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입자 문제를 신경 쓰지 않게 되었으나, 나는 반쯤 정신이 나간 삶을 살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내 생에 나 스스로가 제일 안쓰럽던 방황의 시절 2(방황의 시절 1은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였는데, 대학 선배며, 동기며, 친구들에 동네 언니들까지 매일 술을 마시며 신세 한탄하고, 남편 원망하며, 아들을 그리워하다가 대성통곡을 해 대는 내 술주정을 받아주다 다들 등을 돌렸다. 나는 그럼에도 살아보려 나름 노력을 하고는 있었지만, 남편의 빈자리는 컸고, 내 분신 같던 아들을 떼어 놓고 사는 하루하루는 너무 고통스러웠다. 머리는 빨리 정신을 차리고 아들과 살 궁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몸은 매일 술독에 빠져 같은 얘기를 반복하며 울기만 하고 있었다.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만나 위로를 받아 볼까? 비슷한 경험을 한 언니들을 만나 어떻게 극복했는지 들어볼까? 그래서 그 당시 한창 인기였던 싸이클럽 모임에 기웃거리기 시작했고, 그곳에서도 늘 나처럼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오빠, 잔뜩 삐뚤어져 잘 되는 사람들 깎아내리기 바쁜 불쌍한 동생, 또 남편이 애들을 절대 보여주지 않아 힘들어하던 언니 등... 누가 누굴 위로하는 건지 모르겠으나 나는 그들을 위로하며 내가 위안을 얻고 있다고 생각했고, 가끔은 그것이 사랑이고 위로라는 착각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그곳에서 만난 언니들이 이혼 후 5년 10년 15년이 지나서 안정을 찾고, 잘 된 모습들을 보면서 나의 미래도 저렇게 될 것이라는 위안을 받았다. 그런데, 그곳에서 친하게 지내던 한 언니가 결혼을 한 줄도 몰랐는데, 실은 폭력 남편을 피해 도망을 나왔었다는 것을 언니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리고서 알게 되었다. 그 남편은 언니에게 자식들의 얼굴도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고, 언니는 애들이 너무 그리워서 힘들고, 생활고에 시달리다 보증금에서 마지막 월세가 빠지는 날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 난 그때 충격이 너무 커서 그곳의 생활을 모두 접었다. 그런 게 나의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하기 싫었다. 물론 그런 그 외에도 술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들 일으켜 세우며 도와주려고 호의를 베풀었다가 카드빚만 몇천이 되었고, 실패에 대한 자격지심으로 늘 모임에서 분란을 일으키는 불만 덩어리들을 보듬어 보겠다고 덤볐다가 아픈 마음에 상처만 더 깊어졌다. 혜안이 막히는 것인지 당시 어울리는 사람이나 눈에 보이는 사람들 모두 아프고 힘든 사람들만 보였고, 내가 제일 안타깝고 불쌍한 줄도 모르도 남을 돕겠다고 시간과 돈과 마음을 모두 들여 애를 쓰다가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섰다. 하지만, 모든 것은 경험에서 배우는 법 아니겠는가? 나는 타인을 경계할 줄 알게 되었다.(아직도 완전 경계 태세는 아니라 가끔 덥석 잘 믿기는 한다.^^;)
