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한 달 살기
2023년 1월 14일 토요일
싱가포르 한 달 살기 8일차
싱가포르에서의 두 번째 주말이자 토요일.
어제저녁에 아들이 말하길, 내일 아침은 엄마가 먹고 싶어 하는 '그' 크루아상 집에 가서 먹자고 해서
설레는 마음으로 오늘 아침을 맞이했다. 뭐 이런 걸로 설레기까지 하냐 싶겠지만 그럴만한 것이 한식 정통파에 살짝 입이 짧은 아들 식성에 맞추느라 싱가포르에 와서 제대로 된 맛집을 아직 못 가봐서 아쉬웠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가기로 한 곳은 포트 캐닝 파크에 있는 '티옹 바루 베이커리'라는 곳이고 아몬드 크루아상으로 꽤 유명한 카페이다. 나의 계획은 아침식사를 티옹 바루 베이커리에서 먹고, 바로 옆 주빌리 공원 놀이터에서 놀다가 숙소로 들어가는 것이었고, 그리고 모든 것이 완벽했다. ㅎㅎㅎ
어른 걸음이라면 숙소에서 카페까지 걸어갈만할 것 같은데 아이와 같이 걸어가기에는 조금 멀어서 우리는 MRT를 타고 가기로 했다. 숙소 앞 벤쿨렌역에서 MRT를 타고 한 정거장 후 내려서 조금만 걸어갔더니 바로 카페가 나왔다. 카페에 도착하니 토요일 오전 시간의 여유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주로 가족단위였고 서양인이 많았던 곳이었다.
자리를 잡고 주문을 하러 가서는 그토록 먹어 보고 싶었던 아몬드 크루아상과 롱 블랙 아이스를 주문하고 아들의 아침식사 대용으로 애플클럼블과 오렌지 주스를 주문했다. 둘이서 아침으로 먹기에 정말 딱 좋았다.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기분 좋은 음악을 들으며 맛있는 빵도 먹고 그림도 그리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여유를 만끽했다. 쫓기듯 시간을 보내지 않고 쫓아갈 시간도 없는 이 순간을 오래오래 누리고 싶었다.
충분히 시간을 누린 후 우리는 카페 옆에 있는 놀이터로 가보았다.
워낙 더운 나라이다 보니 야외 놀이터에는 아침/저녁 시간에 아이들이 많다고 들었는데 역시나 이미 놀이터는 동네 아이들로 북적북적했다. 갓 열 살 아들이 놀기에는 조금 어린이용 놀이터 같았지만 나무 타기 섹션에서는 맨발의 투혼으로 열심히 재밌게 잘 놀았다.
아들을 지켜보며 주변을 둘러보니 대부분은 동남아인으로 보이는 시터가 데리고 온 서양인 아이들이라 이 광경이 신기하고 흥미로웠다. 홍콩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었는데 싱가포르도 시터 문화가 발달되어 있어서 대부분의 맞벌이 집에는 입주 시터가 있고 아이들을 돌보며 집안일을 한다고 했다. 시터 없이는 워킹맘이 일을 하기가 불가하고 맞벌이를 유지할 수 없기에 국가적으로 시터를 인증 제도로 도입해서 정부가 꼼꼼하게 관리 감독한다는 어느 다큐멘터리에서의 홍콩 워킹맘과 싱가포르 워킹맘의 인터뷰가 떠오르기도 했다.
문득 떠오른..길고 어두운 터널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그 시절
나도 아들이 돌 되기 전에 복직을 하면서 어쩔 수 없이 시터를 고용해야 했는데 그 뒤로 이어진 온갖 마음고생은 이뤄 말할 수가 없다. 여러 명의 시터가 거쳐갔고 크고 작은 이슈들이 계속 이어지면서 상처도 받고 울기도 많이 울었었는데.. 마지막에는 지인 추천으로 믿을 만한 분을 시터로 모시고(?) 와서 여섯 살까지 돌봐주셨는데 결국 그분도 개인 사정으로 그만두시게 되면서 시터 고용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아직 한참 손이 많이 가는 나이의 아이를 키우면서 일을 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기에 주변인의 도움이 많이 필요했지만, 결국 혼자서 오롯이 육아와 일을 병행해야 하는 불안한 외줄타기를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정말 하늘이 도와주셔서 재택근무 가능한 회사로 이직을 하면서 육아의 부담과 짐은 조금 내려놓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아는 결국 엄마의 몫임을 매일매일 체감하며 보내는 시간은 외롭고 힘들기 그지없다.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과 주변의 시터들을 보면서 혼자 사색에 잠기면서도,
그 어둡고 캄캄한 시간을 그래도 무사히 잘 견디고 버텨온 내게 마음으로 칭찬을 해주었다.
아직 갈 길이 더 남았고 엄마의 역할은 계속되지만 이만큼이라도 잘 해온 내가 스스로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서 이런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도 힘들었지만 잘 참고 이겨왔기에 받을 수 있는 보상이라고 생각했다.
오전 11시쯤 되자 구름에 가려있던 해가 나타면서 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하늘은 흐렸지만 태양의 열기가 쫘악 느껴지는 신기한 더위였다. 신나게 놀던 아들도 더위에 노는 것이 힘든지 그만 집으로 가자고 하여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버스 타러 가는 길에 알록달록한 창문으로 유명한 Old Hill St. Police Station을 지나갔다. 안으로 들어가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 더워서 힘들어하는 아들로 스치듯 지나가며 보는 걸로 만족했다. 오다가다 또 보게 되겠지 하는 마음이 일주일 정도 되니 생기기 시작한 덕분이기도 하다. 지금 안 가보면 혹은 지금 당장 보지 않으면 영원히 못 볼 것처럼 전투적으로 하는 여행이 아니라 발길 닿는 대로 보고 우연이 이끄는대로 다니면서 마주하는 여행이 여운이 더 길고 또 돌아보게 할 테니까. 그런 마음을 심어주고 싶은 게 이번 여행의 이유이기도 하니까.
오후에는 숙소에서 수영하고 점심 먹고 푹 쉬다가 저녁에는 차임스에 갔다. 수도회였는지 수녀회였는지 예전 가톨릭 성당 건물을 식당으로 개조해서 감성적인 분위기가 매우 좋다고 평이 나있는 곳이었다. 여기도 한 번은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기에 저녁 먹으러 가보기로 했다. 분위기가 있는 곳인 만큼 깔끔하게 옷을 차려 입고 아들과 손잡고 숙소에서 차임스까지 걸어갔다. 숙소에서 세 블록 정도 떨어져 있는 곳이라 해가 지는 이른 저녁엔 걸어가기에도 괜찮았다. 여러 식당들이 한껏 멋을 내고 반짝거리며 유혹을 했지만 미리 아들이 먹을만한 메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Prive라는 식당이었는데 서버들도 친절하고 주문한 음식들도 맛있어서 대만족이었다.
오늘은 널널하게 시간을 보내서 그런가 텐션이 마구마구 오른 아들은 차임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때마다 개구짐이 발동했다. 사진 찍을 때마다 괴상한 표정을 짓거나 방해를 하거나 나를 이상하게 찍어주거나 하면서 말이다.
사진도 많이 찍고, 다른 관광객 구경도 하고, 맛있는 밥도 먹고.... 여유 있고 평온한 토요일을 보낼 수 있어서 오늘도 감사했다. 여행을 하며 시간에 쫓기지 않으면서 무엇무엇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 없이 천천히 시간을 보낼 수 있음에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진정 여행을 떠나온 이유를 실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