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데기를 벗어야만 행복해지나요

어른을 위한 창작동화

by 마이드림

며칠 전에 말이에요.

내가 다른 친구들과 다르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됐답니다.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거든요.



그날은 드디어 내가 입고 있었던

딱딱한 껍데기 옷을 벗어던져야 하는

중요한 날이었어요.


나보다 먼저 대기 중이었던 친구들은

손가락 님의 도움을 받아

모두 쉽게 껍데기 옷에서 빠져나왔답니다.

그렇게 껍데기 바깥으로 나오는 순간

우리들의 임무수행이 시작된다고 배웠지요.


껍데기를 벗고 나면 초록빛 말간 얼굴로

고소한 냄새를 솔솔 풍기면서 입속 동굴의

긴긴 통로를 따라 이동하게 되는데요.

이동의 최종 목적은 몸에 좋은 영양소를

배달하는 일이랍니다.

되게 보람 있는 일이죠?


먼저 입속 동굴에 들어가야 해요.

동굴 입구에는 가로로 된

두 개의 말랑말랑한 문이 있고요.

이 문은 위아래로 벌어진답니다.


동굴의 천장과 바닥에 박혀 있는

많은 바위들은 위아래가 계속 맞닿으며

잘게 부수는 작업을 해요.

여기서는 오도독 장단에 맞춰서

우리의 몸을 최대한 작게 만들어요.

그래야 통로가 좁아질 때도

쉽게 이동할 수가 있으니까요.


그다음엔 좁고 긴 통로에 진입하기 위해

꿀꺽 장단에 맞춰 씩씩하게 뛰어내리는

다이빙도 필요해요.

끝이 보이지 않는 좁은 통로를 계속

매끄럽게 미끄러져 내려가기 위해선

용기가 필요하답니다.



이 모든 과정의 첫 시작이 바로

우리들의 몸을 감싸고 있는

딱딱한 껍데기 옷을 확 벗어던지는

일이라고 배웠어요.


이 딱딱한 껍데기 옷을

혼자서 벗어던질 수는 없고

입속 동굴에 입장할 시기가 되면

담당자인 손가락 님의 도움을 받아야 해요.

손가락 님이 조금만 도와주면 어렵지 않게

모든 준비를 마칠 수가 있지요.


가끔씩 손가락 님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혼자서 씩씩하게 껍데기 옷을 벗어던지는

선배들이 있었다고 전해져 오긴 하더라고요.


혼자서도 가능한 일이라면, 손가락 님이

도와줄 때 더 쉽게 해결되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별로 걱정을 안 했죠.

나도 다른 선배들처럼 자연스럽게

잘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아, 그런데 내가 손가락 님에게

'탈락'이라는 말을 들을 줄이야!


피스타치오 한 줌 대기자 중에서

나만 유일하게 탈락한 거 있죠.

껍데기가 안 벌어져서 말이에요.


손가락 님이 내게 말하더군요.

"혹시 준비 사항을 잊어버린 건가요?

일단 스스로 껍데기를 좀 벌리고 와야

내가 도와줄 수 있어요.

조금 더 노력해 보고 다시 오세요."


아, 그러고 보니까 다른 친구들은

껍데기가 탁탁 예쁘게 벌어졌는데

나만 여전히 꽉 닫혀있는 상태이긴 했어요.

이렇게까지 안 벌어질 건 몰랐던 일이에요.


나는 결국 한 줌 선발대에 뽑히지 못하고

다시 대기자가 되어야 했지요.

나는 어떻게든 껍데기가 벌어질 수 있도록

열심히 힘을 주는데만 집중했어요.


끙.................!

끙.....................!

끙...........................!


날마다 얼마나 힘을 주었던지

몸속의 열매는 쪼그라들고

껍데기가 부들부들 떨리는 것만 같았어요.


그런데 내 껍데기는 어찌 된 일인지

아무리 끙끙끙 호흡을 열심히 해도

도무지 벌어질 생각을 안 했어요.


