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책을 무료로 빌려주는 곳, 책을 읽거나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한국에 살 때 제가 제일 좋아하던 도서관은 성남 구미도서관입니다. 저는 아이가 어린이집에 갔을 때 이곳에서 독서를 하고, 문화강좌도 듣고, 구내식당에서 종종 밥을 사 먹었습니다. 또한 가끔 이곳 강당에서 아이와 함께 무료로 공연 관람도 했었습니다. 성남 구미도서관은 이렇게 전통적인 도서관의 기능을 넘어서 지역 주민들이 접근하기 편한, 자주 이용할 수 있는 커뮤니티 공간으로써의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제게 가장 기억에 남는 한국의 도서관입니다. 이곳처럼 영국의 도서관에서도공공도서관의 역할이 점차 확대되고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영국 맨체스터 지방의 지역 자치구 중 하나인 테임사이드(Tameside)의 도서관 통합 서비스를 한번 볼까요?
홈페이지를 보니 "모두를 위한 도서관"이라는 "Library for Everyone"이라는 카테고리가 눈에 띄네요. 그곳의 Access and Inclusion을 한번 클릭해 보았습니다.
청각 시각 장애인, 치매 환자, 해외 이주자, 성소수자 등등 사회적 약자들도 도서관을 잘 이용할 수 있게 도와주는 서비스를 갖추고 있어 섬세한 배려가 느껴집니다. 이 도서관의 서비스는 영국의 차별금지법(Equality Act 2010)의 적용이 공공도서관으로 확대되었음을 시사해줍니다. 그리고 도서관이 박물관과 마찬가지로 사회정의를 촉진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는 이론이 배경이 되었습니다. 영국의 문화정책 수립을 위해 보고서를 발간하고, 예술사업을 지원하는 기관인 영국예술위원회(Arts Council England)는 수년에 걸친 여러 사례연구에서 이를 목격해왔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2016년 영국 문화미디어스포츠부(Department for Digital, Culture, Media & Sport)에서는 도서관 태스크포스(Task Force)를 꾸려 소외된 지역과 사회적 취약계층에게 혜택을 주기 위한 혁신적인 도서관 서비스 개발 프로젝트 <Libraries: Opportunity for All>을 지원했습니다. 그 결과 46개의 도서관 서비스, 30개의 프로젝트가 선정되어 영국 정부의 지원을 받았고 테임사이드 도서관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모두를 위한 도서관, 보편적 도서관 제안
도서관의 중요성을 입증하고 도서관 리더들을 지지하는 비영리 기관인 라이브러리스 커넥티드(Libraries Connected)와 독서의 혜택을 알리는 비영리 독서단체인 더 리딩에이전시(The Reading Agency)는 2013년 보편적 도서관 제안(Universal Library Offers)을 처음 창안했습니다. 이것은 누구나 차별 없이 쉽게 도서관을 이용하고 그 혜택을 누리게 하도록, 21세기의 필수적인 도서관 서비스를 제안한 것입니다.
독서(Reading), 정보와 디지털 (Information and Digital), 문화와 창조성(Culture and Creativity), 건강과 웰빙(Health and Wellbeing)이 보편적 도서관 제안의 내용입니다. 이 기본 전제하에 서비스의 구체적인 실행은 도서관이 속한 지방정부와 도서관 운영진들의 역량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납니다. 지방정부가 그 지역의 사회적 상황에 따라 복지 서비스를 달리하는 것처럼 도서관 서비스의 운영계획도 지자체마다 방향성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곳은 자폐 친화 도서관이라는 기치를, 다른 어떤 곳은 치매 친화 도서관이라는 기치를 내세워 도서관 서비스에 주력합니다. 그리고 중앙정부의 지원금을 받기 위해 각 지역의 도서관 운영진이 열심히 아이디어를 내고, 기획안을 만들면 그곳의 도서관 이용자에게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갑니다.
독서(Reading)
공공도서관의 가장 기본적인 서비스는 주민들에게 책을 대여해주고 독서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독서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도서관에 다양한 종류의 책을 구비해 놓습니다.
