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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스갯소리 May 22. 2024

국시집 여자

정이 있으면 덜 힘들다

드라마스페셜 중에 '국시집 여자'라는 편이 있다.

우연히 마주친 여자에게 반한 남자가, 여자가 일하는 국시집을 계속 찾아가는 심리극이다. 여자는 조용하지만 신비로운 매력을 지닌 미인이었다. 비록 미인은 아니지만 문자 그대로 나도 국시집 여자였던 적이 있다.


집 근처에 새로 생긴 국수가게에 아르바이트를 모집한다는 안내를 보고, 사장님과 면담을 했다. 삼겹살 가게에서 일했었다는 이력을 이야기 했는지 안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하루만에 짤렸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은건 분명하다. 사장님이 바로 나를 채용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메뉴를 외우고 완성된 요리에 가쓰오부시를 올리거나 튀김감자를 추가하는 등의 간단한 홀 레시피를 익혀야 했지만, 삼겹살 가게에서 짤린 이력도 이력인지 이번에는 좀더 수월했다. 일주일 정도 지나자 다른 일을 돌아볼 여유가 생기기까지 해서 늘 카운터를 지키시던 사장님은 내게 카운터와 홀을 맡기고 외출을 하시기도 했다.


홀써빙 일을 하는 동안은 보통 서 있기 때문에 일을 마치면 다리는 조금 아팠지만, 일하러 가는 것이 힘겹게 느껴지진 않았다. 대부분 카운터를 지키고 계신 푸근한 인상의 사장님은 유머러스하고 다정하셨는데, 일하는 종종 부담스럽지 않게 말도 걸어주시고 너무 무리하지 말고 좀 쉬라고 편의를 주시기도 했다. 같이 일하는 주방 이모님들도 따뜻한 분들이라 모르는 것이 있으면 부담없이 물어볼 수 있었기 때문에 늘 마음이 편안했다. 식사 시간이면 주방장 아저씨가 호탕하게 뭐 먹고 싶냐고 다 말해보라고, 가게 시그니처 메뉴를 만들어 주시던 것도 생각난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사장님 내외가 정이 있어 그런 분위기가 가능했던 것 같다. 이후에 다양한 경험을 해본다고 다른 업종의 가게에서도 아르바이트를 해봤지만, 몇 년 후 임용고시에 합격하고나서 빵을 사들고 찾아가 본 곳은 국수가게가 유일했다. 일하다 보니 어쩌다 만난 사람들이라 긴 인생에서는 스쳐 지나갔다고 할 수 있겠으나 그때의 사장님 부부도, 이모님도, 주방장 아저씨도 오랜 시간이 지나서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국시집 여자에게 반해서가 아니라, 국시집에서 일했던 따뜻한 기억을 떠올리며 나는 종종 국수를 먹으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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