마 설마 하며 아들에게 계속
"방학동 할머니가 보고 싶어 꿈에 나왔나 봐!"
"아니, 방학동 할머니가 아니고 저 방에 계속 있는 할머니라니까? 엄마는 왜 자꾸자꾸 내가 말하는데도 몰라?"
내가 자꾸 확인하며 같은 말을 하자, 그 조그만 녀석이 답답한지 화를 냈다. 자기 방에서 잠은 안 잤지만, 저녁에 놀 때 보면 애가 누구랑 얘길 하는지 종알종알 떠들면서 놀았다.
"여기 내 방이라고 엄마가 그랬거든!"
"그거 내 거야! 만지지 마!"
"이거 먹을래요? 배고파요?"
나는 아들이 그러고 놀고 있는 게 더 소름 끼치고 무서웠다. 급기야 나는 아이를 재워놓고 혼자 아이방에서 자 보기로 했다. 하지만, 나는 되려 아침까지 깨지도 않고 아주 푹 잠을 잤다. 그래서 성당을 찾아가 신부님께 말씀을 드리고 성수를 받아 왔다. 아들이 보는 앞에서 침대 주위에 성수를 뿌리고 기도를 하고 이제 할머니 안 오실 거라고 말하고 아이를 재웠다. 그날 밤, 아이는 별 탈 없이 잠들었다. 다행이다 싶었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며칠 뒤, 아들은 또 자다 깨서 내 방을 찾아와 할머니가 자신을 쫓아냈다고 말했다.
이번엔 남편에게 잠을 자 보라고 했다. 남편은 뭘 보지는 않았는데 그 방 이상하게 답답하다며 다시는 그 방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결국 아들은 그 뒤로 자기 방에서 자지 않았다. 어느 날인가 아들은 자기 방 앞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나는 소파에 누워 티브이를 보다 깜빡 졸았다. 잠결에 아들이 누군가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간신히 눈을 뜬 내게 아들이 다가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할머니가 아저씨를 화내면서 쫓아냈어… 엄마깨면 안 된다고 쫓아낸 건데....”
해가 바뀌어 다섯 살이 되었다고 해도 아직 어린 아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고는 믿기 힘든 이야기들이었다.
작가의 말
당시에 남편은 거의 매일 안 들어왔었어요.
야간작업을 한다고 했는데, 사실은 애인을 만나고 있었지요. 그러다 보니 아들과 둘이 참 무서울만했는데, 희한하게 그 집에 살면서는 이상하다 싶기만 하고, 의문을 갖고 있다가 또 그러다 말고 그랬어요.지금 생각 같으면 애 데리고 당장 뛰쳐나왔을 텐데... 그땐 설명하기도 이해하기도 힘든 제 생각과 행동들이 참 많았답니다.
나중에 남편 말로는 집 앞에 서면 숨이 턱 막히는 게 진짜 들어가기 싫고 피곤한 집이었다고 하더라고요. 처음엔 그 말이 고깝게 들리기만 해서 '그렇겠지! 애인 만나고 들어오려니 오죽 싫겠어!' 이렇게만 받아들였는데, 제가 모르는 척하느라 자세히 묻지를 않아서 그렇지,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뜻이 아니라 진짜 그 집이 숨 막힌다는 얘기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도 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