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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성 Jan 24. 2024

열심히 악착같이 살면 안 되는 이유

오늘도 '나'를 사랑하겠습니다


 열심히 살았습니다. 3900만 원 원룸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에 악착같이 돈을 모았습니다. 아끼고 아꼈습니다. 아끼며 살아도 전세 재계약을 할 때는 올라가는 전셋값을 맞추기 힘이 들었습니다. 그럴수록 더욱 악착같이 아끼며 살았습니다.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임신이 되었습니다. 첫째는 2.1킬로로 저체중아로 태어났습니다. 아이도 아이였지만 저 역시 출산 후 몸이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가벼운 아이를 안을 때도 손이 벌벌 떨렸습니다. 아이뿐만이 아니라 물컵을 들 때도 손이 벌벌 떨렸습니다. 온몸에 기운이 없었습니다. 앉아 있는 것조차 힘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아이는 돌봐야 했습니다. 저체중아로 낳았다는 죄책감에 아이에게 더욱 올인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는 지독히도 잠을 자지 않았습니다. 밤잠과 낮잠 둘 다 없었습니다. 그리고 에너지가 넘쳐흘렀습니다. 



 아이 출산 후 체기가 있어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했습니다. 체한 것은 아이가 100일이 지나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양약과 한약을 먹고, 침을 맞아도 차도가 없었습니다. 음식을 먹지 못했지만 모유 양은 아주 많았습니다. 날이 갈수록 살이 쪽쪽 빠졌습니다. 지나고 보니 소화를 시킬 힘조차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내장기관들이 전부 에너지가 없어 움직이지 않는다는 소견을 받았습니다. 몸에 에너지가 생기기까지는 엄청난 시간이 걸렸습니다. 저는 지금도 저체중입니다. 처녀 때도 키 163에 47~48킬로로 날씬한 편이었지만 지금은 42~43킬로로 더 심한 저체중이 되었습니다. 지나온 과거를 생각해 보면 살이 찔 여유조차 없었습니다. 



  밤에 잠을 잘 때면 7~8번씩 잠에서 깼습니다. 모유 수유를 했는데 모유를 짜서 냉동했다가 해동을 해서 먹이려 했습니다. 하지만 한번 냉동된 모유는 아이가 먹지 않았습니다. 마음에 드는 젖병 꼭지를 찾느라 애를 먹었었습니다. 첫째는 매우 예민하고 까탈스럽고 에너지가 넘치는 아이였습니다. 



 어린이집에 다녀오면 매번 빽빽거리며 울었습니다. 말도 아주 늦게 트여서 왜 우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분명히 평소 좋아하는 간식으로 준비를 해 두었는데 간식을 다 뿌리칩니다. 그리고 몇 시간이고 떼를 부립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아이는 매일 원하는 간식이 따로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준비해 놓은 간식을 평소에는 좋아하지만 그날은 먹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까지 이런 습성 때문에 힘이 들었습니다. 분명히 맛있어해서 며칠 후 다시 준비를 해주면 먹지를 안았습니다. '누가 너의 비위를 다 맞추니~'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습니다. 본인이 원하는 것을 하지 못했을 때 부리는 때는 상상 그 이상이었습니다. 



 에너지가 얼마나 많은지 온 집을 다 헤집고 다녔습니다. 장난감은 일단 쏟아놓고 시작을 했습니다. 청소를 해도 10분이면 정말 다시 엉망진창인 집으로 되돌아오곤 했습니다. 잠시 한눈을 팔면 전셋집 벽지를 다 뜯어놓고, 모기장에 구멍도 냈습니다. 새로운 장난감은 순식간에 고장이 났습니다. 변기에 휴지심을 넣어 변기 뚫느라고 1시간을 실랑이를 하고, 새로 산 씽씽카 바퀴에 테이프를 칭칭 감아 타고 다니다가 바로 고장을 냈습니다. 자전거 바퀴는 심심하면 터지고, 옷들도 어쩜 그리 잘 찢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발달이 느려 걱정을 많이 하며 키웠습니다. 이름을 불러도 잘 쳐다보지 않았고, 사회성도 또래 아이들보다 많이 뒤처진다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말이 많이 늦다고 걱정을 했는데 말문이 트이자 순식간에 문장으로 말을 했습니다. 4살 때쯤은 엘리베이터 옆에 있는 '소화전'을 '전, 화, 소'라고 읽어서 매우 놀랐던 기억도 있습니다. (실제로 한글을 매우 빠르게 떼었습니다.) 캠핑을 갔을 때 개구리를 잡으면 채집통이 넘치도록 잡아 왔습니다. 아이가 넘어지면서 쏟아진 채집통에서 개구리 100마리가 쏟아져 뛰어 도망가던 모습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아이는 무엇인가 좋아하는 것이 생기면 몇 시간이고 몰입을 했습니다. 이런 면을 보고 저는 늦어도 기다리면 잘 크겠지라고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나고 보니 큰아이는 ADHD였습니다. 정말로 키우기가 쉽지 않다고 느꼈는데 이유가 다 있었습니다.