그 집 때문에 내가 힘들었던 것인지, 내가 그런 기운이 있어 그 집이 나를 끌었는지, 아무튼, 귀신이 보이거나 나타나지 않아도 만나는 사람이 모두 나에게 해코지를 했고, 내 몸과 마음과 몇 푼 안 되는 돈을 축내기 일쑤였다. 직장에서 필요한 1급 승급 교육을 받으러 가는 날 교통사고가 나서, 승급은커녕 직장도 잃고 합의금으로 집 대출을 끌어다 쓰기까지 했다. 동생의 결혼식에 뭐라도 보태주려고 전세를 옮겼는데, 옮긴 그 집에 살면서는 보일러가 터지고, 방안에 물이 차도 집주인이 나타나지 않아 고생고생하다가 결국엔 그 집이 은행에 차압을 당하고 내가 2순위라 전세금까지 떼였다. 정말, 평생 겪어도 다 겪어보지 못할 별의별 일을 다 겪었지만 이상하리만치 꿈자리는 괜찮고 뭣도 보이지 않았다. 처절한 현실에 귀신도 숙연해져서 잠시 관망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와중에도 여전히 주말이면 아들을 데려다 입히고 먹이고 하는 것은 절대 빼먹지 않았고, 아들과는 더 좋은 곳을 보러 다니려 애를 썼다. 하지만, 카드값을 돌려 막고, 당장 수입이 없는 형편이다 보니, 점점 먹는 것이 부실해지고, 놀러 가는 것도 그냥 동네친구들과 만나거나 집에서 뒹굴거나 하는 식으로 때우게 되었다. 그것조차라도 하려면 평일 백수인 나는 굶겨야 주말에 아들 맛있는 찌개라도 끓여 줄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왜 취직을 안 했냐고? 안 한 게 아니라 못 했다. 당시 나는 그 근처 원장님들 중 회장 격인 원을 세 개나 운영하는 원장님과 일을 하고 있었는데, 내가 교통사고가 나서 쉬는 동안 선생님들이 내가 이혼하고 정신이 나가서 같이 일을 못 하겠다고 했대서 잘렸다. 또 그 소문이 돌아서 친하던 원장들도 선생들도 잘 써주려 들지를 않았다.(나중엔 그래도 그 원장님이 좋은 원장님을 소개해 주셔서 더 좋은 원장님 만나 정신도 챙기고 학습지 교사로 전향도 했다.) 그래서 정신을 차리고 술부터 끊어야 했지만, 밤이 되면 어김없이 소주병을 사들고 집으로 들어갔다. 은행이자를 내고 카드를 돌려막으며 애를 써 봤지만 정신이 온전하지 않으니 당연히 깨진 독에 물 붓듯 생활은 계속 힘들었다. 어느 날인가 정말 집에 쌀이 똑 떨어졌다.
'내일 아들이 올 텐데... 뭘 해서 먹여야 하나? 쌀은 있어야 하는데...'
다른 사람들 같으면 친정 식구나 친구들에게 얼마간 융통이라도 부탁했을 것이다. 근데, 나는 지금도 그런 말을 할 줄 모른다. 없으면 안 쓰는 거고, 있으면 있는 만큼 쓰는 거라는 생각도 있지만, 손 벌릴 만큼 주변에 넉넉한 사람이 없어서 괜한 소리로 걱정만 끼치고 싶지 않았다. 결국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잔돈을 모으던 돼지 저금통을 뜯는 것이었다. 오백 원짜리 몇 개와 백 원짜리 몇 개 십 원짜리 몇 개 정도? 아무튼, 라면이라도 사 오려고 집을 나서려는데, 문 앞에 웬 검은 비닐봉지가 있었다. 나는 뭐 이상한 게 들었나 겁이 나서 살짝 들여다보니 비닐 한가득 쌀이 들어있는 게 아닌가? 나는 눈을 의심하며 검은 봉지 안을 다시 보았다. 분명 쌀이 맞았다. 나는 옆집 할머니께서 쌀을 사가지고 오셔서 내려놓고 문을 열고, 깜빡 잊고 그냥 들어가신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쌀을 그대로 두고 슈퍼로 갔다.
라면 두 봉에 소주 한 병 참치캔을 하나 집어 들었다. 돈이 모자랐다. 참치캔을 내려놓고 라면과 소주병을 들고 집으로 왔다. 매일 집에 처박혀 있기에 오랜만에 나와 동네 한 바퀴 돌았다. 부부가 아이의 손을 잡고 어딘가 신나게 가고 있었다. 아마도 맛난 외식을 하려는 모양이었다.
'나도 저랬던 시절이 있었는데...'
