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뉴욕에는 '겨울 폭풍 경보'가 내려졌다. 주말에 폭설까지 동반한다는 일기예보 때문인지 마트에는 생필품을 사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나도 그들 사이에 끼어 귤과 고구마, 한국 과자를 넉넉히 사 왔다. 폭설이 지나가는 동안 집 안에서 한 해를 되돌아보며 느긋한 시간을 즐겨볼 심산이었다. 집에 오자마자 책상 위를 깨끗이 치우고 따스한 차 한 잔을 내렸다. 그리고 한 해를 하나씩 돌아보기 시작했다. 나는 어떤 하루들로 이 해를 채워왔을까.
먼저, 올해 1월 1일에 쓴 일기장을 다시 펼쳤다. 그곳엔 지금보다 조금 더 조급하고, 훨씬 더 의욕적이었던 내가 적어둔 숙제들이 있었다. '책 출간'과 '엣시 입점'. 그중 한 가지는 실현이 되었고, 다른 하나는 완성을 목전에 두고 있다. 숫자와 결과로만 본다면 분명 '선방한 한 해'다. 하지만 일기장을 덮고 나자, 마음 한쪽에 묘한 여운이 남았다. 목표를 이뤄 기쁘다기보다 무수한 '보통의 날들'이 더 선명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의 하루는 늘 비슷하게 흘러갔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눈을 뜨고,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며 감사 일기를 쓰고 문장들을 필사했다. 오전에는 모니터의 커서와 씨름하며 글을 썼다. 오후가 되면 운동하고, 차고 작업실에서 소품을 만들었다. 거의 매일 똑같이. 올해에는 특별한 이벤트도, 기억에 남을 만한 긴 여행도 없었다. 물론 가족들과의 소소한 여행은 있었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 것은 '글쓰기'다. 뉴욕에서의 25년을 글로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에 잠을 설쳐가며 쓰고 또 썼다. 그 사이 에세이 수업과 두 차례의 문해력 강의를 들었다. 젊은 분들과의 수업이어서 순발력은 조금 더뎠어도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공부에 집중했다. 그만큼 절실한 시간이었다. 선생님이 오죽하면 '정수리만 보이는 여인'이라고 별명을 지으셨을까. 하하. 주 1회 셀프 편집회의를 하며, 글이 잘 써지거나 아니거나 하는 날들이 수없이 지나갔다. 무리한 탓에 링거를 두 번이나 맞았고. 그럼에도 다음 날 아침이 오면, 또 차를 끓이고 책상 앞에 앉았다. 누가 이기나 보자면서.
마침내 그런 시간이 모여『행복한 가드너씨』라는 제목의 책이 곧 세상에 나온다. 그리고 내년에 세 권의 공저 또한 선보일 예정이다. 여전히 믿기지는 않지만, 분명한 건 수많은 보통의 하루가 내게 준 선물이라는 사실이다.
차고 작업실에서도 새로운 일이 일어났다. 디지털 문맹이나 다름없던 내가 배우고 다시 시도하며 엣시 입점에 성공했다. 그러자 신기하게 미국 전역에서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정성 어린 리뷰가 쌓이고 어느덧 Top Gift Shop이라는 이름표까지 달게 되었다. 내가 만든 소품들이 누군가에게 닿아 떠나는 것을 보며 깨달았다. 차고에서 보낸 그 지루한 오후들이, 사실은 세상 곳곳으로 이어지는 보이지 않는 다리를 놓고 있었다는 것을.
그렇게 2025년은 내게 ‘출간과 엣시 입점’이라는 따뜻한 선물을 남겨주었다. 물론 종이책으로 손에 쥐어지기까지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하지만. 돌이켜보니 나를 진짜 단단하게 만든 것은 화려한 결과물이 아니었다. 지루하고 막막한 과정을 견뎌낸 보통의 하루였다. 남과의 비교 속에서 스스로를 토닥거렸던 날들, 내 능력의 한계를 오기로 버텨냈던 시간이 준 것이기에 뿌듯하다. 일 년 동안 참 많이 흔들렸지만, 끝내 멈추지 않았다는 것.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내겐 이미 충분한 선물이다. 올해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더 잘해보겠다는 다짐 대신 여기까지 온 나를 조용히 안아 주고 싶다.
PS: 독자님들
한 해 동안 부족한 제 글 읽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따뜻한 연말 되시고, 새해에도 좋은 글로 다시 만나요.
감사합니다.