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을 위한 창작동화
처음 냉장고에 들어왔을 때 말이에요.
우리는 시원한 바람 쐬며
쉬는 시간을 충분히 가질 수 있었어요.
다른 팀들처럼 먼지 묻은 겉옷을 떼어내는
작업을 할 필요가 없었거든요.
처음 이 집에 오던 날 보니
같은 장바구니에 담겨온 대파 팀한테는
주인의 손이 바빠 보였어요.
흙 묻어 덥수룩한 수염도 자르고
겉옷에 묻은 흙도 말끔히 씻어내고
깨끗해지기 위한 준비과정 때문에
손이 많이 가는 대파였죠.
대파 팀에 비하면 우리 팀은
얼마나 한가했는지 몰라요.
마트에서부터 이미 말끔한 모습으로
준비되어 있었던 우리들이었거든요.
언제든 불러만 주면 멋진 활약을 할 수 있는
깐 마늘 팀이 내가 속해 있는 팀이었어요.
마늘의 역할이 얼마나 큰지 계속 들어왔기에
우리들은 자부심이 있었답니다.
모든 요리야 기다려라!
내가 멋지게 활약해 주겠어라고 생각했어요.
정확하게 어떤 요리에 배정될지는 몰랐지만
나에게는 꿈이 있었어요.
나는 내 몸이 고대로 유지될 수 있는
장아찌가 되고 싶었어요.
잘 삭혀서 아삭아삭 소리 나는 장아찌!
너무 매력적이잖아요.
비나이다 비나이다.
나를 마늘장아찌가 될 수 있게
팍팍 밀어주소서.
그렇게 부푼 꿈을 안고 대기 중이었죠.
그러다 옆자리 유리 반찬통에 담겨 있는
마늘 선배님을 만났지 뭐예요.
소고기장조림 위에 놓여 환하게 빛나고 있는
마늘 선배였어요.
소문으로 전해 듣던 마늘장아찌 선배처럼
아삭해 보이는 느낌은 아니었고,
뭔가 푹 삶아진 물러 보이는 선배이긴 했지만
여전히 마늘의 몸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 기품 있고 아름다워 보였어요.
나는 내 모습이 변하지 않고
내 몸이 고스란히 유지되는 마늘이길
늘 소망했어요.
마늘이 요리의 보조 역할인 거 말고
메인 요리와 함께 멋짐을 뽐낼 수 있는
그런 멋진 마늘이 되고 싶었어요.
선배를 보면서 내 꿈을 다시 확인하는 순간이었죠.
나는 용기를 내서 멋진 선배에게 인사를 건넸어요.
"안녕하세요? 선배님...
저도 선배님처럼 멋있는 마늘이 되려면
무엇을 준비하면 될까요?"
"아고, 어쩌냐.
집주인은 나 같은 모습으로
요리를 하진 않던데..."
"그럼 선배님은 어떻게?"
"나는 주인의 엄마가 만들어서 보냈어."
"아, 그래요?
선배님의 모습이 너무 멋졌지만
할 수 없죠 뭐.
그럼 저는 마늘장아찌가 될래요."
"얘야, 너는 집주인에 대해 아는 게 없구나?
집주인은 요리의 다양성 같은 거 안 키워.
장아찌 같은 거 만들어 본 역사가 없거든.
쪽마늘 들어간 요리 같은 거 절대 안 해."
"그럼, 우리들은 할 일이 없어요?"
"아니, 그렇진 않아. 단지 네가 원하는
모습이 아닐 뿐이야. 내가 이 집에 좀 있어보니
마늘을 사용하는 방법이 한 가지뿐이더라."
선배의 마지막 말에는 다른 마늘 친구들도
웅성거리기 시작했어요.
우리들이 다양하게 매력을 뽐내는 것이 아니라
다 똑같은 한 가지 모습으로만 사용된다는 게
조금 실망이 되는 기분이었죠.
그렇게 며칠이 지났어요.
오늘은 드디어 우리들도 맛있는 요리에
참가하려나 봐요.
장조림에 들어있던 선배의 말이
계속 신경 쓰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완전히 기대를 버린 건 아니었어요.
그사이 주인이 다른 방법에도 관심이 생겼을지
어떻게 알겠어요.
끝까지 희망을 버리진 않았죠.
그런데요.
아까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았던
커다란 탑이 우리 눈앞에 보이는 순간
뭔가 두려운 마음이 들었어요.
저 탑은 뭐지?
높은 탑의 뚜껑이 열리면서 마늘들이 옮겨졌고
잠시 후, 윙... 드르륵... 득득... 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탑에서 소리들이 들려왔어요.
"아, 어지러워. 왜 이렇게 돌리는 거야?"
