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뭐 어때 Apr 08. 2024

'어쩌다'에서 '어차피'로

어차피 예뻐질 거야

내가 어쩌다가

암환자가 된 후 1년 이상을 눈물 자판기로 살았다. 그중에서 가장 눈물을 빨리 흐르게 하는 단어는 '어쩌다'였다. '어쩌다'가 삽입되면 눈물이 결과물로 펑펑 쏟아졌다. sold out 없는 자판기다. 병원에 앉아서 기다리는 동안에도, 수술방에서도, 방사선실에 윗옷을 다 벗은 채 만세를 하고 천장에 매달린 기계를 바라볼 때도, 심지어 길거릴 걷다가도 '어쩌다'라는 단어만 떠오르면 여지없이 장소불문하고 눈물이 터졌다. '내가 뭘 그리 잘못해서 이런 벌을 받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 때면 '더 나쁜 인간들도 많은데'하면서 억울했다. 나만 불행한 것 같아서 미칠 것 같았고 어설픈 위로를 하는 인간들이 모두 미웠다. 

"요새 암이 너무 흔해. 치료제 좋다니까 걱정하지 마" VS " 흔해도 넌 아니잖아"

"유방암은 순하대" VS "네가 해봤어?"

"나 아는 사람도 유방암 걸렸다가 지금 엄청 잘 살아." VS "힘들게 지나온 과정을 알아? 네가 걸렸던 건 아니잖아."

"왜 서울 큰 병원 안 갔어?" VS "내 몸은 내가 제일 아껴. 어련히 알아서 했을까? "

"나도 요새 여기저기 난리야. 우리 나이가 그럴 때인가 봐" VS "이걸 확 그냥!"

"너 너무 스트레스 많이 받고 살더라" VS "열심히 산거거든."

"머리카락 없으면 어때. 괜찮아. 금방자라" VS "네가 대신해 볼래?"

"술 안 먹으면 어때. 안주 먹으면 되지. 뭐 어때. 나와" VS "뭐 어떻지 않거든. 싫다잖아"

이런 위로나 동정 따위 하지 마시라. 그런 위로로 단 한 번도 마음의 위안을 받아본 적이 없으며 적개심 가득 찬 생각만 들었다. 물론 시간이 지난 지금은 조금 이해되는 부분도 있고 여전히 별로인 말들도 있지만 그때는 날이 잔뜩 서있어서 그 어떤 말로도 나에게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 어설픈 위로에 아무렇지 않은 듯 대꾸하는 것이 더욱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축대가 무너져 쓸려내려 가면서 태연한 척하는 그런 느낌이랄까. 나의 얘기에 공감하고 함께 고민해 주는 건 너무나 고마운 일이지만 아닐 때도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특히나 섣부른 지식과 정보로 알려주려는 말들은 정말 듣기 싫었다. 암진단을 받고 세상 모든 것이 두렵고 화가 나기도 해서 극도로 예민했던 그때는 그랬다. 혹시 주변에서 누군가 암진단을 받았는데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정 무언가를 하고 싶다면 입을 닫고 지갑을 여는 편이 나을 것이다. "맛있게 먹어" 하면서 과일이라도 사다 주는 것이 백 마디 위로보다 마음을 전달하는데 효과적일 수 있다. "잘 먹을게. 고마워"만 대답하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애써 다른 이야기를 해대면서 이말 저말 하지 않아도 되는 행동. 딱 그것만 해주는 것이 좋다.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

퀴블러-로스의 죽음이론 5단계 이론이다. 죽음뿐만 아니라 감당하기 어려운 어떤 일을 마주했을 때 인간이 취하는 행동양태를 잘 표현해 준다. 난 지금 어디인가? 부정, 분노, 타협, 우울의 단계는 모두 거친 것 같다.


꿈 인가? 꿈이었으면 좋겠어. 꿈일지도 몰라 -> 내가 왜? 대체 왜? -> 열심히 치료받을 테니 제발 나 좀 봐주라. -> 아무도 만나기 싫고 이렇게 사는 게 힘들고 우울해.


 암환자로 2년 넘는 시간을 보내면서 분노에 가득 차 남들의 애정 어린 말들을 오해하고 상처받고 그러면서 또 누군가를 증오하기도 하고 우울감이 시달려 잠 못 이룬 밤도 여러 날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수용하는 단계에 가까워졌다고 믿고 싶다. 물론 위 다섯 가지가 완벽하게 따로 다니지는 않는다. 어떤 날은 다섯 가지가 한꺼번에 몰려오기도 하고 두 가지 이상의 감정이 혼재되어 나를 괴롭히기도 한다. 이제는 '어쩌다'의 감옥에서 벗어나야 한다. '대체 왜? 어쩌다 내가?'라고 생각하는 건 나 아닌 다른 누군가는 그래도 된다는 말인가? 오만한 생각이다. 그런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생각의 전환이다. 그래 바꿔보자.


'어쩌다'에서 '어차피'로!

어쩌다 내가 이렇게 된 게 아니고 이왕지사 어차피 벌어진 일이다. 내가 발버둥을 쳐도 바뀌는 것은 없고 나만 불행해질 뿐이다. 게다가 다시 얻은 나의 이 귀한 시간을 우울과 분노로 아깝게 날려버릴 수는 없다. 그때 위로의 말을 했던 사람들은 나에게 잘못하지 않았고 그들의 입장에서 해줄 수 있는 최선이라 믿는 말을 했을 것이다. 문제라면 아무것도 싹 틔울 수 없었던 그때의 척박한 내 마음 탓이다. 항암으로 머리카락이 다 빠진 친구를 위해 똑같이 머리를 밀고 찾아오는 예전 CF속 친구를 기대하거나 딱 내 맘 같은 사람이 존재할 거라고 착각한 욕심이 서운함을 만든 것이다. 심지어 가족일지라도 내 마음 같을 수는 없는데 남이야 오죽할까 말이다. 가족이 서운할라나. 아픔의 강도를 가장 크게 느끼기는 하겠지만 딱 나일 수는 없다는 얘기니까 반기 들지 않기를 바란다. 나 역시 그 누구에게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없으니 서운해할 일도 아니다. 어차피 벌어진 일인데 어쩌겠는가? 그러니 '어쩌다'는 버리자. 이제부터는 '어차피'다. 내가 잘 버티고 이겨내서 누구보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야 지난 시간의 억울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 

기대하시라! 더욱더 예뻐지고 건강해질 나를. 나한테 하는 말이니 독자님들 부담 갖지 마시길. 


뭐 어때! 어차피 예뻐지게 되어있어!
이전 09화 두 번째 인생 첫 생일파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