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복잡한 날은, 운동화를 신고 남산으로 향한다. 남산 숲길을 따라 울퉁불퉁한 흙길에 박힌 돌을 피해 가며 걷기 시작한다. 일정하지 않은 숲길을 집중해 정신없이 걷다 보면, 답이 없을 것 같던 상황에도 ‘아~하!’라는 통찰이 떠오르곤 한다. 숲에서는 도넛의 구멍이 아닌 전체를 잠시동안 쓱 보여준다.
‘문제’에 집중한 나머지 그 ‘문제’만 보였던 것이, 그 ‘문제’를 둘러싼 여러 가지 해결책까지 알아볼 수 있도록,잠시나마 시야를 확장시켜 주는 것 같다. 평소에도 걷기를 좋아하지만 특히 숲길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해결책이 불현듯 떠올라 '번쩍'하는 직관의 답을 들을 수 있다.
숲에 있으면 자연이 주는 치유의 힘을 받는 것 같아서 좋다.
나뭇잎 사이로 아낌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은 상처 치료제고, 산바람에 흔들리는 싱그러운 나뭇잎들은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것 같다.
결정을 해야 할 일이나 고민거리가 생기면 나는 제일 먼저 숲으로 간다. 남산 둘레길에 있는 가장 듬직한 친구 큰 바위에게 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털어놓고는. 내가 내리는 결정이 타인이 아닌 진정한 나의 결정인지 알 수 있는 통찰을 달라고 기도한다.
나는 우리 동네 숲길 걷기 홍보대사다. 자연 치료제가 가득한 숲 밑자락에 사는 행운을 누리자고 동네 지인들을 설득한다. 그래도 대부분은 보는 것 만으로 만족해한다.
한창 바빠서 산에 못 가던 때였다. 나의 열띤 홍보 활동으로 산에 오르기 시작한 동네 친구가, 숲길을 걷다가 내 친구 큰 바위에게 내가 잘 있다고 전해 줬다며 찍은 사진을 보내줘 한참을 웃었다. 내가 좀 이상해 보이기도 했겠다는 느낌에 머쓱했다. 지금 그 친구는 주말마다 전국의 산으로 등반을 간다. 아마도 자연치유의 효과를 맛본 것 같다.
한동안 지하철 근처 벤치에 앉은 외국인 남자가, 같은 자리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발 옆에는 모기향을 피워 놓고 맨발로 화단 흙에 발을 댄 채였다. 일주일 동안 그 자리에 앉아 어떤 '의식'을 치르는 것 같은 진지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뭘 하고 있는 건지 의문이 들었는데 얼마 후 그 행동이 ‘어싱(Earthing)’이라는 걸 알게 됐다.
‘어싱(Earthing)’은 맨발로 흙을 접지하기만 해도 병이 치유되고, 지구에 연결된다는 이론이다.몸 안에 쌓인 정전기가 방출되고 대지와 하나인 우리의 몸에 자연의 기운을 흐르게 한다고 주장한다.
하루는 걷기 만랩인 친한 일본인 언니가, 집 근처 숲에 맨발 걷기를 하는 곳이 있다는 고급 정보를 알려주었다. 자주 다니던 길에 이런 곳이 있다고 하니 반갑기도 하고 궁금한 마음에 따라나섰다. 맨발 걷기 길은 발을 닦을 수 있는 수돗가 옆에 있어 도전해 볼 수 있었다.
부슬부슬 비가 오는 날이었는데, 찰흙같이 반들반들 해진 흙길이 미끄럽기도 하고 툭 삐져나온 돌을 밟아 발바닥이 얼얼하기도 했다. 숲길 사이에 어싱을 하는 사람들이 밟아 만들어낸 평평한 흙길을 조용히 따라 걷다 보니, 대지와 내가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도시에도 둘레길이 많이 조성되고 있다. 조만간 나도 서울 둘레길 완주 스탬프 받기에 도전할 계획이다. 숲길에 대한 새로운 정보도 많아졌는지, 혼자 숲을 걷는 외국인도 자주 볼 수 있다. 나도 언제가 타국의 숲으로 날아가 숲길을 걷는 상상을 하니 가슴이 쿵쾅쿵쾅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