"윽... 너무 아파. 몸이 갈리고 있어."
도대체 저 공포스러운 탑은 뭔가 했더니,
옆에 있던 그릇 아주머니가
저건 믹서기라고 알려주었어요.
집주인은 마늘을 갈아서 소분한 다음
냉동실에 얼렸다가 하나씩 꺼내어
사용한다지 뭐예요.
으... 나는 싫어요!
마늘들도 다 각자의 꿈이 있다고요.
왜 다 똑같이 갈아버린다는 거예요?
나는 간 마늘이 되기 싫어요.
이렇게 예쁘게 생긴 나를 왜 갈아버리려고 해요?
나만 꿈이 있는 건 아니었어요.
내가 활동하고 싶었던 분야가 장아찌였다면
마트에서부터 내 옆자리에 있었던 친구는
오동통하고 볼록한 자신의 몸이 싫어서
얇게 다이어트된 편마늘이 되고 싶댔어요.
파스타를 빛내주는 마늘이 되고 싶다나요?
마트 진열대에 우리가 대기 중일 때
문이 열릴 때마다 바람 아저씨가 소식을
전해주곤 했거든요.
바람 아저씨가 여기저기 돌아다닐 때
마늘 냄새가 너무 좋아서 구경한
파스타 가게 이야기를 듣고부터는
내 친구는 온통 그 생각밖에 안 했어요.
올리브오일에 지글지글 몸을 지지면서
딱 보기 좋게 노릇노릇 태닝 한 후에
건강해 보이는 피부를 자랑하며
파스타 면을 빛내주는 편마늘이 되겠다는 다짐을
여러 번 내게 들려주곤 했어요.
물론 나는 그 친구와 생각이 달라서
지금 그대로의 내 몸이 좋았어요.
이 몸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게
마늘장아찌가 되고 싶었지요.
장아찌가 되면 예쁜 유리병 속에 들어가서
서서히 익어갈 수도 있을 테고
나는 유리병 바깥을 구경하며
즐겁게 노래나 불러야지 했었답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꿈을 응원했어요.
인간이 아닌 우리들에게는
아무런 선택지가 없다는 것을
모르고 말이에요.
위잉... 위잉... 드르륵 소리가 날 때마다
우리 마늘 친구들은 날씬해지다 못해
반죽처럼 뭉개져서 나오더라고요.
믹서기의 뚜껑이 열릴 때마다
나는 당황스러웠어요.
아... 역시 나는 싫어요!
선택할 자유도 없이 우리 팀 모두를
다 갈아버리려는 게 어딨어요?
우리에게 선택하게 해 달란 말이에요.
아무리 외쳐봐도 내 순서는 다가왔죠.
나는 눈물이 났어요.
갈아지면 내가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아서
너무 슬펐어요.
내가 자꾸 우니까 믹서기 아주머니가
말해준 게 뭐였냐면요.
"얘야, 그렇게 울지 마라.
네가 걱정하는 것처럼
너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란다.
간 마늘이 된 너도 분명히 멋질 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내 말을 한번 믿어보렴."
"정말요?"
나는 훌쩍이면서 물었어요.
"그럼, 네가 모르던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질 거야.
자, 이제 준비 됐니?"
윙.........
나는 믹서기 아주머니 품에서 빙글빙글 돌았어요.
조금 어지러웠고, 꽤 아팠던 기억도 나요.
그리고... 그리고...
내가 얼마나 잠을 잤을까요?
내가 눈을 떴을 땐 냉동실로 옮겨져 있었어요.
한 숟갈씩 소분되어서 말이에요.
깊은 잠에서 깨어났기 때문인지
슬픈 기억이 냉동됐기 때문인지
뭔가 새로운 희망이 솟아나는 기분이었어요.
"어? 그런데 갈아져도 정말 괜찮네.
나는 여전히 나인데?"
지금 나는 주인의 손에 잡혀서
요리에 참여하고 있어요.
메뉴는 두부조림이랍니다.
양념장에 내 몸이 푹 잠기고 잘 저어진 후에
두부 위에 뿌려진 순간,
아, 너무 좋은 냄새가 퍼지기 시작하네요.
"역시 마늘향이 최고야! 음... 너무 맛있어."
주인의 만족하는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이제 나도 알겠어요.
두부가 주인공이고 갈아진 내가 잘 안 보여도
내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말이에요.
잘게 갈아져 양념장에 파묻힌 나여도
마늘향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더라고요.
오늘 나는 주인공 두부를 더욱 빛나게 해주는
마늘이 되었답니다.
내가 주인공이 아니면 슬플 거라 생각했는데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기쁨이 크다는 것을
알게 된 날이에요.
내가 모르던 세상이 펼쳐졌지만
지금도 내가 행복한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