또 청승맞은 눈물이 흘렀다. 매일 술에 절어 신세한탄을 해대고 울고 불고 하다가 친구도 선배도 다 떨어졌고 술을 마시고 여기저기 전화해 대는 내가 싫어서 전화번호도 다 지웠다. 그런데, 아직도 눈물이 남아있었다. 내 눈물이 지긋지긋했다.
일말의 희망을 갖고 상담 수녀님께 심리상담을 받으며 치료 중이었던 내 앞에서 그녀를 사랑한다는 내 남편의 고백은 아직도 내겐 아물지 않은 상처처럼 빠지지 않은 가시처럼 심장 한가운데 박혀 가끔씩 통증을 유발하지만 모든 게 부질없다는 생각으로 상담도 집어치웠다. 오로지 내 상담사는 술뿐이었다. 하지만 이젠 돈이 없어 술도 못 사 먹을 판이었고, 쌀이 없어 굶어 죽을 판이었다. 하지만, 난 그야말로 비빌구석이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동네를 몇 바퀴 돌고 다시 집으로 들어갔는데, 그 쌀이 담긴 비닐이 계속 내 집 앞에 있었다. 나는 옆집 문을 두드렸다.
"할머니! 이 쌀 할머니가 놓고 잊으신 거 아녜요?"
"아니, 내가 안 놨는데?"
"위층인가?"
"아들은 안 왔어?"
"낼 데려오려고요."
"잠깐만."
할머니는 잠시기다리라더니, 전병을 들고 나오셨다.
"우리 딸이 사 왔는데, 아줌마 아들 좀 줘~ 나 혼자 많아서 다 못 먹어!"
"아니, 괜찮은데, 두고 드시죠~"
"난 안에 많아! 이런 건 얼른 맛날 때 나눠먹는 거니까 미안해말고 맛나게 먹어요"
"네~ 감사해요. 어르신"
나는 전병하나에 마음이 따듯해졌다. 그리고 쌀자루는 주택 출입구 앞에 내다 놓았다.
'누구라도 잃어버렸으면 찾아가겠지!'
나는 집에 들어가서 라면 반 개를 끓여 소주 한 병을 마셨다. 술 한잔 먹고 울고 또한 잔 먹고 낄낄 웃고... 정말 미친년이 따로 없었다. 혼술은 더 쓰고 더 취했다. 다음날 늦게 잠에서 깨서 아들을 데리러 가려고 부리나케 준비를 했다. 일단 집안에 있는 소주병을 치워야 했다. 병을 비닐에 넣어 문 앞에 놓았다가 나가면서 슈퍼에 팔아야겠다 싶어 현관문을 열었다. 문을 미는데 뭔가 문뒤로 밀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뭐지?' 싶어 문 뒤를 보니 어제 내가 내다 놓은 쌀이 담긴 비닐이 우리 집 문 앞에 놓여있었다. 나는 밖으로 나가 혹시나 누가 놓고 간 흔적이라도 있는지 두리번거렸다. 뭐가 보일리가 없었다. 나는 '혹시 애 아빠가 왔다 갔나?' 하는 생각까지도 해 보았다. 하지만 그 사람은 지금 내가 사는 집을 모르니 그럴리는 없고, 혹시 안다고 해도 몰래 이런 서프라이즈 할 사람은 아니었다. 아무튼, 나는 '밖에 내다 놓은 쌀이 다시 내 집 문 앞에 있는 건, 나 먹으라고 준 거겠지! 이 건 내게 주겠다는 분명한 의사표시야!' 이렇게 생각하고 그 쌀비닐을 집 안으로 들였다.
쌀은 한 2~3kg 정도 되는 것 같았다. 일단 쌀을 전부 씻었다. 그리고 절반을 덜어 밥솥에 앉쳤다. 압력밥솥의 추가 '칙칙 칙칙' 돌아가면서 오랜만에 일거리가 생겨 기쁜 아이처럼 열심히 돌았다. 나는 밥냄새가 풍기니 시장기가 돌았다. 뜸을 들일동안 집에 남은 신김치를 볶았다. 입에 침이 고이고 참을 수가 없어서 밥을 한 숟가락 먹고 가야겠다 싶어 압력밥솥을 열었다. 윤기라 촤르르 흐르는 흰 쌀을 보니 왠지 누군가 이 집에 살던 분이 드시라고 두고 간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이 쌀 주인이 따로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밥그릇을 하나 새로 꺼내서 수북이 담았다. 그리고 집 현관 앞에 작은 다과상을 놓고 밥을 놓았다.
