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다른 의·식·주 이야기-에필로그
어떤 일이든지 시작과 더불어 끝이 있습니다.
사람들마다 시작에는 신중하지만 그 끝에 대해서는 무딘 것을 봅니다. 잘 되리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마지막의 무게감을 대신해버리는 것이지요.
때로 끝, 마무리가 있는 듯 없는 듯 슬쩍 지나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래서는 제대로 된 결과를 만날 수 없습니다. 지나온 과정의 의미를 제대로 발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시작할 때의 큰 그림이 무엇이었는지도 잊어버리게 됩니다. 지금, 오늘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삶의 마지막 의식주를 생각해보는 것은 지금 삶의 의식주가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는지 평가해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됩니다.
그리고 변화된 환경 속에서 어떤 삶을 추구해야 할지를 성찰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마지막을 그려보면 앞으로 일어날 변화들이 조금은 선명히 보이기 때문입니다.
1900년 이후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그리고 급속한 산업화를 겪으면서 삶의 마지막 의식주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있었던 화장의 권장, 개인묘지의 금지와 공동묘지의 등장은 유교적 전통으로 이어오던 매장과 공동체적 장례의식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한국전쟁 기간에는 전쟁이라는 혼란한 사회적 상황이 이어지다, 1970년대부터 ‘가정의례준칙’과 ‘장사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매장제도와 장례식의 변화가 생겨났습니다.
특히 1990년대 이후 화장의 급속한 확산과 함께 매장을 억제하고 봉안당과 자연장을 유도하는 정책이 펼쳐집니다. 그 영향으로 장례절차에도 변화를 겪었습니다.
2000년 이후 최근에는 의료기술의 발달로 고령화가 이루어지고 연명의료가 가능해지면서 인위적인 생명연장까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전까지 논의되지 않던 존엄사와 ‘좋은 죽음’에 대한 관심이 1997년 보라매 사건과 2009년 김 할머니 사건 그리고 2018년 4월 시행된 연명의료 결정법에 의해 일상적인 주제가 되었습니다.
과거와 달리 집이 아닌 병원에서 사망하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아졌습니다. 한국사회에서 상조회사와 병원 장례식장으로 대변되는 죽음과 죽어감의 여정은 알게 모르게 한국인의 일상이 되었고, 그러한 변화의 흐름이 한국사회의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의 변화를 살펴보면 성장제일주의와 소비 중심주의가 은연중에 죽음에 대한 성찰과 가치를 상실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살기도 바쁜데 죽음까지 걱정하느냐고, 그게 돈이 되느냐는 반응이지요.
물론 죽음의 본질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완전한 답을 제시할 수 없습니다. 그만큼 죽음은 미지의 세계이며, 죽음에 대한 경험과 인상은 개개인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다양합니다. 죽음이 몰고 오는 두려움은 인간 내면 깊은 곳에 존재해 선뜻 다가가기 어렵고, 다가오는 죽음에는 서둘러 도망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반응입니다.
그러나 그런 죽음에 대한 인식은 삶의 새로운 자극이 됩니다. 회피하려던 죽음에 직면함으로 삶의 문제들이 실타래처럼 풀리고, 미리 죽음을 챙기는 중에 내가 누구인지 또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중요한 인생의 질문에 해답을 찾게 합니다.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그로 인한 두려움의 정서를 관리하면, 죽음은 일상을 보다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결정하게 하는 힘을 줍니다. 이처럼 죽음은 삶을 가치 있게 하는 핵심적인 요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