 아이에게 화를 내지 않기 위해 육아서를 약 100권쯤 읽었습니다. 육아로 엄청나게 지쳐있음에도 틈틈이 육아서를 읽었습니다. 아이가 정상이라는 위안을 받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훗날 육아서는 자기 계발서나 인문학 책을 읽는 것으로 연결이 되었고, 덕분에 저는 책 읽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첫째 아들 이야기는 밤이 새도록 이야기를 해도 부족할듯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둘째 아들도 ADHD입니다. 둘째는 큰애처럼 힘들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평범하지 않습니다. 사실 저는 ADHD 아들 둘을 키우고 있는 엄마입니다. 제가 겪은 힘듦은 무엇을 상상하셨든 그 이상일 듯합니다. 



 저를 갈아 넣었습니다. 육아를 하면서 돈도 열심히 모았습니다. 아이들 장난감과 책은 모두 중고로 구입했습니다. 예를 들면 30만 원짜리 전집을 중고로 15만 원에 구입을 하고 몇 년 뒤 다시 10만 원에 되팔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5만 원이면 30만 원짜리 전집을 아이들이 볼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 신발 1년치 5켤레를 중고로 38000원에 구입을 했습니다. 그러면 운동화 짝퉁 크록스까지 다 들어 있었습니다. 짝퉁 크록스에 쓰여있던 '나도훈'이란 이름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아이가 어려 아무것도 모르니 그냥 신겼습니다. 그리고 그 신발을 둘째가 또 신었습니다. 



 아끼며 산 이야기도 3박 4일을 해도 모자를 듯합니다. 그렇게 아끼고 아껴 드디어 결혼 9년 만에 내 집 장만에 성공을 했습니다. 큰아이 열 살 때 일입니다. 그때 저는 집에서 옷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아이들 학교에 간 동안 집에서 옷을 팔고, 아이들이 돌아오면 간식과 학원, 저녁을 챙겨주고, 저녁에는 동대문으로 옷 사입을 갔습니다. 엄청난 옷을 들고 새벽에 돌아와 다림질을 하고 잠이 들었습니다. 2~3시간 자면 다시 아이들 학교에 보낼 시간이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이런 생활을 내가 어떻게 했을까? 의문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냥 했습니다. 제 장사 이야기는 <집에서 옷을 팔아볼까?> 연재 글로 올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살다 보니 어느 순간 유럽 여행을 가는 비행기 안에 제가 있었습니다. 유럽은 부자들만 가는 곳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3900만 원 7평 원룸에 살았던 여자가 유럽 여행을 떠났습니다. 



 500원 1000원도 따지던 아줌마가 명품 백도 사고, 버버리 패딩에, 막스마라 코트도 샀습니다. 고가의 화장품도 샀습니다. 돈은 이렇게 쓰는 것인가 봅니다. 


 사실 유럽여행을 갔을 때도 명품 백 사는 것을 거부했었습니다. 신랑의 강요에 못 이기는 척 등 떠밀려서 구입을 했지만 사실 저는 저에게 돈 쓰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결혼 후 열심히 살다 보니 그런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평소 옷은 물론, 화장품도 잘 사지 않았습니다. 이런 저를 신랑은 조금은 답답해 했던것 같습니다. 가끔씩 신랑이 직접 화장품도 사주고 신발도 사주었습니다. 



 신나게 놀고 오니 암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 세상이 너무 야속했습니다. 열심히 살았고 이제 좀 살만한가 보다~라고 느끼자 바로 암이 내게 왔습니다. 



 암이 왜 내게 왔나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지나고 나서 보니 너무 열심히 살아서였습니다. 너무 자제하고, 너무 희생적으로 살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나온 과거를 보니 '나'를 돌보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 자신에게 너무 가혹했습니다. 



 암에 걸린 후 변하려 노력 중입니다. 요즘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반찬 위주로 요리했던 것을 제가 좋아하는 반찬 위주로 합니다. 내가 해 놓은 음식을 큰아이가 먹지 않으면 내버려 둡니다. 그러면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을 스스로 챙겨 먹습니다. 대봉이 딱 1개 남았을 때도 내가 먹습니다. 피곤하면 '엄마방 1시간 금지'라고 말하고 방에 문을 잠그고 들어와 쉽니다. 힘들면 배달도 시켜 먹습니다. 얼마 전까지 집안일을 도와주시는 도우미 이모님도 썼습니다. 예전의 저였으면 상상도 못 했을 것입니다. 



 제가 먼저였습니다. 아이들을 위한다면 제가 먼저 행복하고 건강해야 했습니다. 열심히 악착 같이 가 아니라 '나'를 돌보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것을 알려주려 암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암은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알려주려 왔습니다. 


 '나'는 귀한 사람입니다. 


 오늘도 '나'를 사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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