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을 위한 창작동화
내가 서있는 곳은 버스정류장 옆인데요.
바로 앞쪽으로는 전철역이 있어서
지상으로 오가는 전철을 수시로 볼 수 있답니다.
뒤쪽 차도에서는 온갖 종류의 차들이
지나다녀서 좀 시끄러울 때도 많아요.
나는 아주 높이 매달려 있어서
대부분의 것들을 내려다보면서 살아요.
아차차, 내 소개가 늦었네요.
나는 버스정류장이 위치한 인도 옆에서
근무 중인 가로등이랍니다.
사실 나는 가로등 일이 적성에 맞지는 않아요.
자유롭게 돌아다니면서 살고 싶은데
이렇게 한 곳에 붙박이처럼 고정되어 있다는 게
너무 답답하고 마음에 들지 않거든요.
하필 내가 전철역을 바라보면서
살고 있어서 더 그런지도 모르겠어요.
제일 부러운 것이 전철이거든요.
전철은 나보다 몇 배는 긴 몸을 가지고도
저렇게 마음껏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서
다른 동네도 구경하면서 살잖아요.
그런데 나는 이게 뭐예요.
움직이지도 못하고 한 곳에만 묶여서
날이면 날마다 똑같은 곳만 보면서
불을 밝히는 밤 근무만 해야 하다니!
얼마나 전철이 부러웠는지 몰라요.
나도 다른 곳으로 훌훌 떠나고 싶단 말이에요.
자기들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인간들의
자유로운 움직임도 너무 부러웠어요.
인간들이 밤에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건
내가 환하게 밝혀주기 때문이잖아요.
왜 나는 움직이지도 못하면서, 인간들을 위해
봉사하고 있는지 짜증이 나더라고요.
새들도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마음대로 날아다니는데,
저렇게 점같이 작기만 한 벌레들도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자유가 있는데,
왜 나는 낮도 아닌 밤에만 불 밝히면서
고생을 하고 있는 건지 속상했어요.
많고 많은 것들 중에서
왜 하필 가로등으로 태어난 건지
너무 마음에 안 들었어요.
내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나 보니 이미 가로등!
밤 근무하는 삶으로 정해져 있더라고요.
나한테 뭐로 태어날래? 미리 물었다면
나는 절대로 가로등은 안 했을 거예요.
밤 근무 너무 싫어요!!!
나한테 투덜댄다고만 하지 말고,
밤에 일해봐요. 얼마나 힘들다고요.
사람들이 적게 다니는 새벽쯤 되면
너무 조용하다 못해 적막하기까지 한 분위기도
내가 날마다 겪어야 하는 힘든 일 중의 하나랍니다.
조용한 세상을 묵묵히 밝히고 있는 일은
너무나 외로운 일이거든요. 흑흑...
그런데 밤 근무가 싫은 것과는 별개로
가끔씩 보람이 느껴질 때도 있긴 했어요.
내가 특별히 원한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나의 존재가 인간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을 때였어요.
늦은 밤 정류장에 혼자 앉아 있던 여자가
내 불빛을 보면서 안심하는 표정을 지을 때
나도 그 표정 때문에 같이 웃을 수 있었고요.
정류장 옆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내 불빛 때문에 어두워도 넘어지지 않고
잘 걸어가는 것을 보았을 때도 보람을 느꼈죠.
전철역에서 나오는 사람들이 정류장까지
내 불빛을 따라서 잘 걸어오는 것을 볼 때도
내가 좋은 안내자가 된 것처럼 아주 많이 뿌듯했어요.
열대야가 극성인 밤이나,
한파가 극성인 밤이나,
태풍으로 비바람이 몰아치는 밤이나,
날씨의 변화 때문에 몸이 고통스러운 순간도
너무너무 많았거든요.
힘들다 힘들다 하면서도 또 묵묵히
그 일들을 다 참아내긴 했어요.
그런데 웃긴 건요.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밤 근무를 하면서
인간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 있을 때마다
내 마음속 어딘가로부터 기쁨의 감정도 함께
커져가고 있었다는 것이 아이러니랍니다.
밤근무하는 내 근무환경이
나는 너무 싫은데, 그러면서도
나를 보면 안심하는 인간들의 그 표정이
신기하게도 나를 기운 나게 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매일 투덜대며 일하다 보니
어느새 익숙해져 있던 나의 일.
점점 처음만큼 괴롭지는 않더라고요.
가끔 느끼는 보람과 익숙함에 스며들어
습관적으로 그냥 일을 하고 있는 날들이었어요.
그런데 오늘은요.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어요.
평소라면 깊이 잠들어 있었어야 할 내가
전원도 안 들어왔는데 다른 시간에 갑자기
눈을 떴지 뭐예요.
그리고 보았죠. 한낮의 뜨거운 세상을!