-시각장애인이 독서의 어려움을 갖지 않도록 오디오 북이나 활자가 큰 책과 자료를, 장애를 가진 유아들이 볼 수 있는 다중감각 책을 제공합니다. 그리고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이민자나 난민이 많은 지역의 도서관은 그들의 모국어로 된 책과 잡지, 신문 등을 도서관에 마련해 놓습니다. 또한 성소수자들 관련 도서나 자료는 그들의 상징인 무지개를 책에 표시하여 찾기 쉽게 분류해둡니다.
정보와 디지털 (Information and Digital)
도서관은 실용적인 생활정보를 얻을 수 있는 주민 정보센터의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소외되는 자 없이 누구나 디지털 기술을 사용할 수 있는 디지털 인클루젼(Digital Inclusion)이 이뤄지도록 합니다.
-도서관 홈페이지는 원활한 도서관 서비스와 이용자의 편의를 위해 보기 쉽게 제작합니다.
-컴퓨터가 없는 사람들은 도서관에서 컴퓨터를 사용하거나 도서관에서 대여받은 태블릿을 이용하여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인터넷 이용이나 디지털 기기의 사용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은 도서관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도서관에서 제공하는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구직정보를 얻고 직원의 도움을 받아 컴퓨터로 이력서를 작성하는 법도 배울 수 있습니다.
문화와 창조성(Culture and Creativity)
도서관은 지역 예술단체와 파트너십을 맺어 수준높고 다양한 예술 프로그램을 제공합니다. 공연, 전시, 워크숍 등을 기획하여 호기심과 재미,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예술 경험과 창작 활동을 지원합니다.
건강과 웰빙(Health and Wellbeing)
일전에 다양성 관련 글에서 밝혔듯이 영국의 공공서비스는개인의 웰빙이 건강한 사회를 만든다는 전제하에 운영되고있습니다.외로움이나 고립감의 해소를 웰빙으로 보고, 도서관은지역주민들이 도서관에서 서로 어울리게 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합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치매환자를 위한 프로그램들입니다. 영국에는 혼자 사는 치매환자들이 많아서 이들이 쉽게 고립될 수 있는데, 만들기 워크숍이나 추억의 영화를 상영하는 이벤트 등을 기획하여 그들의 사교활동을 돕습니다. (한국에도 얼마 전에 이와 비슷한 성격의 치매 친화 영화관 '가치 함께 시네마'가 인천에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보편적 도서관 서비스는 시각과 독서장애인의 약속(Vision and Print Impaired People's Promise)과 어린이의 약속 (Children's Promise)에의해뒷받침됩니다.
시각과 독서장애인의 약속(Vision and Print Impaired People's Promise)은 시각장애와 여러 가지 신체적 인지적 불편함으로 인쇄물을 읽는데 어려움을 겪는 이들의 도서관 이용률을 증가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어린이의 약속 (Children's Promise)은 도서관에서 어린이와 청소년이 독서의 즐거움을 누리게 하고, 다양한 디지털 및 창조적인 예술 활동을 경험하게 합니다. 또한 그들이 정보를 획득하고, 지식을 습득하며 문해력을 향상할 수 있도록 다양한 책과 자료를 지원해줍니다. 궁극적으로는 도서관이 그들의 건강한 삶에 기여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럼, 이 글에서는 보편적 도서관 제안이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어떻게 적용되었는지 영국예술위원회의 사례 보고를 통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영유아를 위한 서비스
북스타트(Bookstart)는 1992년 영국에서 시작된 생애 초기 영유아 독서습관 형성을 위한 운동이면서 세계 최초의 국민 책꾸러미 선물 프로그램입니다. 만 4세까지의 영유아는 독서자선단체인 북트러스트(BookTrust)에서 발달단계에 맞춰 기획한 책꾸러미를 받습니다. 시각 장애와 청각 장애를 가진 영유아를 위한 책꾸러미도 각각 별도로 마련되어 있습니다. (현재 북스타트는 우리나라 지자체를 비롯해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시행 중입니다.) 보통 도서관에 문의하면 북스타트 책꾸러미를 받아볼 수 있습니다.