"무슨 쌀인지 몰라도 잘 먹겠습니다. 같이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맛있게 한 그릇을 뚝딱 먹고 아들을 데리고 와 또 그 쌀로 아들과 달게 밥을 해 먹었고, 그 뒤로 3주가 넘게 그 쌀로 버틸 수 있었다. 그리고, 또 쌀이 딱 떨어진 다음날 보고 있기라도 했다는 듯 현관문 앞엔 두 겹의 검은 비닐에 담긴 쌀이 또 있었다. 나는 이번엔 고민도 없이 신이 나서 쌀비닐을 들고 집으로 들어왔다. 또 밥을 지어 한 공기는 나 나름의 양심으로 쌀 원래 주인을 위해 떠서 다과상 위에 놓고 나서 먹었다. 두 번째 비닐의 쌀로 밥을 해 먹은 그날 밤이었다.
술에 취해 자던 버릇 때문인지 최근 술을 살 돈도 아끼느라 되도록 집에서 술을 먹지 않았기에 새벽까지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고 있었다. 막 잠이 들락 말락 하는데, 누군가 내 귀에 '호~'하고 바람을 불어넣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 귀를 후비고 나니 갑자기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근데, 이상하게 잠이 들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잠들지 않으려고 눈을 겨우 뜨고 있는 내 눈에 희미하게 보이는 여자 둘... 내가 저 여자들을 어디서 봤더라? 생각하는데 그녀들의 대화가 아주 작게 들렸다.
"잔다. 자~"
"그래~ 얼른 자라! 빨리 자라~"
그러더니, 둘이서 신이 난 듯 낄낄거렸다. 난 그 익숙한 웃음소리에 소름이 끼쳤다 계속 '자면 안 돼! 잠들면 안 돼!'하고 눈을 아무리 뜨려고 해도 눈이 스르르 감겨버렸다. '아 ~ 안돼!' 하는 순간, 그 여인들의 까르르 웃는 소리와 함께 집안이 온 통 환 해지는 것을 느꼈다.
작가의 말
"사람이 허약해지면 다 그런 거야!"
"정신상태가 썩어빠졌으니 그런 게 보이는 것 같지!"
"다 네가 힘들어서 헛것이 보였던 거야!"
누가 내게 이런 말을 하진 않았지만 나 스스로 이렇게 믿었어요. 그랬을 거라 믿었다는 거죠! 그 쌀도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고 먹었는데, 살짝 그런 맘도 들었어요. 전에 누가 살았었는지는 모르니까 혹시 이전에 사시던 분이 집에서 돌아가신 게 안타까워서 자식이나 누가 두고 갔나? 그래서 밥을 지어 한 공기 퍼서 하루종일 집에 두기도 했던 거였고요. 저는 가톨릭 신자이기도 하지만, 귀신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그렇게 행동한 것 같아요. 그리고, 사실 쌀과 악몽이 무슨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안 했었어요. 쌀비닐 존재 자체를 잊고 살고 있었는데, 이 글을 쓰면서 새삼 그 쌀비닐이 생각나면서 그 근처로 악몽이 시작되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결국, 쌀비닐과 악몽의 이야기는 제 추리라는 점도 밝혀 둡니다.^^
다음 주에 어떤 악몽이 시작되었는지 이야기해 드릴게요.
다음 얘기부턴 조금 19금 얘기가 될 수도 있어요. 미리 알려드립니다. 애들은 가세요~ ^^ㅎㅎ
그럼, 다음 주도 월요일 건너뛰고 금요일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