인간 세상을 숨 막히게 만들고 있는 폭염 때문에
그 강렬하고도 뜨거운 열기가 내 뒤통수를 자극해서
전원도 안 들어온 내 의식을 깨울 줄이야!
이건 분명히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거든요.
전구에 불도 안 들어온 내 몸인데
의식만 있는 상태니까요.
그런데 처음으로 보는 낮 세상이 너무 좋았어요.
너무너무 신이 나더라고요.
와, 낮에 보는 전철도 멋졌어요.
역시 전철은 나의 로망이에요.
나는 다시 태어난다면 저렇게 길고 멋진
전철로 태어나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거예요.
와, 늘 내 눈앞에 서있었던 나무들이
낮에 보니까 저렇게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싱그러움을 가지고 있었군요.
자연광을 받은 나무들이 이렇게 예쁘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나는 그동안 내 불빛을 받아서
나무들이 예뻐 보인다며 착각하고 살았거든요.
무엇보다도 낮에 보니까 놀라웠던 건요.
밤에는 미처 몰랐던 많은 풍경들이
펼쳐지고 있었다는 거예요.
안 보였던 것들이 보이더라고요.
밤에만 볼 때는 전철과 버스정류장 주변이
너무 적막해 보이더니,
환한 대낮에 보니까 이곳도 상당히 많은
건물들이 서있는 곳이었어요.
오랜 세월을 봤음에도 그걸 몰랐었답니다.
눈이 부시는 낮 풍경에 들뜬 것도 잠시
뒤통수가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어요.
이게 바로 인간들이 고통스러워하는 폭염의 날씨로군요.
무더운 밤에 근무하기 싫다고 투덜댔었는데,
낮의 이 뜨거운 열기에 비하면 밤에는 그나마
많이 숨쉬기 좋아진 거였단 걸 알겠어요.
그 순간 너무나 부끄러웠어요.
낮이라 얼굴 표정이 선명하게 잘 보이니까
알게 된 게 있는데요.
낮에 활동하면 세상이 밝다는 이유만으로
다들 웃고 행복하기만 할 거라 상상했었는데
인간들 보니까 아니었어요.
너무 뜨거운 더위에 다들 지쳐 보이고
얼굴에 짜증도 묻어나네요.
아무래도 가로등인 내가
한낮에 뜬금없이 눈을 뜨게 된 건
내가 너무 투덜대니까 반성 좀 하라고
폭염의 신이 낮 체험 시켜주시는 건가 봐요.
자, 보렴. 가로등아!
너만 세상에서 제일 힘들다고 생각했니?
낮에도 다들 이렇게 힘들단다라고 알려주시려고 말이죠.
낮에 보니까 안 좋은 것들도 잘 보여요.
밤에는 잘 안 보이던 쓰레기들이
생각보다 여기저기 많이 던져져 있더라고요.
인간들은 아무 생각 없이 던지고 간 거 같은데
정작 화는 까치가 내고 있었어요.
나무에서 나무로 날아다니던 까치였는데,
나무 밑 자신의 산책로에다 꼬깃꼬깃 종이 쓰레기를
던져서 버리고 간 인간들을 욕하고 있었어요.
밤에는 어두워서 잘 안 보이던 담배꽁초며
각종 쓰레기들을 몰래 던져놓고 간 것이
더 눈에 띄더라고요.
차라리 밤에는 안 보여서 더 좋았던 점이었죠.
눈에 보이니까 까치가 화내는 이유가 이해됐어요.
왜 인간들은 자기들이 사용하는 공간인데
아무 데다 쓰레기를 던져 놓고 가서
불쾌감을 만들까요?
인간들 심보는 참 알 수가 없다니까요.
늘 투덜대는 나도 아무 데나 쓰레기는 안 던진다고요.
까치가 저렇게까지 화내는 것도 아마
이 폭염의 더위에 나처럼 뒤통수가 뜨거워서
짜증이 높아진 탓도 있을 거 같아요.
까치가 화내고 있는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옳소 옳소"를 외쳐주었답니다.
바람 한 점 없는 이 뜨거운 날씨에
몸이 타들어갈 듯 열이 올라 괴로운데도
그것과는 별개로 좋은 게 하나 있네요.
낮에 보는 하늘이 너무 예뻐요.
하늘의 색이 이렇게 고울 수 있단 걸
그동안 모르고 살았잖아요.
늘 어두움이 가득한 하늘만 보다가
이렇게 고운 빛깔의 하늘을 볼 수 있다니
너무 아름다워 마음속이 벅차오르더라고요.
밝음이라는 것이 너무 부러운 순간이었어요.
처음으로 낮에 반짝 깨어난 이 순간에
고운 하늘을 마음껏 보고 눈에 담아야겠어요.
그때였어요.