같은 봉지 안에 있으면서도

껍데기가 벌어지지 않은 피스타치오는

여전히 나 혼자밖에 없었어요.

한 번도 아니고 몇 번씩이나 한 줌 선발대에서

탈락을 하니까, 다른 피스타치오들이

수군대기 시작했어요.


"쟤는 아무래도 불량인가 봐."

"아무래도 불량인 거 같지? 계속 저렇게

탈락하는 것을 보면 말이야."


나는 불량이라는 소리가 너무 싫었어요.

그 말이 가시처럼 마음에 박혀

나를 계속 찔러대는 것만 같았어요.


내 존재가 가치 없어져 버린 것 같아서

며칠 사이에 무지 소심해지는 기분이었어요.

다른 피스타치오들의 수군대는 시선 때문에

우울증이 생길 것만 같은 거예요.


그러다 생각했죠.

나는 나인데 왜 자꾸 다른 친구들의 말에만

내 생각을 맞추려고 하는 거지?

다른 친구들이 껍데기가 벗겨질 때

내가 똑같이 벗겨지지 않는다고 해서

이게 우울할 일인 건가?

다른 피스타치오들과 같은 길을 가지 못하면

나는 불행해지는 것일까?

계속 나에게 질문을 던지게 되더라고요.


고민을 거듭하다 내가 내린 결론은요.

나는 껍데기가 벗겨지지 않고 있지만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 존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영양소 가득한 먹거리로의 삶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내 껍데기 옷을 벗어던지지 않는다 해도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는걸요.



그렇게 마음을 정리한 후에

다시 손가락 님과 만나게 됐어요.

손가락 님은 여전히 똑같은 나의 상태를 보며

걱정스럽게 묻더군요.


"피스타치오 님!

끙끙끙 호흡법 열심히 한 거 맞아요?

며칠 전과 달라진 것이 전혀 없는데요?

이젠 안 되겠어요.

어쩔 수 없이 충격 요법을 써야 할 거 같아요.:


"손가락 님! 충격 요법이라뇨?"


손가락 님은 대답을 하지 않고

나를 가만히 집어 들더니

바닥을 향해 힘껏 내동댕이쳤어요.


"으악, 피스타치오 살려!!!"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정신이 없고

딱딱한 껍질에 싸여 있는데도

바닥에 떨어질 때 제법 세게 박아서인지

충격이 전해지더라고요.


바닥에 던져도 여전히 멀쩡한 나를 보며

손가락 님이 말했어요.

"정말 신기할 정도로 단단하네요.

내가 만났던 피스타치오들 중에

당신이 제일 단단한 거 같아요.

어쩜 이렇게 꿈쩍도 안 할까요?"


"손가락 님! 저는 이런 방법은 싫어요!

너무 아프잖아요.

이때까지는 그냥 시키는 대로 살았는데요.

내가 왜 이 껍데기 옷을 벗어야만 하는지

그 이유도 솔직히 모르겠어요.

다른 친구들이 가는 길을 나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따라 하려고만 했던 거 같아요.

내가 이렇게 내동댕이쳐지는 고통까지 감수하며

이 껍데기를 벗어야만 행복해지나요?"


"글쎄요. 행복해지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피스타치오들이 당연하단 듯이

단단한 껍데기를 벗어던지는 과정을 거치니까요.

나는 손가락으로서 당신의 껍데기 옷을 벗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할 나의 임무가 있는 것이고요."


그러면서 손가락 님은 나를 집어 들더니

다시 바닥으로 세게 내동댕이를 쳤어요.

이왕 시작된 거니 껍데기가 깨질 때까지

한 번 해보겠다는 마음 같았어요.


"으악... 피스타치오 살려!"

나는 또 비명을 질러야만 했어요.


그렇지만 나는...

슝 날아서 바닥에 곤두박질치기를

몇 차례나 반복하는 충격 요법에도

꿈쩍도 하지 않는 단단한 껍데기를 가졌지 뭐예요.