북스타트 책꾸러미, 출처: BookTrust
도서관에서 영유아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는 스토리 타임(storytime), 동요를 함께 부르거나 비슷한 소리가 나는 단어들로 된 책을 읽으며 놀이를 하는 라임타임(rhyme time) 프로그램 등을 제공합니다. 웨스트서식스 도서관에서는 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위한 다중감각 스토리 타임 프로그램을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다양한 프로젝트
영국 문화미디어스포츠부(Department for Digital, Culture, Media & Sport)는 2016년 도서관 전담반을 구성해 소외계층에 도서관 혜택을 주기 위한 혁신적인 도서관 서비스 프로젝트 <Libraries: Opportunity for All>에 약 61억원을 투자했습니다. 그 결과 많은 도서관에서 각 분야의 최고 전문가와 손잡고 수준 높은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였습니다. <Libraries: Opportunity for All>을 포함하여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했던 몇 가지 흥미로운 프로그램들을 소개해보겠습니다.
#TechPlay
방학 동안 아이가 학교에 가지 않을 때 대안적인 학습 공간으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은 아무래도 책이 많은 도서관이 아닐까 합니다. 샌드웰(Sandwell) 지역의 도서관 6곳에서는 방학기간 동안 아이들이 다양한 디지털 기기를 경험하며 놀 수 있는 테크 플레이 기회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VR기기, 아이패드 태블릿, 3D doodler pen, 3D 프린터, 로봇키트를 이용하는 색다른 경험 때문에 2000명의 아이들이 도서관을 찾았습니다.
출처: https://dcmslibraries.blog.gov.uk, libraries opportunities for all
#Game workshop
책을 싫어하더라도 컴퓨터 게임을 싫어하는 아이들은 없을 것입니다. 노팅엄 시티(Nottingham City)의 도서관에서는 만 11세부터 25세의 저소득층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게임 만들기 워크숍 <Storysmash>를 일 년 동안 진행했습니다. 전문가의 지도 아래 Twine이라는 오픈소스 도구를 사용해 자신만의 게임을 만들며, 게임으로 스토리텔링 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아이들은 게임 주제를 정하고, 캐릭터를 개발하고, 플롯을구성하는 과정을 통해 자기표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문해력을 향상하고 디지털 기술을 습득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게임업계 전문가의 강연을 듣는 마스터클래스를 들으며 자신의 진로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Comic Book Club
요크셔 북부의 스킵톤(Skipton) 도서관은 십 대 청소년들과 함께 팀 케첩(Team Ketchup) 만화책 클럽을 운영했습니다. 클럽활동에 아이들의 적극적인 의견이 반영되고, 인기가 많아 웨이팅 리스트까지 있던 만화책 클럽입니다. 만화를 읽고 만화에 대해 토론하는 것뿐만 아니라 다양한 만화가들과의 워크숍도 진행했습니다. 만화책 클럽을 통해 아이들은 직접 만화책을 만들고 그중 몇몇은 자가 출판물로 발간했습니다. 또한 영국의 만화책 축제인 Thought Bubble Festival에 아이들이 직접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팀 케첩의 연장자들은 자기보다 어린 초등 동생들을 위한 6주간의 짧은 만화책 클럽을 직접 운영하며 자신들의 기술과 정보를 전수해주기도 하였습니다.
#LGBTQ 프로젝트
성소수자가 비교적 많이 거주하는 지역인 브라이튼 앤드 호브(Brighton and Hove) 지역의 도서관에서는 만 13세부터 25세까지의 청소년 성소수자를 대상으로 사진을 이용한 일상 기록 프로젝트 <Into the Outside>를 진행했습니다. 수준 높고 전문적인 사진 예술 기관의 도움으로 리서치 기술과 사진 찍는 법을 배우며 성소수자로써 겪은 경험과 자기 정체성에 대해 표현하고 기록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프로젝트로 완성된 사진은 지역 도서관 및 성소수자를 위한 온라인 웹사이트 등에 전시되었습니다.
