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의 서막, 복싱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쏘려고
우리집에는 빨간색 권투 글로브가 2세트 있다. 친오빠가 중학생 무렵 권투 글로브와 펀칭백을 사서 마당에 두고 한동안 휘둘렀던 기억이 있다. 물론 오빠가 운동용으로 썼을 때보다는 남매가 글로브를 끼고 서로에게 주먹을 마구 휘두르며 몸으로 싸운 횟수가 더 빈번했다.
시간이 흘러 내가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대학교 앞에 오래된 복싱 도장이 있었다. 오래된 곳일수록 관장님이 고수일 것 같다는 생각으로 그곳에 등록했다. 어렸을 적 내가 휘두른 글로브가 오빠 얼굴을 강타했던 그 손맛을 잊지 않고 있었다. 오빠와 체급 차이가 컸기 때문에 그 때에는 당하는 순간이 더 많았지만, 복싱을 제대로 배워 되갚아 줄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약간의 쾌감마저 느껴졌다.
관장님은 대략적으로 나의 운동 이력을 파악하시고는, 매 시작의 10분 동안은 줄넘기로 몸을 풀게 했다. 복싱과 줄넘기가 전혀 상관없어 보이지만 복싱 스텝의 기본으로 줄넘기가 복싱의 기초를 쌓는 데에 아주 필요한 운동이라고 했다. 어렸을 때 줄넘기 꽤나 했었기 때문에 그 정도 쯤이야, 라고 자부했으나 운동 공백이 길었던 탓에 10분 연속으로 줄넘기를 하는 게 생각만큼 쉽지는 않았다. 그 다음은 복싱 글로브를 끼우고 리듬에 맞춰 주먹을 휘둘렀다.
원,투- 원,투-
주먹이 너무 약해 상대가 운 좋게 내 주먹에 맞는다고 해도 그다지 위력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운동은 몸으로 하는거지만, 몸을 쓰는데에도 생각이 필요했다. 스텝을 하면서 주먹을 휘두르고, 몸을 어느정도 틀지 계속 신경쓰지 않으면 허우적 거리거나 의미없는 몸짓이 되기 십상이었다. 타고나길 몸을 잘 쓰게 타고날 수도 있지만, 나는 몸을 잘 쓰는 편이 아니었다.
관장님은 고수였을지 몰라도 나는 하수 이상의 단계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복싱을 배우고 난 후 집에 상경하여 오랜만에 낡은 글로브를 끼고 오빠와 대결을 했는데, 별로 효과가 없었다. 스텝이며 주먹을 뻗는 각도며 하는 것보다, 나보다 긴 혈육의 팔이 뻗으면 내 볼이며 턱에 먼저 꽂혔다. 얼굴을 몇 대 맞으니 그동안 배운 것과는 상관없이 감정적인 주먹이 오고 갔고, 결과적으로는 참패였다. 내 머릿 속 통쾌한 복수극은 그렇게 좌절됐고, 엄마는 성인이 되어서도 몸으로 싸우고 있는 우리 둘을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복싱과의 인연은 거기까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