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이미 Nov 08. 2021

비 오는 날


Ave Calvar Martinez 님의 사진, 출처: Pexels


아침에 일어났더니 비가 내렸는지 도로의 찻소리가 거세다. 길 위의 물방울과 타이어가 마찰되어 나는 소리가 계속 내 귀를 사로잡는다. '곧 그치겠지'라고 생각했는데 계속 비가 내린다. 오전 11시에 갈 곳이 있는데 하필 날을 잘못 잡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씨를 원망하다가 다시 마음을 바꿔먹었다. 날씨는 아무 죄가 없다. 그냥 오늘 빗방울을 뿌릴 뿐이다. 약속을 잡은 건 나의 자의이며 우연의 일치이다. 비가 온다고 하지 않을 일이면 나의 의지가 딱 거기까지인 것이다. 그렇게 정신을 차리고 버스를 타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분명히 가을이 온 지 얼마 안됐다고 생각했는데 어제(11월 7일)가 입동이었다. 말 그대로 겨울이 시작되는 날인데, 언제 입동이 온 것일까. 나는 분명 2시간 전까지 '가을비가 오네'라고 생각했다. 글을 쓰면서 찾아보다 어제가 입동임을 알았다. 엄밀히 말하면 가을비가 아니라 겨울비인 것이다. 예부터 절기가 바뀌는 것은 ‘비’가 알려준다고 했다. 겨울이 끝나갈 무렵 새싹을 틔우기 위해 내리는 것이 ‘봄비’이고, 봄에 핀 나무의 새순들이 커지기 시작해 무성한 잎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물이 필요한데 이 때 내리는 것이 ‘여름비’다. 비가 와도 후텁지근함이 가시지 않다가 어느 순간 내리는 비로 인해 서늘해지는데, 이것이 바로 가을을 알리는 ‘가을비’인 것이다. 가을이 지나갈 무렵 한해를 정리하고 다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예고라도 하듯 ‘겨울비’가 내린다.


앞에 가을이 아닌 겨울이 붙은 것만으로 비 자체도 춥게만 느껴진다. 저번 주 외출 시 코트를 입고 나갔다 더워서 좀 더 얇은 외투를 입었는데 오늘도 잘못 입고 나간 것 같다. 완연한 겨울에는 비를 자주 보지는 못한다. 원래 비를 좋아하기도하지만 자주 볼 수 없어서 더 생각나는 것도 같다. 물론 빗물이 내려 바로 얼음이 되는 단점이 있지만 싸늘하고 쓸쓸할 때 바라보는 겨울비는 내 마음 그 자체였다. 모든 사람에게 겨울비가 같은 이미지이진 않을 것이다. 김종서의 '겨울비'라는 노래 가사 '겨울비처럼 슬픈 노래를 이 순간 부를까'처럼 1월에 이별을 한 사람에게는 슬픔을 상징하는 이름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계절별로 비를 느끼는 감정이 다른 것 같다. 가을비도 역시 쓸쓸하다. 노랗고 붉게 물든 낙엽에 빗물이 떨어지는 광경은 보는 것만으로 상실감을 느끼게 하는 것 같다. 아까도 바닥에 널린 낙옆 위에 추적추적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센치해졌다. '정말 가을이 가네~'라고 생각했는데 이미 어제부터 겨울인 줄 모르고 가을 감성에 빠져 있었다. 깊어가는 가을 비가 내리고 우리는 정말 가을과 이별을 해야할 때가 오는 것이다. 그래도 내가 사랑하는 건 늦은 밤 빗소리마저 그치고 난 후 내려앉은 적요다. 모든 소음이 사라지고 난 이후 침묵을 사랑한다.


여름비는 청량하고 상쾌하다. 열대야로 인한 불쾌지수로 얼굴을 찡그리다가도 더운 열기를 누그러뜨리는 여름비가 내리면 잠시나마 웃는다. 아마 이 비가 내리고나면 다시 뜨거운 더위가 찾아올 것을 알기에 더 반가운 것인지도 모른다. 여름비는 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하고 기분이 좋지만 추억의 냄새를 각인시켜줬다. 어린 시절 마루에 앉아서 바깥에 내리는 비를 보고 있으면 집안으로 젖은 흙과 더운 공기가 더해진 특유의 냄새가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물기를 살짝 머금은 마루의 나무 냄새가 안방으로 들어와 잠시나마 이 순간이 아름답다고 느꼈다.


여름비 못지 않게 반가운 비가 있다면 봄비가 아닐까. 추위가 지겨워지고 답답해질 쯤 봄의 시작을 알리는 봄비. 비가 온 후 바로 날씨가 따뜻해지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는 봄비가 왔다는 것 자체로 봄이 온 것처럼 무척 기뻐했다. '이제 꽃이 피고 따뜻한 봄이 올 거야'라고 혼자 생각하면서 미처 도착하지 못한 봄을 기다렸다. 막상 봄이 왔을 때는 오기 전보다 기뻐하지 않았다. 겨울과 봄 사이 중간 길목에 서서 나는 봄을 몹시 그리워했다.


비가 오고 계절이 흘러가고 우리는 나이를 먹는다. 나는 늙어감이 아니라 성장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비 온 후 무지개가 아름답듯 우리도 비가 온 후 저마다의 무지개를 피워내 빛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계절에 맞게 현재를 온전히 즐기는 인생을 살아갔으면. 물과 빛과 공기가 빚어내는 자연의 예술 무지개처럼 나의 시간과 노력, 마음이 더해진 독창적인 무지개가 봄비와 함께 찾아오길.

작가의 이전글 내가 랜선집사가 된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