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사남 아니고 나사남입니다.
(왕과 사는 남자가 관객 1500만을 눈앞에 두고 있어 유행에 편승하여 나와 사는 남자로 제목을 지었음을 고백함.)
올해로 결혼 25년 차다. 살아온 인생의 절반을 이 남자와 함께 했다.
이 남자를 처음 만난 건 내 나이 24살, 대학교를 졸업하고 첫 직장생활을 하던 때다. 리즈시절이라는 말은 요즘 말이고 그 당시 아빠는 나에게 상종가를 치는 나이라고 했다. 딸에게 하는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꽤나 주식에 몰두하고 계셨을 때였나 보다.
이 남자를 영어회화 학원에서 처음 보았다. 제2 외국어 하나쯤은 할 줄 알아야 한다면서 회화학원이 성행했던 때다. 지금은 스픽, 말해보카, 듀오링고 같은 앱을 비롯해 화상영어, 전화영어등 온라인으로도 충분히 외국어를 접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그때는 오프라인 강의를 들으러 가야 영어 한마디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엄청 옛날사람 같지만 시대가 빠르게 발전한 것이다. 난 오십밖에 안된 요즘사람이다.
영어학원 새벽반은 지금의 미라클 모닝 시초였을 것이고 저녁반은 자기 계발에 관심 좀 있다는 직장인들이 모이는 동아리방 같았다.
"Hi! Brain"
"Hi! Mary"
남편은 브라이언, 나는 메리. 그렇게 브라이언과 메리의 첫 만남이 시작되었다. 지금 보니 영어이름 너무 유치한 거 아닌가. 하하하. 그때는 진지하게 고민해서 지은 걸 텐데.
그래도 딸이 엄마아빠 어디서 만났냐고 물어보는데 영어학원이라고 말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공부는 안 했어도 뭔가 건설적인 곳에서 만난듯한 모양새라 쭈뼛대지 않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 좋다.
직장인들의 저녁반 영어회화시간은 서툰 영어를 더듬더듬하면서도 유쾌하고 즐거웠다. 딱히 정해진건 아니었지만 매주 금요일은 수업이 끝난 후 자연스럽게 맥주집으로 향했다.
그날도 평소 금요일처럼 학원 근처 호프집에 모여 뭐가 그리 좋은지 깔깔대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도 그럴 것이 2,30대 젊은 청춘이 모였으니 즐겁지 아니할 이유가 없었다. 나의 20대 술실력은 꽝이었다. 술 안 마시고도 술 취한 사람처럼 놀기는 가능했으나 술은 맛이 없었고 대체 왜 마시는지도 이해되지 않았다.
아무튼 나는 술을 마시지 않고 안주발을 세우며 수다에만 합류했다. 차를 가져온 탓도 있었다.
에헴! 난 24살에 차가 있는 여자였다. 아빠가 사준 흰색 중고 아반떼. 나의 첫차다. 대중교통이 불편한 곳으로 발령이 나서 남자 직장상사와 카풀을 하게 되었다. 아빠는 그 꼴을 아주 못마땅해하면서 그 길로 차를 사 왔다. 멋쟁이 아빠인 건지 성격이 만만치 않은 아빠인 건지 아무튼 범상치 않는 사람이다. 끝까지 읽으면 그 진가를 알게 될 것이다.
"See you monday!"
맥주타임이 끝나고 월요일에 보자며 짤막하게 영어로 인사하고 자리를 파했다. 명색이 회화학원 모임이라고 중간중간 영어를 쓰기는 한다. 아주 간단한 것들로만.
차를 세워둔 주차장으로 가려는데 이 남자 따라오는 것이 아닌가.
"주차장이 어둡던데 데려다 드릴게요."
전문용어로 개수작이라고 하려 했는데 외모가 너무 착하게 생겼다.
'엥? 버스 타고 갈 사람이 차를 가져온 나를 주차장에 데려다준다고?' 이상했지만 싫지 않았다.
"아, 네. 감사합니다."
엉거주춤하고 어색하게 주차된 곳으로 함께 걸어왔다.
"댁이 어디세요? 제가 모셔다 드릴게요." 차가 있는데 잘 가라고 인사하고 나만 홀랑 가버릴 수는 없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보통의 마음, 인지상정이 발동했다.
몇 번 괜찮다고 하다가 결국 그 남자는 내차 조수석에 앉았다.
이 남자의 집까지 가는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둘만의 대화를 했다. 그동안 학원이나 술자리에서 단체로 이야기를 해보긴 했지만 둘만 있었던 건 처음이었다. 작은 공간의 힘이었을까. 우리는 친해졌고 드디어 첫 데이트를 하게 되었다.
첫 데이트 음식은 보통 뭐를 생각할까? 스테이크? 파스타? 일식? 한정식?
땡! 다 틀렸다.