계속해서 충격이 가해지니까 멍든 것처럼

껍데기에 얼룩이 남더라고요.


나는 다시 손가락 님에게 말했어요.

"손가락 님! 이제는 정말 안 되겠어요.

이런 충격 요법은 참을 수가 없어요.

이제 내 마음을 확실히 알게 됐거든요.

나는 껍데기 옷을 입은 내 모습이 싫지 않아요.

나는 결심했어요.

지금 이대로의 내 모습으로 존재하고 싶어요."


손가락 님은 아무리 충격을 가해도

변하지 않는 내 모습에 안쓰러움을

느낀 걸까요.

아니면 그냥 내 말처럼

지금 이대로의 내 모습을 인정해 주기로

한 것일까요?


손가락 님이 내게 이렇게 말했어요.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당신의 껍데기가

꿈쩍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것이

당신의 길이 아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여기선 당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없을 것 같으니

내가 당신을 다른 곳으로 옮겨줄게요.

그래도 괜찮겠어요?"


"오, 정말요? 너무 좋아요.

어떻게든 나의 껍데기를 벗겨주기 위해

애써준 마음 고마웠어요."



손가락 님은 나를 집어서 옮겨주었어요.

책장에 놓인 통으로 말이에요.

하얀 뚜껑을 열더니 하얀 통 안에

나를 살포시 내려놓고 바쁜 일이 있다면서

돌아갔어요.


나는 충격 요법으로 몸이 놀란 데다

갑자기 들어 올려 이동을 시키는 바람에

멀미가 나서 어지러움을 느꼈어요.

그래서 잠시 바닥에 엎드려 있었는데요.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저기요. 괜찮으세요?"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였어요.

돌아보니 나처럼 껍데기 옷을 입은

귀여운 친구가 나를 보고 있었어요.


"어머, 다른 분이 계셨네요?

혹시 이곳에서 오래 지내셨나요"

내가 물었죠.


"네, 오래됐죠. 한 7년쯤?"


"와, 정말요?

그럼 껍데기 옷을 그대로 입고 살아온

당신의 시간들은 어땠어요? 괜찮았나요?

당신도 나처럼 껍데기를 벗고 해야 할 일이

있었을 것만 같아서요."


"맞아요. 나는 껍데기 옷을 벗고서

도토리묵이 되었어야 했는데,

나는 내 껍데기 옷을 아주 좋아했거든요.

이 모습 그대로 살고 싶었어요.

손가락 님이 내 이야기를 듣고

이곳에 데려다주셨지요.

이곳에서 조용히 지내는 일상이 나는 좋아요."


"정말 너무 반가운 말이네요.

내가 너무 듣고 싶은 말이었어요.

정식으로 인사할게요.

내 이름은 피스타치오! 당신은요?"


"나는 도토리예요. 당신도 나처럼

껍데기 옷을 입고 있네요?

비슷한 모습의 친구를 만나서 반가워요.

우리 잘 지내봐요."


그렇게 우리는 하얀 통해서 만났고

나처럼 껍데기 옷을 입고 있는 모습에

친근함과 반가움을 느꼈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면서 점점 친해졌어요.


우리의 인연은 손가락 님이

만들어준 것인 만큼, 그분에게

날마다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어요.


마음이 잘 맞는 친구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얼마나 소중한지 몰라요.

우린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서로를 존중하며

행복이란 감정을 느끼고 있답니다.




오늘은 깜짝 손님이 방문했어요.

책장 근처를 지나가던 손가락 님이

우리 생각이 났다면서 잠깐 들렀지 뭐예요.


손가락 님은 꽤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꼭 붙어 있는 우리를 보더니

흐뭇하게 미소를 짓더라고요.


"오, 두 분의 모습이 너무 좋은데요.

나는 지금 이 순간을 오래오래 간직할래요.

그러니까 두 분 스마일 해보세요."


도토리와 나는 너무 부끄럽지만

손가락 님을 향해 활짝 웃어주었어요.

스마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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