#Film Making
리즈(Leeds) 지역에서는 친부모의 질병, 가출, 이혼, 수감, 학대, 사망 등의 사유로 과거에 위탁가정의 돌봄을 받았던 16세에서 25세 청소년들을 위한 도서관 서비스를 구축했습니다. 사회적 보호를 받았던 500여 명의 지역 청소년들이 독립해서 잘 지낼 수 있도록 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정보나 활동을 도서관에서 제공해주는 것입니다. 우선, 생활 정보 책자 등을 만들어 이들에게 배포하고 도서관에서 실용적인 상담이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렸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리즈 중앙 도서관(Leeds Central Library)은 이들과 함께 영화 만들기 프로젝트 <Writing Britain>를 진행했습니다. 이 도서관은 멀티미디어, 음악, 사진, 영화 장비 및 소프트웨어 패키지를 구비하고 있는 스튜디오 'studio12'를 운영중인데, <Writing Britiain>은 이곳에서 제작되었습니다. 이 영화 프로젝트를 위해 청소년들은 우선 자신이 직면하고 있는 어려움이나 고민 등을 글로 표현하는 글쓰기 수업을 받습니다. 몇 개월에 걸친 전문가와의 글쓰기 수업을 통해 영화에 사용할 자작 시를 완성하고, 영화감독을 비롯하여, 지역의 영화 관계자와 함께 단편 영화를 직접 만들어봅니다. 영화에 직접 출연하여 시를 낭송하는 완성도 높은 이들의 영화는 지역 영화제인 리즈 국제영화제(Leeds International Film Festival)나 BBC 방송을 통해서도 선보입니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청소년들의 이슈를 이해하기 위한 참고 자료로 공공기관에서 사용되기도 합니다. <Writing Britain>은 어려움을 겪었던 청소년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잠재된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프로젝트로 지금까지 활발히 지속되고 있습니다.
리즈국제영화제 참가작 <Flight>, 출처: https://studio12.org.uk
#Theatre Project
테임사이드 도서관에서는 사회적인 돌봄을 받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공연 프로젝트 <Theatre Tracks>를 진행했습니다. 영화와 웨스트엔드 연극으로도 제작되었던 영국 청소년 문학의 고전 <철도 위의 아이들(The Railway Children>을 공연으로 발표하는 프로젝트였습니다. 지역 어린이 자선단체의 후원과 무용단의 연기 지도, 그리고 과거 돌봄 대상 아동이었던 청소년들과의 상담을 통해 프로젝트를 발전시켰습니다. 갑자기 멀리 떠난 아빠를 그리워하며 매일같이 기차역으로 나가는 세 아이들의 이야기가 친부모와 떨어져 지내야 하는 위탁가정 아이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입니다. 증기기관차가 다니던 기차역이 소설의 중요한 배경이어서 프로젝트에 참여한 아이들은 증기기관차에 탑승해보는 즐거운 시간도 가졌습니다.
그밖에 장애아동, 난민으로 이주한 아동 등을 위한 프로그램 등 다양한 사회적 경제적 상황에 처한 청소년들을 위한 프로그램들이 도서관에서 운영되었습니다.
영국 정부가 이렇게 막대한 돈을 도서관에 투자하면서까지 소외 계층을 위한 혁신적인 프로그램들을 기획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우선 책에 관심 없는 아이들을 도서관으로 오게 만들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도서관에 오면 아이들이 서가의 책들을 보게 될 것이고, 그중에 하나라도 꺼내보게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에서 그랬을 것입니다. 책을 보며 그들이 힘든 현실을 잠시 잊고 삶을 긍정하게 되길 바랬을 것입니다. 영국예술위원회의 도서관 담당자 Brian Ashley가 말한 것처럼 '도서관은 삶을 바꾸는 힘'을 지닌 곳이기 때문입니다.영국 정부는 도서관을 책 속의 이야기처럼 신나는 일이 벌어지는 흥미로운 공간으로 만들고 싶어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도서관이라는 공간이 소외되는 자 없이 누구나 쉴 수 있는 주민들의 쉼터이자 배움의 장소라는 것을 꼭 알리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영국의 보편적 도서관 서비스를 보며 21세기형 도서관은 누구나 작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