우리는 보쌈을 먹었다. 보쌈 맛있는 집을 안다며 첫 데이트 메뉴로 보쌈을 선택한 이 남자. 서툴다.
그럼 두 번째 데이트는 뭐 먹었을까? 맛있는 순댓국집이 있단다. 하. 어쩔.
신혼여행을 온양온천으로 가던 세대도 아닌데 데이트 메뉴가 너무 올드했다. 그런데 왜 나는 그 보쌈과 순댓국이 맛있었을까? 서툴고 진지한 이 남자가 좋아졌다.
그렇게 9월부터 요새말로 우리의 1일이 시작되었다.
10월 중순쯤일까. 아빠는 갑자기 나에게 선을 보라고 했다.
"24살에 무슨 선이야?"
"내가 손잡고 들어갈 수 있을 때 결혼해라."
아빠는 그때 암진단을 받고 치료 중이셨다. 그걸 들어줄 마음에서는 아니고 선은 보기 싫어 남자친구가 있다고 했다. 카풀 꼴 보기 싫다고 차 뽑아오는 아빠는 이번에도 공격적이다.
"데려와라."
헉! 그저 선보기 싫어서 두 달밖에 안된 남자친구를 팔았는데 데려오라고 할 줄은 몰랐다. 안 데려오면 아빠 성격에 선을 끌려나가야 할 판이다.
"저기. 우리 아빠가 보자는데."
이 남자는 어이가 없거나 황당하거나 당황했을 것이다. 최고의 스파크를 내고 있는 시기였기에 싫다고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만난 지 두 달 만에 우리 집에 인사를 왔다.
"우리 딸은 내년 봄에 결혼해야 하니까 생각 있으면 만나고 아니면 헤어지게." 그 말만 하고 급히 갈 곳이 있다며 나가버리셨다.
와. 대박. 드라마 너무 보신 건가? 지금 생각하면 그 말을 던지고 아빠도 엄청 떨리셨을 것이다. 센척하느라 갈 곳도 없으면서 나가버린 것 같다는 생각을 그때는 못했다.
안 그래도 긴장하고 있었을 이 남자, 10월임에도 이마에 땀이 송글했다. 엄마는 아빠의 돌발행동을 설명하며 긴장을 풀어주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결국 함께 손을 잡고 식장에 들어가고 싶어 했던 아빠의 바람은 이루어졌다. 다음 해 5월, 만난 지 9개월 만에 우리는 부부가 되었다. 너무 사랑했고 아무것도 따지지 않았다. 큰 집이 아니어도, 좋은 혼수가 아니어도 그냥 마냥 좋았다. 밤에 헤어지지 않고 같은 집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좋았고, 늦은 시간 부모님께 혼날까 봐 걱정하며 현관문을 도둑고양이처럼 살며시 열지 않아도 돼서 좋았다.
사랑은 화학반응이라 했던가. 불꽃은 꺼지게 마련이다. 아이를 낳고 육아와 여러 가지 현실에 부딪히면서 의견충돌이 나기도 했다. 남편은 고지식했고 난 자유분방했다. 내가 알아서 할 일도 남편이 잔소리를 하는 것 같았고 돌다리도 두들기며 안전하게만 하려는 모습이 답답했다.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 이 남자에게 기대지 않고도 난 잘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착각하며 오만을 떨었던 것이다.
아프고 깨달았다.
고지식함이 답답하다 했었는데 요즘은 그게 고맙다. 나와 가족을 돌봄에도 고지식하다. 요령 피우지 않는다.
병원을 갈 때도 항암을 할 때도 가족과 관련된 일을 함에 있어 단 한 번도 요령 피우지 않았다. 나 혼자도 잘한다는 오만은 깨졌고 이 남자에게 기대고 의지하며 살고 있다.
내가 암에 걸려서 가장 좋은 점은 이 남자의 가치를 알게 되고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아 철이 들게 된 점이다. 안 아팠으면 지금도 나 잘났다고 싸우고 있었을지 모르겠다.
나와 사는 남자.
아빠는 이 남자가 마음에 들었던 게 분명하다. 마음에 안 들었으면 당장 헤어지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내년봄에 결혼 안 할 거면 헤어지라고 한 말은 결혼을 하라는 강력한 뜻이었을 것이다.
아빠는 당신의 역할을 이 남자에게 넘겨주고 떠났다.
남편은 가끔 장인어른한테 코 껴서 결혼했다고 얘기한다. 좋으면서. 분명 좋을 거라 믿는다.
푸시해 준 아빠에게 고맙다. 아빠가 사람을 잘 본 것 같다.
그날 조수석에 태운 나도 참 잘했다. 그 덕분에 난 지금 이 남자의 조수석에 앉아서 안전하게 살고 있다.
나와 사는 남자. 내 인연 중 으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