찰칵찰칵 소리가 들려오는 거예요.
아까부터 자꾸만 나를 올려다보면서
핸드폰을 움직여보는 여자가 있었거든요.
내 모습을 사진 찍고 싶어서 이리저리 각도를
맞추어 보는 중인 거 같았죠.
그리고 말소리도 들렸어요.
"와, 정말 높기도 하네."
하긴, 내가 좀 높게 매달려 있는 가로등이긴 하죠.
"어쩜 이렇게 예쁘지? 날이 뜨거워서 그런가
오늘따라 더 쨍하게 예뻐 보이네."
저 아래에 있는 인간이 그래도 보는 눈이 있네요.
내가 이 근처 다른 가로등에 비해서
유독 높고 심플하게 예쁘긴 해요.
"이런 건 사진 찍어서 간직해야 해.
오늘 지나면 저 모습은 못 볼 테니까."
오늘 지나면 왜 못 봐요? 내가 이 자리에서
붙박이 가로등으로 산 게 몇 년인데요.
내가 특별히 당신이 사진 찍는 건 허락해 줄게요.
나는 왼쪽 얼굴이 더 예뻐요. 이쪽으로 찍어요.
"아이, 근데 뭐야.
하늘이 예뻐서 사진을 찍으려고 했던 건데,
저 가로등이 자꾸만 시야를 가리잖아.
아, 걸리적거려."
와! 말도 안 돼요!
하늘의 빛깔이나 구름들의 모양은
매일 바뀌지만, 나는 아니라고요.
이 자리에 매일 붙박이로 서있던 건 난데,
왜 날더러 걸리적거린다고 해요?
쟤들이 내 주변을 지나가는 거라니까요.
아까부터 계속 찰칵거리면서 찍어대길래
난 또 나를 찍는 건 줄 착각했잖아요.
오늘 가로등 망신 제대로 당하네요.
아... 창피해!
"근데 이 자리에 이렇게 높은 가로등이 있었구나.
매일 이 길을 지나다니면서도 몰랐어.
그래서 밤에 버스정류장이 환했던 거였는데도
고마운 걸 모르고 지냈었네."
치...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아주 나를 들었다 놨다 하는 인간이네요.
내가 이 자리에서 전철역과 버스정류장 오가는
인간들을 위해서 일한 게 몇 년인데
내가 여기 있는지조차 몰랐다니
그 말을 듣는 순간 되게 슬프더라고요.
그래도 살짝 반성하는 걸 보니 마음이 좀 풀리네요.
"하늘만 찍고 싶었는데,
가로등이 옆으로 살짝 들어가니까
나름 매력 있는 것 같기도 하네.
어디 가로등을 넣어서 다시 한번 찍어볼까?
이 자리에서 가로등을 발견한 기념으로!"
아, 허탈합니다.
인간이 열심히 사진 속에 담으려던 것이
하늘만이었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하늘이 예쁘다고 이리 찍고 저리 찍고
그렇게 사진을 찍어대던 거였는데,
나는 핸드폰이 위를 향해 있으니까
당연히 나를 찍는 건 줄만 알았어요.
내가 멋있어서 찍겠다는 것도 아니고,
가로등 발견한 기념으로 하늘 옆에 살짝 넣어주겠다니
아, 너무 기분이 이상해요.
나는 그동안 무엇을 믿고 그토록
혼자서 툴툴댔던 걸까요.
아무리 내가 잘난 척을 하고,
아무리 내가 힘들다고 투덜거려도
이곳에 가로등이 있었는지도 잘 모르는
그런 존재였는데 말이에요.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내가 유일하게
나의 존재감을 반짝이면서 드러낼 수 있었던 시간이
바로 밤 시간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내가 가장 필요한 시간에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해서
인간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로
세팅되어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나의 어리석음과 거만함을 알려주고자
정말로 폭염의 신이 직접 나서서
나를 잠시 낮시간에 깨워주었던 게 맞을지도 모르겠어요.
오늘의 이 순간을 기억하겠습니다.
예쁜 하늘이 주인공인 사진 옆에서
얼떨결에 끼어서 사진 찍힌 오늘을 말이에요.
혼자서 있는 대로 잘난 척을 해봤자
드넓은 하늘 아래서 나는,
핸드폰 액정화면에도 걸리적거리는
존재인 것을...!
그냥 올려다보기만 해도
하늘이 잘 보이는 이런 시간에는
내가 할 일이 전혀 없음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그렇게 불평했던 밤시간이 소중함을 알았어요.
이제는 기쁜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어요.
내가 부지런히 주변을 밝혔던 그 시간 속으로!
그리고 툭하면 잊어버리곤 했던 나의 보람을
이젠 절대 잊지 않으려고요.
안녕, 낮 시간의 예쁜 하늘!
만날 수 있어서 정말 반가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